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소련은 15개 국가의 연합체로 중국과 인도에 이어 3위의 인구 대국”이었습니다. 또한 “냉전 시대에 미국과 함께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세 가지 아이러니함이” 있었습니다. ➀ “브라질 다음으로 나무가 많은 데 종이가 부족했다! ➁ 손꼽히는 산유국이었지만, 기름 부족으로 공장 가동이 원활하지 않았다. ➂ 세계 1/6을 차지하는 광대한 국가였지만, 식량이 부족했다.” 마침내 “1991-12, 소련은 쿠데타와 전쟁 없이 10개 나라로” 나뉘었습니다.

 

훗날 “러시아 학자들은 소련 붕괴의 원인을! 러시아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론지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몰락을 원하지 않지만, 국가와 기업, 개인의 삶에 피할 수 없는 몰락이” 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인 우리도 넘어질 수 있기에! 악한 세상에서 굳건하게 서서 살아가려면, 항상 믿음의 경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9:27 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영적 체험과 경륜이 깊었지만, 절대로 믿음의 경주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자신도 주 앞에서 바로 서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의 13개 서신서 중 목회 서신으로, 영적으로 가장 완숙한 시기, 인생 말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나는 너무도 부족한데, 하나님 은혜가 그 부족함을 채웠다!” 고백합니다. 특히 “바울은 본문 15절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말합니다. 여기서 “괴수니라! 현재형 동사를 써서, 나는 지금도 죄인의 괴수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곧! “나는 지금도 여전히 쓰러질 수 있기에, 항상 바로 서려고 노력함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은 “평생 달려 할 경주이기에!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에 “고전 10:12 절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경고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숫자가 점점 줄고, 교회 문제가 급증함은 넘어지는 성도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내가 서 있는지, 넘어졌는지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양육에 너무도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굳건히 서려면, 항상 나 자신을 바르게 양육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도 바쁘고 분주함을 핑계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살피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양육하지 않아서 영적으로 넘어지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지, 넘어져 있는지, 이는 영생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하나님 선물인 자녀를 바르게 양육함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를 바르게 세우며 살아갈지! 자기 양육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 내가 바로 서려면 철저하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당시 “영적으로 가장 원숙한 시기였던 바울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네 단어로 정의”합니다. 먼저 “비방자! 이는 모독적인 말로 주의 영광을 가렸던 과거의 악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박해자! 원어는 사냥꾼이 필사적으로 사냥감을 뒤쫓는 모습을” 말씀합니다. 과거 “바울은 기독교인을 체포하려고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처럼 살기등등한 박해자”였습니다. 폭행자는 “거만하고 무례하게! 난폭하게 타인에게 행동하고 모욕을 주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바울의 박해를 짧게 소개하지만! 분명히 거만함과 무례함, 난폭함이 극심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괴수! 이는 죄인을 서열로 정하면, 자신이 가장 앞에 있는 죄인이란 뜻”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괴수니라! 현재형 동사를 써서! 지금도 나는 죄인 중 괴수라는 고백”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가감 없이 자신의 치부와 약점을 고백하며, 풍성하신 하나님 은혜로 넘어지지 않고 설 수 있었다!” 고백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기적은 죄인인 제가 복음을 영접하고 목사가 된 것”입니다. 이는 “저만의 고백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나처럼 “강퍅하고, 고집 세고, 이기적인 영혼이 복음을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값없이 받는 은혜로, 버거운 이민자의 삶을 잘 꾸려 나가고 있음이 기적”입니다.

부족한 “나의 봉사를 통해 교회가 살아나고, 타인을 살리는 통로가 되고,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데, 믿음 때문에 영생까지 선물로 받음이 기적” 아닙니까? 이처럼 “나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 은혜를 아는 영혼은 악한 세상에서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내 부족함을 망각하고, 자기 의로움과 교만에 빠져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나만큼만 하라고 해! 나는 저 사람과 달라!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어떤 “청년이 런던의 저명한 인사 20명에게, 다음과 같은 장난 편지를” 발송했습니다. “모든 것이 들통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 놀랍게도 “바로 그날로! 20명 전원이 모두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과 죄인임을 부인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굳건히 서서 자신을 양육하는 인생은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악한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 나갑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기에! 그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한 둘도 아니고 “일곱 귀신이 들었기에,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러나 “그랬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후! “언제나 한결같이 주님과 동행하며, 심지어 골고다 십자가까지” 함께했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서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만난 후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요? 평생 “자신도 바울처럼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죄인의 괴수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기에! 마리아는 주님의 가르침으로 잘 양육 받으며 굳게 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고, 절대로 높고 교만한 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정말 “내가 잘 양육 받고 영적으로 바로 서기 원한다면,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낮아져야!” 합니다. 유학 초기, “저는, 하나님! 저를 안 쓰시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교만하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저 같은 것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바뀌었습니다. 새벽마다 “제 첫 고백은!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는 부족하니! 한 소망교회 양 떼를 잘 섬길 수 있도록 은혜로 채워 주십시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은혜가 없으면 바로 설 수 없고, 주어진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하나님 은혜가 있어야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반복하지만 “은혜는 절대로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낮아짐으로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위로부터 공급하시는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항상 겸손해서 더 크게 임하시는 은혜로 굳건히 서기” 원합니다.

 

  1. 내가 바로 서려면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 구체적으로 복음으로 나를 채워가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죄인 중의 괴수지만, 은혜를 입었다!” 고백합니다. 자격이 없지만! “주님께서 나를 능하게 하셨다. 귀한 직분을 주셨다. 긍휼히 여겨주셨다. 넘치는 은혜로 풍성히 채워 주셨다. 일체 오래 참아 주셨다. 모두에게 본이 되게 하셨다!” 간증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처럼 구체적인 은혜를 풍성히 체험한 근거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 십자가 복음을 통해 은혜받은 후! 더 굳건히 설 수”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그 삶을 채웠기에! 자신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넉넉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채웠기에! 죽음의 고비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었고, 귀한 면류관 받을 것도”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계속 은혜를 공급받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내 삶에 복음! 말씀을 채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넘어지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보다, 세속적인 것들을 더 많이 채워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 것에 더 빨리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 짧음을 알면서도! 있다가 없어질 것을 채우려고 아등바등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아이가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매일 밤 열심히 지우면서 왜 화장을 그렇게 열심히 해요! 그리고 엄마는 온갖 정성을 다해서 눈 화장을 하고서 왜 선글라스를 써요?” 이에 “엄마가 할 말을 잃고 당황하다가, 나가서 공부해!” 꾸중했답니다.

 

인간은 “그 심령에 복음이 채워져야! 모든 삶이 다 은혜임을 알고, 은혜임을 알아야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채워져야 영원한 생명, 천국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으로 내 삶을 채워서 굳건히 서려면 내 마음을 닫지 말고 열어야!” 합니다. 바울이 “나는 지금도 죄인 중 괴수다! 이는 닫힌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디모데도 “마음을 열고 모든 말씀을 받았기에, 더 굳건히 서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는 “말씀의 홍수 시대지만, 문제는 얼마나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는가?”에 있습니다. 주변에 “아무리 물이 많아도, 내가 떠서 마셔야 갈증이 해소”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데 방해되는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많은 분이 “말씀을 받아야 함을 알지만, 과거의 섭섭함 때문에, 감정이 상해서 말씀을” 거부합니다. 문제는 “변화무쌍한 감정의 변화 때문에 내가 마음을 닫으면! 나는 점점 넘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섭섭함과 감정은 모두 한결같지 않고, 상황과 처지에 따라 자주” 바뀝니다. 또한 “감정 때문에 마음을 닫으면, 그 손해는 모두 내 몫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면 주시는 말씀을 다 받을 수 있고, 그 말씀이 내 인생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처음 주를 만났을 때! 미디안의 약탈을 피해 밤에 몰래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드온은 직접 농사짓고 타작할 때! 이방인이 두려워서 눈치 보는 현실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현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항상 마음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선민이 이렇게 이방 국가에 당할 수 있어!”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비판적인 기드온을 포기하지 않고, 이적까지 보여주시며 계속”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닫은 기드온을 위해 봉헌한 제물에 불로” 임하십니다.

 

또한 “기드온의 마음을 여시려고! 이슬이 마당에만 임하고 양털은 안 젖게 하소서! 반대로 양털만 젖고 마당은 마르게 하소서! 까다로운 기도까지 다 들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기드온이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받은 후! 대적 미디안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감정이 상해도! 부족해도! 항상 내게 말씀으로 채워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닫힌 “내 마음을 여시려고 계속 말씀하고, 감동을 주시고, 위로하며 풀어주시려” 다가오십니다.

 

내가 “영적으로 바로 서려면!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복음을 속히 받을수록! 내 인생은 더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데! 감정과 상황에 휩싸여 마음을 닫을 시간이” 없습니다. 내 중심에 “하나님 말씀은 항상 옳고 내게 꼭 필요하다! 이 믿음으로 말씀을 내 삶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꿋꿋이 서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