앨빈 토플러는 “미래는 강자와 약자 대신에 빠른 자와 느린 자로 구분될 것이다!” 전망했습니다. 실제로 “현대인에게 속도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쁜 현대인에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그래서 느려지면 답답하고,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훈련이 된 사람은 항상 성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 시리즈를 무려 12번이나 거절당했지만, 끝까지 기다려서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했습니다.

낸시 엘리엇은 “모두가 포기한 아들을 믿음과 인내로 기다려서 발명왕 에디슨이” 되었습니다. 잉태된 “생명은 10달을 기다려야 태어나는 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우리가 “이민자로 이 땅을 살아갈 때! 기다려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문제는 “기다리되, 무엇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정말 “기다려야 할 것을 기다리며 살아간 삶과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을 기다리고 살아간 인생이 맺는 열매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1세기 말은 “주님을 직접 본 사도들의 사망으로, 복음의 왜곡이 가장” 컸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옛 계명과 주께서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여전히 유효함을” 도전합니다. 이는 “당시 교회와 영지주의자 모두가 서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9절 말씀처럼 “빛 가운데 있다며 형제를 미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은, 어둠에 행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영적인 눈까지 멀고 말았다.” 지적합니다.

또한 “당시 초대교회에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신앙이” 강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요한은 마라나타 신앙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는 도전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입니다. 오늘부터 “12월 24일까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이어집니다.

대림절은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다리는 동시에, 다시 오실 재림 주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살면서 “기약 없이 견디는 것은 큰 고통이고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소망으로 받을 상급을 고대하며 기다림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세상은 “12월이 되면, 한 해를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와 모임을 만들며 여느 때보다 바쁘고” 분주해집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기독교인조차 연말에 즐기고 쉬려는 계획에 심히 바쁘고” 분주해집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의 주님도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세상과 다르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기다림으로 하나님 주시는 성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대림절 기간에 어떻게 주님을 기다려야 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가까운 형제를 사랑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1세기 말 “영지주의는 영지, 거룩한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는 영지, 깨달음이 있다고 자부했지만,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는 악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을 특별히 형제! 아델포스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델포스는 “‘아’ 같다는 뜻이고, ‘델포스’는 여성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델포스는 같은 자궁에서 나온 사람들이란 뜻으로,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성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본문 9절을 보면, 이처럼 한 하나님을 믿는 형제가 서로를” 미워했습니다. 미워하다! “미세오는 싫어하다. 증오하다.”란 뜻입니다. 이는 “형제에게 증오심을 품고, 적대적으로 행동하고 용서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이처럼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았는데, 많은 이가 나는 그래도 빛 가운데 살아가고 있어!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형제 사랑을 잃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당시 교회를 강하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형제는 “가까이 있고, 친분이 있고, 매번 만나고 교제하는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존귀한 보혈을 흘리심은, 이처럼 가까운 형제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알지만, 실제로는 사랑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갑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복음의 핵심 계명인 형제 사랑을 잃어서 분쟁과 다툼에 멍들어가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분쟁의 원인이 진리와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도” 사소합니다.

물론 “분쟁하는 양측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주님은 그 어떤 분쟁도 선하게 보지!” 않습니다. 이는 “분쟁이 성경의 교훈에 배치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역행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형제 사랑을 잃으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기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별명은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로 불릴 정도로 다혈질”이었습니다. 실제로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마리아에 불이 내려야 한다!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거듭난 후! 끊임없이 형제 사랑이 가장 소중함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형제 사랑은 요한의 유언이자 마지막 교훈”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인은 형제 사랑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마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대림절을 맞으며, 형제자매 중, 서로 소원했던 영혼이 있다면, 먼저 다가갈 수 있기” 원합니다. 형제 사랑은 “내가 먼저 소원했던 영혼, 나를 힘들게 한 영혼을 찾아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심중에, 내가 뭘 잘못해서 그래야 해! 지금처럼 살아도 전혀 문제없어! 뭘 새삼스럽게 그렇게까지 해야 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특히 “내가 먼저 손 내밀어 그 영혼이 다시 주님께로 돌아온다면, 돌아올 수 있다면, 힘들어도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교회가 다시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형제를 사랑하면! 나와 교회의 미래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먼저 다가가 보지도 않고, 안 될 거야! 그 사람은 안 돼!” 단정합니다. 부목사 때! “양 집사님이란 분이 일터에서 쓰러졌는데, 바빠서 빨리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 주의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제가 그 부인 집사님에게 심방을 말씀드리자, 그분이 제게 폭언을” 했습니다.

교회 “로비에 사람이 많았는데, 바쁜 분이 그럴 필요 없다! 소리치고 외면”했습니다. 제가 “주차장까지 쫓아가서 사과했지만, 더 크게 소리치며 막무가내”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양 집사님이 좋아하는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그 목사님 설교 CD를 사서, 두 번이나 그 집 앞에 놓고” 왔습니다. 그리고 “양 집사님이 회복 후, 폭언했던 부인이 저를 자기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그 후 “저와 양 집사님의 관계는 깊어졌고, 많은 사랑과 은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심중에 “목사니까 그렇게 했지!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다가가면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형제 사랑으로 주님의 오심과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반복하지만! “먼저 찾아가야 할 영혼! 누가 가장 먼저 마음에” 생각나세요? 대림절에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먼저 다가가는 사랑으로 주님을 기다리기” 원합니다.

2.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요한은 이미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추었다!”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오셔서, 어둠의 근원인 죄를 다 깨끗이 씻어주셨음을” 뜻합니다. 주께서 “어둡고 죄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시려,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보혈로 내 죄를 씻으시고, 어두운 죄인의 인생을 밝은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본문 9절에서, 많은 영혼이 빛 가운데 있다면서 지금도 어둠에 있다!” 책망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며, 마라나타, 주님을 기다릴 이유가 본문 10~11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야 거리낌이 없고, 실족하지 않고 바른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눈이 밝아져서 마라나타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성도가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도전합니다. 사람이 “빛 가운데 살아감은 공개된 삶, 모두가 볼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면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아는 삶과 안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삶, 빛 가운데 사는 삶과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삶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예배 중 “조는 분들 대다수는 아무도 나를 안 볼 거야! 앞사람 뒤에 숨으면 안 보일 거야!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 보입니다. 과거 “부목사로 사역할 때! 주일 예배 때 가끔” 졸았습니다. 당시 “주일 예배 사회 세 번에 주일 새벽기도까지 인도해서 피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은 “졸지 않으려고 사탕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예배에 들어갔는데, 안타깝게도 사탕 껍질을 까는 소리를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예배 중 “졸려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사탕 껍질을 까는데, 뒤에서 누군가 저를 툭툭” 쳤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졸린 데 나도 사탕 하나만 줘! 말씀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두운 삶은 “비공개적이고, 개인적이고,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사는 삶은 모두가 보는 삶, 주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인인 인간은 누군가 지금 나를 보고 있다, 생각하면, 당당하기보다 감추고 숨으려!” 합니다.

우리가 “빛보다 어두움에 살아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려면, 누가 보든 안 보든,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에 도전해야!” 합니다. 신행일치는 “나의 믿음과 삶이 일치하는 삶으로,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세상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언행일치도 대단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과 재림을 기다리는 주의 백성은 언행일치를 넘어 신행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다리오 때 “다니엘은 많은 사람의 참소를 받아서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다니엘이 “왕의 금령을 알고도 날마다 기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은 다니엘의 신행일치가 싫었지만, 다니엘은 핍박 중에도 믿음과 삶이 일치한 신행일치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다니엘의 신행일치에 응답하신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도 신행일치로 주님을 기다려서 악한 세상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1970년대까지 “과테말라 알로몽 지역은 우상숭배, 알코올 중독, 성적 타락이 극심했던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척박한 땅이, 마리아노 라스카으제란 청년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당시 “알코올 중독자로 피폐한 삶을 살았던 마리아노는 복음을 영접하고, ‘내가 너를 택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노는 “하나님 은혜로 새사람이 된 후! 주변 곳곳이 모두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마리아노를 통해 하루에 400명이 치유와 이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매달 “6트럭 농작물이 생산되었는데, 하루 평균 50트럭 농작물이 생산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아가서 “범죄율이 떨어지고, 가정이 회복되고, 토지까지 비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죄인이지만, 한 영혼이 신행일치의 삶을 살아감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었습니다.

물론 “신행일치는 어려운 명제이지만, 빛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도전해야 할 명제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해 보지도 않고, 언행일치도 어려운데 무슨 신행일치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도전해 보면, 주님 주시는 빛이 우리 삶에 풍성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신행일치로 “살아갈 때! 주님의 재림은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소망이 될 것”입니다. 한주도 “신행일치로 빛 가운데 살아서 주님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