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 교회의 유명한 부흥사! 김익두 목사는 황해도 안악 출신의 소문난 불량배”였습니다. 사람들이 “외출할 때! 오늘은 제발 김익두를 안 만나게 해 주세요! 빌 정도로 난봉꾼”이었습니다. 한 번은 “서양 선교사가 전도지를 주자, 선교사 바로 앞에서 그 전도지로 코를 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을 만나서 목회자가 된 후!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신유 은사가 탁월해서 만 명 이상의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또한 “김 목사를 통해 무려 28만여 명이 복음을 영접했고, 수많은 목회자가” 세워졌습니다. 결국 “김 목사는 세상에 없었으면 하는 죄인에서, 누구나 동경하고 존경하는 주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면, 그 어떤 죄인도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김익두 목사를 변화시킨 하나님이 바로 내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나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사모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1세기 말 “영지주의는 영지, 거룩한 깨달음이 있으면 죄를 이길 수 있다! 영지! 깨달음이 있으면, 육체적인 죄가 구원받는 데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 가르쳤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본문 6절에서, 영지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니!” 요한은 “인간이 자기 죄를 부인하면, 이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진리와 무관한 것이다! 분명한 어조로” 책망했습니다.

나아가서 “요한은 구원은 오직 미쁘시고 의로운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야 받는다!”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미쁘다! 피스티스는 신실하다. 믿을만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죄인이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께 신실하고 믿을만한 영혼으로 변화됨이 바로 은혜”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의 심각성에 관해 너무도” 둔감합니다. 실제로 “모두가 다 죄에 파묻혀 살아가서, 판단력을 상실해서, 영생마저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악한 세상에서 미쁜 영혼, 신실한 영혼을” 찾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만 진리다! 고백하는 영혼을” 찾습니다. 불신자도 “우리가 세상과 다르게! 믿을만한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합니다. 문제는 “죄인에서 신실한 영혼으로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 경우가 많기에!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세상의 조롱은, 그만큼 기독교가 미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문제는 “믿을만하다! 이 인정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영혼 중! 나를 이곳에 부르고 예배드리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고, 마음에 찔림을 주고, 새롭게 결단하도록 역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족해도 “악한 세상에서, 나부터 죄인에서 신실한 영혼으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인에서 어떻게 하면 미쁜 영혼으로 바뀔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죄인에서 미쁘신 삶이 되려면, 버릴 것을 확실히 버려야 합니다.

본문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합니다. 자백하다! “호몰로고멘은 인정하다. 고백하다! 의미로! 자기 죄를 있는 그대로 시인하고, 낱낱이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영지주의자는 나는 죄짓지 않았다며 자기 죄를 부인”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자기 죄를 부인한다고 죄가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죄를 있는 그대로 다 고백하여 버리고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내려놓고 버려야! 하나님께서 내 모든 불의함을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내려놓고 버려야! 죄인인 나를 의롭다! 미쁘다! 믿을만하다!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또 다른 실존적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내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내려놓아도! 나는 또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모두 “회개하고 버려도! 다시 범죄 할 수밖에 없기에! 또 죄를 다 내려놓아야 하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마귀도 “너는 매일 범죄 하는 죄인이야! 회개한다고 되겠니?” 속삭입니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명제가” 도출됩니다. 죄인인 “내가 십자가 보혈을 믿고, 모든 죄를 회개했기에, 나는 의인으로 인정받은 죄인”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실존적으로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기에, 나는 더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은 은혜를 부인하고! 계속 죄인임을” 강조합니다. 과거 “운전 중! 횡단보도에서 좌회전하자, 경찰이 제 차를” 세웠습니다. 경찰이 “위반 사실을 말하고, 왜 그렇게 급하게 운전했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저는 목사인데 장례식 때문이었다! 속히 티켓 끊고 보내달라!” 청했습니다.

경찰이 “제가 목사임을 확인하고, 다음부터 조심하라며”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경찰의 경고 후! 즉시 현장을 빠져” 나갔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 경찰이 이처럼 경고만 했는데, 빨리 티켓을 끊으라고 말할 분이” 있겠어요? 이처럼 “주께서 죄인인 나를 의인으로 인정하셨기에! 나는 여전히 죄인이라고 고집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내가 죄인처럼 살아가지만! 나는 분명히 의인으로 인정받았기에! 계속해서 내 죄를 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내 죄를 버린 그 자리에 하나님 말씀을 채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은 “살아서 활력이 있고,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로 비워진 자리에 말씀이 채워지면, 반복되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로 “비워진 자리에 말씀이 채워지면, 주님께서 나를 미쁘다!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버리지만! 다시 세상에 나가서 다양한 죄를 짓고, 빈자리를 다른 죄로 채우며” 삽니다.

이처럼 “내 실존이 죄짓고 또 다른 죄를 다시 지을 수 있기에! 내 삶을 더 말씀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주께 “미쁜 인생으로 인정받기 위해! 간절함으로 한 말씀이라도 더 사모하고! 한 번이라도 더 말씀 들어야 하고, 한 번이라도 더 말씀으로 내 삶을 채워야!” 합니다. 유다가 “주님을 팔고 힘들어서 제사장에게 돈을 돌려주며, 죄를 버리려” 했습니다. 문제는 “죄를 버리려 했지만, 그 빈 자리에 말씀을 채우지 않았기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해서 유다 못지않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간절함으로 자기 죄를 다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죄를 버린 그 빈자리에! 성령님 주시는 은혜와 말씀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의인으로 인정받았고, 계속해서 말씀을 채워갔기에 위대한 사도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죄인이 미쁘게 되려면! 죄를 버린 그 자리에, 말씀을 채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미쁜 영혼이 되려고, 악한 죄를 버리려고, 말씀을 채우려고 얼마나” 노력하세요? 빈자리에 “채워진 말씀이 더는 죄짓지 않고 하늘의 은혜를 받게” 합니다. 채워진 “말씀이 나를 주님과 사람 앞에서 미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한주도 “항상 말씀으로 내 삶을 채워서 죄를 이기고 미쁜 삶이 되기” 원합니다.

2. 죄인에서 미쁘신 삶이 되려면, 하나님과 더 깊이 사귀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6절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말씀합니다. 당시 “영지주의는 하나님과 깊이 사귄다면서 어둠에 행하고, 거짓말하고, 진리와 무관하게” 살았습니다. 여기서 “행하다! 원어는 주변을 이리저리 거닌다. 배회하며 다니다!”라는 뜻입니다. 생각할수록! “하나님과 사귐이 깊은 영혼은 이처럼 어둠 속에서 배회할 수 없고, 누구도 이런 삶을 미쁘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은, 죄인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면, 빛 가운데 행하고, 서로 사귐이 있고, 주의 보혈이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 말씀합니다. 요한은 “죄인이 주님께 미쁘다! 인정받고 싶다면,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이 필요하다!” 도전합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영지주의를 책망한 내용은 오늘 우리를 향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며! 어둠에서 배회하고, 세상을 기웃거리며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서! 수많은 거짓말로 삶이 뒤덮여” 있습니다. 삶에서 “진리를 행하기보다! 진리를 가리고, 진리와 역행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절대로 인력으로 어둠을 이기고, 진실만 말하고, 진리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소중한 보혈까지 흘리게” 하셨습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어둠을 이기고, 거짓보다 진실을 말하며, 진리 안에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말씀 안에서, 진리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지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최대한의 은혜와 사랑, 희생을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 주일 한주의 첫날! 교회에서 예배드림은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 깊게 사귀며 살려면, 하나님이 내 삶에서 항상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철학과 종교도 인간의 죄를 해결할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성경만, 십자가 보혈만이 우리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말씀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도 주님이 뒷전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과 깊이 사귈 수” 있겠어요? 오늘의 “문제는 하나님이 최우선이 아니라, 내 삶에 가장 나중이 되어감에”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주인이고 구세주라면서! 내 직장보다 하나님이” 나중입니다. 피곤하면 “말씀을 통해 은혜받고 새 힘을 받으려 하지 않고, 말씀 듣는 자리를 가장 나중으로” 미룹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하나님보다 내 것, 세상 것을 먼저” 취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은 점점 형식적인 만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반복하지만! “죄인인 내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미쁘다! 인정받기 원하면 항상 주님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래야 “더는 어둠에서 배회하지 않고, 거짓을 이기고, 항상 믿을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CCC “김준곤 목사의 백문일답이” 있습니다. 이는 “인생의 100가지 상황에서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오직 예수뿐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누구?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크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백문의 답변을 보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우리 삶의 이유는? 절망에서 소망으로 살려면 누가 필요한가? 병든 자와 죽어가는 자에게 전할 소식은? 행복한 가정이 되는 비결은? 좋은 부모, 좋은 자녀가 되는 비결은? 우리 아이가 처음 배워야 할 분은?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은? 세상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실 분은?” 오늘 “우리는 이처럼 모든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지만, 주님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안타깝게도! “쓸데없는 것, 무가치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갑니다. 부족해도! “하나님이 최우선이 되면, 하나님과 사귐은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부터 “돈과 명예보다, 건강과 자녀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과 사귐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미쁘다! 인정받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