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독일은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로 많이” 어수선했습니다. 이에 “루터는 1517-10-31일, 비텐베르크 성당에 유명한 95개 조항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사제였던 루터는 95개 조항에서 교황과 단절이 아니라, 다만 면죄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그 후! “개혁의 핵심은 모두 다섯 가지”였습니다. “Sola Scriptura! Solus Christus! Sola Gratia! Sola Fide! Soli Deo Gloria!”

루터의 “개혁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특히! “루터의 개혁은 교회 전체가 아닌, 루터 개인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기념 주일인데, 우리 역시 본질을 놓치고 살아감이” 심각합니다. 많은 교회가 “개혁을 주창하지만, 개혁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본질의 “회복을 원하지만, 이미 본질을 상실한 교회가 많고, 자신의 개혁보다 외적인 개혁만 주장함이 문제”입니다.

요한일서는 “AD 90년경! 사도 중 유일한 생존자 요한이 기록한 서신서”입니다. 당시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부활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이 점점 교회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에 “요한은 서두부터,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영원한 생명이기에 그분에게 돌아가야 진정한 기쁨이 있다.” 강조했습니다.

요한은 “복음의 본질인 주님을 잃었기에, 많은 영혼이 영적 곁길로 빠지고 기쁨도 잃었다.” 책망합니다. 결국 “참된 개혁은 잃어버린 본질인 주님께 돌아와야 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개혁을 주장하지만, 내 개인의 개혁보다 세상과 주변의 개혁만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어떻게 개혁할지, 무엇을 개혁할지, 왜 개혁이 필요한지도 잘” 모릅니다. 진정한 “개혁은 죄인인 인간이 생명의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개혁은 일회성이 아니라 주의 재림까지 계속되어야 하고, 남이 아닌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개혁은 공동체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복음을 찾는 개인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독일에서 루터, 취리히에서 츠빙글리, 제네바에서 캘빈, 스코틀랜드에서 존 녹스! 개인의 개혁이 공동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나부터 “본질로 돌아가면 나와 내 주변은 물론 교회와 미래가 달라져서 이전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너부터! 세상부터! 교회부터 개혁되어야 한다! 그릇된 주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개혁, 본질로 돌아감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봅시다.

1. 본질을 회복하려면,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본문 1절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말씀합니다. 사도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요한은 생명의 말씀, 주님을 보고 듣고, 손으로 만졌던 생생한 증인”이었습니다. 원어에서 “듣다, 보다, 만졌다! 모두 이미 끝나버린 완료와 과거형 동사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목격자 요한은! 비록 주님을 보고 듣고 만짐이 과거지만, 지금도 생생한 현실”이었습니다.

반면에 “본서의 수신자는 주님에 관해 듣고, 보고, 만짐이 현재가 아닌 과거처럼 되어” 갔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주님을 보고, 듣고, 만진 은혜마저 점점” 약해졌습니다. 마침내 “많은 영혼이 복음과 전혀 관계없는 이단에 미혹되어 넘어져” 갔습니다. 이처럼 “본질을 떠났기에, 그들의 삶에는 주님과 사귐이 깊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한은 삶이 개혁되려면 자신처럼 듣고 보았던 주님의 은혜를 생생히 만질 정도로 다시 회복하라!” 강조했습니다.

본질을 “회복하려면 주님에 관해 듣고, 만진 그 은혜와 사랑을 되찾아야!” 합니다. 많은 분이 “교회에 오지만! 주님을 보고 듣고 만진 첫사랑의 은혜가 가물가물”합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던 뜨거움을 상실해서! 내가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구원받는지, 왜 구원이 필요한지! 잘 모른 채” 삽니다. 직분자조차 “과거에 주님을 보고 듣고, 만진 첫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심지어 “본질을 잃어버렸는데도, 전혀 불편함과 문제의식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주께서 내 죄를 대속해 주신 복음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부족한 “나를 세워주시고, 사랑하고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컸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눈물과 감동이 말랐고, 복음을 들으면 마음에 부담감이 더 커져” 갑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더는 십자가 복음이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내가 감동과 눈물을 잃었다면, 내가 경험한 첫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사랑을 “잃어가기에! 본질인 복음과 멀어지고, 개혁과도 점점 멀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록 2:4~5절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너희가 첫사랑을 잃어버렸기에 책망을 받는 것이다!” 말씀합니다.

또한,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를 향한 촛대를 옮기겠다!” 경고합니다. 삶이 “힘들수록! 나를 위로해 주신 주님! 나를 만나주신 주님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마귀는 “내가 첫사랑을 잃었기에, 하나님도 나를 잊었고, 이미 버렸다!” 속삭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내가 본질인 주님께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받은 거금의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거금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쓸 때! 나름대로 기쁨이 있었겠지만, 이는 진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삶의 근원으로 돌아왔을 때!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아들이 되었고, 풍족함을 찾았고, 무엇보다 아버지 사랑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처럼 “다시 첫사랑을 찾았을 때! 탕자가 겪었던 인생의 문제는 모두다” 해결되었습니다.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가 나를 힘들고 어렵게” 합니다. 자녀와 “신분 문제, 건강과 경제적인 문제, 내가 감당치 못하는 문제가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때로 “나와 무관한 문제! 억울한 오해 때문에 내가 어디에 서야 할지! 황당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악한 세상의 삶은 항상 쉽지 않기에! 나 혼자 내 인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고집 피우지 말고, 주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 첫사랑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부족한 “나를 품어주신 사랑, 내 눈물과 상처를 닦아주신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주님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회복하면! 자녀와 신분 문제, 건강과 경제적 문제를 주님께서 전부다” 책임지십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돌이켜 첫사랑을 회복하는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우리가 참된 개혁! 본질인 복음을 회복해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본질을 회복하려면, 우리 삶이 세상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우리’라는 단어와 본서의 수신자! ‘너희’라는 단어를 구별하여”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과 동역하는 성도를” 말합니다. 이들은 “이단의 영적 도전이 극심했지만, 여전히 복음과 주님을 굳게 붙잡고 헌신하는 영혼들”입니다. 반면에 “‘너희’는 세상의 불신자,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은 어렴풋이 들었지만, 제대로 보고 듣고 만진 체험이 없고, 그저 복음 주변에서 서성이는 영혼들을” 뜻합니다.

요한은 “서론을 통해 복음 주변에서 서성이는 영혼이 다시 복음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도전했습니다. 주님 “안으로 들어와야! 우리! 요한 일행과 깊은 사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으로 들어와야, 주님과 영적 교제도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복음 밖에서 개혁을 외치면, 비판과 정죄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바로 깨닫고, 본질을 회복해야 참된 개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개혁은 교회 밖에서, 말씀 밖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말씀 안에서! 본질인 주님과 더 깊은 사귐을 회복해야 개혁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복음 밖의 개혁은 내 주장과 세속적 사고가 주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복음 안의 개혁은 성령님께서 주도하기에! 진정한 개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개혁을 원한다면, 주님 밖에, 주님 주변이 아니라 주님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실제로 “무엇인가를 개혁하려 해도!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많은 분이 “밖에서 보면 충청도 말이 제일 느리고 어눌하다!” 오해합니다. 그런데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충청도 말이 가장 빠르고 간결”합니다. 누가 돌아가셨다! “영남은 ‘죽었다 아임니꺼!’ 호남은 ‘죽어버렸어라! 충청도는 ‘갔슈!'” 간단합니다.

실례합니다! “영남은 ‘내 좀 보이소, 호남은 ‘아따 좀 보드라고!’ 충청도는 ‘좀 봐유!'” 짧습니다. 보신탕 하십니까? “충청도는 이를 ‘개혀?'” 짧게 말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많은 일이! 안에서 보는 것과 주변에서 보는 것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복음 주변에 있는 인생과 복음 안에 있는 인생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우리가 “참 개혁을 원한다면,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사귐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려면! 삶에서 하나님과 실제적인 대화가 많아져야!” 합니다. 인간도 “서먹한 관계가 대화로 가까워진 후! 주변에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삶의 모든 현장에서, 내 안에 계신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무엇이 옳은가요? 어디로 갈까요? 이것을 할까요? 말까요?” 감사하게도!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대화를 청할 때마다, 절대로 거부하지!” 않습니다.

내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경륜으로, 가장 바른 답과 지혜를 직접” 주십니다. 이처럼 “주님과 대화가 많아질수록! 내 삶은 세상에서 하나님 안으로 점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많은 고난에도 세상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살았던 비결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과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위험할 때! “아프고 힘들수록! 감사한 중에도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하나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 때 벌어진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오점인 밧세바 사건과 인구 계수 사건”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다윗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고, 하나님 밖에서 이런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주인! 내 아버지기에! 모든 순간마다, 혼잣말로라도 하나님께 물으며” 살아가세요!

느헤미야 2:4절은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말씀합니다. 삶에서 “바쁘고 분주할수록! 짧은 시간이라도 묵도하며 주님의 의견을 물을 때! 내 삶은 절대로 주님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힘들수록! “더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으며, 점점 더 하나님 안으로 내 삶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평생 세상이 아닌 본질 되신 하나님 안에서, 바른 개혁으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