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술독에 빠져 살아가던 한 남성이, 만취한 상태로 새벽녘이 되어 귀가”했습니다. 방에 들어오니, “아내가 엎드려 자고 있었고, 눈물 자국이 가득한 노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만취했지만, “호기심으로 본 아내의 노트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나 자살은 신앙인이 취할 길이 아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남편이기에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에!”

 

평소 “아내의 아픔을 전혀 몰랐던 남성은 큰 충격을 받았고, 하염없이 울며 자신의 삶을 회개”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으로 인해 아파하는 아내가 불쌍해서 울었고, 자기 인생도 너무 가련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 남성을 만나”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너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다. 너를 사랑해서 항상 함께 있었어!” 그렇게 “변화된 남성이 100주년 기념 교회를 섬겼던 이재철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삶에 100% 만족할 수 없고, 바뀌기 원하되! 좋게 변하는 역전을” 원합니다. 문제는 “누구나 선하고 복된 역전을 소망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서 그 은혜로 살아가는 영혼의 삶에 참된 역전이” 있습니다. 본문은 “곳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기구한 삶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소외되고, “외면당하고,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던 가엾고 아픈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주변 사람과 교제를 잃어서! 홀로 대낮에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구한 여인이 주님을 만난 후! 예배를 설명할 때! 대명사처럼” 등장합니다. 또한 “주님을 직접 보고 대화하며, 나중에는 자신을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할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여인은 주님을 만난 후! 완전한 인생 역전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만! 기회가 위기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삶은 마치 새옹지마처럼 좋고 나쁨의 역전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주시는 역전은 우리 삶을 항상 선한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성도 중에도 하나님 주시는 역전을 경험하는 영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왜 역전되었는지!” 살펴봅시다.

 

  • 연약한 인생이 역전을 경험하려면,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7절에서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인이 “주님께 다가가지 않았고, 오히려 주님께서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셨습니다. 여인은 “이처럼 먼저 다가오신 주님 앞에서 심히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당시 “유대인 남성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여인의 삶에서! 주님처럼 먼저 다가와서 따뜻하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일 여인이 먼저 다가오신 주님을 외면했다면” 어땠을까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부끄러워서 ‘왜 남의 사생활을 물으세요!’ 피했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여인이 먼저 말을 거는 주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렇다면 “여인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었고, 본문의 이야기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여인의 “삶이 참으로 기구했지만! 먼저 다가오신 주님과 대화를 이어감으로, 주옥같은 말씀이 기록되고, 자신의 인생 역전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요 15:16 절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은혜는, 내가 의롭고 잘 나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자격 없고 부족한 내게 먼저 다가오셔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죽음에서 살아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부족한 내게 한마디 말씀이라도 더 주시고자 내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자부하는 우리 각자도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외면할 때가 더” 많습니다. 혹자는 “내가 결심만 하면 주의 은혜를 언제고 받을 수 있다! 착각하며” 삽니다.

 

과거 “어떤 청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 옆의 강도가 죽을 때 구원받았는데, 저도 죽을 때 주님을 인정하고, 지금은 마음대로 살래요!” 그래서 “제가, 그런데 너 언제 죽을지 아니? 묻자! 청년이 답변을” 못했습니다. 하나님 “은혜는 내가 정한 시기! 내 맘대로 받기보다 주께서 먼저 다가오심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혹자는 “믿는다면서!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시는 은혜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은혜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항상 나와 가까이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내게 은혜와 구원을 주시려고! 항상 먼저 다가오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3:16 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물었습니다. 또한 “계시록 3:20 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내가 “이전보다 더 큰 은혜를 누리려면! 지금의 삶에서 역전되길 원한다면! 먼저 다가오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아니, “내가 먼저 다가오는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주님도 내게 다가오고, 나도 주님께 다가가면! 그 만남이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삶이 주님 보기에 너무 부끄러워서! 주님의 먼저 다가오심이 두렵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 “내가 준비되지 않아서, 자신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먼저 다가오심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항상 아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죄인 “삭개오가 먼저 다가오신 주님을 아멘으로 영접해서 그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상처가 “가득했던 기드온도! 먼저 다가오신 주님을 아멘으로 영접하여 사사로 우뚝” 섰습니다.

 

평범한 “목동이었던 모세도! 주님의 먼저 다가오심에 “아멘!’ 답하여 출애굽을 주도”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주님을 만나고 영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자는 “마음이 상해서! 섭섭해서! 알아주지 않아서 주님의 다가오심을” 거부합니다. 이처럼 “감정적으로! 먼저 다가오신 주님을 거부하는데! 그 삶이 어떻게” 평안하겠어요? 내가 “주님을 떠남은 내 소중한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이기에! 이는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실제로 “어려울 때! 주님을 외면한 영혼은 훗날, 깊이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상처받고 섭섭할수록! 먼저 다가오는 주님을 더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 하나님 은혜로 더 나아지는 역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먼저 다가오는 주님을 만나서! 더 나은 삶으로 역전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1. 연약한 인생이 역전을 경험하려면,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본문 14절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께 본문 14절 내용을 직접 듣는다면! 100% ‘아멘!’ 화답하며 다 받아들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만이 우리 삶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 15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특이하게” 답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인은 “본문 11절에서, 주님을 주여! 또는 당신, 그 호칭이 계속” 바뀌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주님의 말씀이 귀했지만, 여인의 가슴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 후! 여인은 주님을 계속 주여! 부르며, 영생의 물을 달라!” 구했습니다. 여인은 “비록 기구하고 버거운 삶이었지만 구원을 사모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여인은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신 영생의 말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가장 기구한 인생에서 영광스럽고 존귀한 여인으로 그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 깊이 함몰되어서! 하늘의 것을 말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후의 삶, 영생과 구원을 말하면 따분해하고, 지금 안 들어도 되는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설교도 나를 위로하며 옹호해 주고, 내 편을 들어주어야! 은혜롭게” 듣습니다.

 

반면에 “정말 들어야 할 십자가 복음, 구원의 복음은 따분하고 지루하게” 생각합니다. 정말 “들어야 할 이야기보다, 자신이 듣고 싶은 설교만을 선호할 때가 더” 많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이 이렇게 약해지고,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에 깊이 빠져서! 구원의 복음, 영생에 관한 관심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님 심판대에 서야 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쁘고 힘들수록! 우리는 더더욱 천국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매사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세상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 번뿐인 인생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최근 “여러분의 기도에 천국에 대한 소망, 구원에 대한 감사가 얼마나” 있으세요? 혹시 “매일! 이 땅의 것만 달라고! 있다가 없어질 것만 달라고! 영원하지 않고 한시적인 것만 달라고! 하나님의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만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천국 소망,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누구도 기독교인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존 웨슬리가 “조지아 사역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중! 엄청난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데! 함께한 모라비안 교도들은 평안하게! 서로 손을 맞잡고 은혜롭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당시 “그들은 죽음의 공포는 고사하고, 천국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웨슬리가 성경도 알고, 나름대로 열정도 있었지만, 구원의 확신! 천국에 대한 확신이 너무도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도 구원의 확신 없이 교회 마당만 밟는 영혼이 적지!” 않습니다.

 

만일 “오늘 밤! 내가 이 땅의 삶을 다했는데!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는지! 물으시면, 무엇이라” 답하시겠어요? 구원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부족해도! “비록 죄와 허물이 커도! 내가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주의 백성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하나님의 아들로 온전히 믿고” 영접하셨나요?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으로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내 구원의 확신을 흔들려고 거짓을 속삭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미혹합니다. 그래도 “반드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지켜야!” 합니다. 혹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사하고, 내 구주임이 믿어지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간절함으로! 주님께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인 구원의 확신이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해도 “그렇게 구원의 확신으로 주님을 만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항상 “구원의 확신을 지키며, 천국에 가기까지 날마다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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