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이스라엘과 아랍 주변국이 치른 6일 전쟁을 불가사의한 전쟁이다!” 평합니다. 불과 “6일의 단기전이었지만! 비상식적인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 군인 한 명이 수천 명 이집트군의 항복을 받고, 그들을 포로로 이끌고” 왔습니다. 당시 “포로로 잡혀 온 이집트 군인의 고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 많은 부대가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 이스라엘의 “승리 원인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전쟁 전문가는 “6일 전쟁의 승패 원인을 전쟁에서 발생한 전사자에게서” 찾았습니다. 당시 “이집트와 아랍 주변국의 전사자 대부분이 사병이었지만! 이스라엘 전사자 대부분은 장교들”이었습니다. 이는 “전쟁에서 이스라엘 장교들이 부하들과 얼마나 서로 친밀하게 합력했고, 얼마나 본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불리했던 6일 전쟁에서 승리한 핵심적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이기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국가 간 전쟁, 종교 전쟁, 이념 전쟁 등! 다양한 전쟁이 끊임없이 진행 중”입니다. 문제는 “그 어떤 전쟁도 인위적으로 이길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셔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항상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 각자가 나를 바꾸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지난주 예배에 이어 하나님과 친밀한 수직적 교제! 성도와 친밀한 수평적 교제에 관해 나누려”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망명 중이어서!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울 때, 어쩔 수 없이 블레셋 편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방백의 불신으로, 다윗은 본거지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귀환 후 보니, 아말렉의 약탈로 모든 재산과 가족까지 다 잃고” 말았습니다. 본문 6절에서 “동역자들이 다윗에게 돌을 들 정도의 위기였지만, 다윗은 이를 하나님과 수직적인 친밀함! 동역자들과 수평적 친밀함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위기 중 “하나님과 이룬 수직적 친밀한 교제가 돌아선 사람들과 수평적 친밀함을 회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을 보면! 하나님과 수직적 친밀함은 물론 주변 사람과 수평적 친밀함마저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싶지만! 안 반길 것 같아서 전화하지!” 못합니다. 찾아가서 “대화하며 기도 부탁도 하고 싶지만! 역시 실례가 될까!” 주저합니다. 이처럼 “주변에 사람은 많은 데! 마음을 열고 교제할 사람은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人)자에서! 인간은 절대로 홀로 설 수 없고, 친밀한 교제가 꼭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을 바꾸고! 세상의 표적 되는 삶!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십자가형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형 교제는 “하나님과 수직적 교제! 타인과 수평적 교제를” 뜻합니다. 나를 바꾸려면 “이처럼 십자가형의 친밀한 교제가 꼭 필요”합니다. 본문을 통해 “다윗이 어떤 친밀한 교제로 승리할 수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 교제! 수직적 친밀함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다윗과 그 추종자는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본문 5절에서 “다윗도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이 포로로 잡혀가서 망연자실” 했습니다. 게다가 “본문 6절에서! 흥분한 동역자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영혼들과 함께했지만, 큰 고통을 당하자! 다윗을 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다급했지만! “다윗은 본문 6절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고, 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갑니다.

 

힘들었지만 “다윗은 먼저 제사장을 찾았고, 하나님께 직접 간절한 기도로” 매달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쫓아가라! 잃은 것을 다 찾을 수 있다!” 응답하셨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극심한 고난 중에도 승리한 이유는 하나님과 깊은 수직적 친밀함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다윗 주변 사람들도 힘들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함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진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응답대로 순종한 영혼은 다윗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힘들었지만!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과 영적 친밀함이 더 깊어졌고, 이 수직적 친밀함이, 다윗이 승리하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현대는 “지식의 홍수, 성경 지식과 예배의 홍수 시대”입니다. 오늘날 “전화기 하나로 과거 신학자들보다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누구나 더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대로 신실해야 함을 잘 알지만! 정작 현실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살아가는 영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지만! 삶에서 말씀대로 실천함이 없기에! 많은 신앙인이 영적 비만에 빠져” 허덕입니다. 성경은 “지식을 위함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여 나를 바꾸라고 주신 하나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수직적 친밀함을 가지려면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말씀을 실천하려면 ➀ 할 수 없는 일! 어려운 일보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기에! 못 하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➁ “크고 위대한 일도 중요하지만, 작은 일부터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실제로 “작은 일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큰일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➂ “다음에!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합니다.

 

➃ “멀리 있는 것! 내가 닿을 수 없는 것보다! 가까운 것부터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부족해도! 할 수 있는 것, 작은 것, 지금부터, 가까운 것부터! 하나님 주신 말씀대로 실천할 때! 하나님과 영적 친밀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내 삶과 미래를 바꾸고! 교회와 주변을 바꿔 갈 수” 있습니다. 우체부 “슈발은 자신만의 성을 쌓고 싶었지만, 시간과 인건비, 비용이 너무도”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 혼자서라도 나만의 성을 지을 거야!” 결심했습니다. 모두가 “슈발을 미쳤다고 조롱했지만! 슈발은 그날부터 틈틈이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틈틈이 “돌을 날랐고, 쌓았고, 그렇게 33년 후, 엄청난 돌이” 쌓였습니다. 마침내 “슈발은 성을 완성한 후! 그 성을 우체부의 성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주변에서 조롱하고, 못한다고 비아냥거리고, 반대하며 막아설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 작은 것, 지금부터, 가까운 것부터 꾸준히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막 3:35 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믿었나? 직분이 무엇인가? 이보다 고난 중에 얼마나 하나님 뜻대로 살았는가! 여기에”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영혼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으십니다. 세상이 “악하고 패역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친밀한 영혼을 이기게!” 하십니다. 결국 “악한 세상에서 나를 바꾸려면! 승리하려면! 한주도 할 수 있는 것, 작은 것, 지금부터, 가까운 것부터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1. 다윗은 주변 사람과의 친밀한 영적 교제를 통하여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공간적 배경은 블레셋 시글락이고, 등장인물은 다윗과 그 동역자 600여 명”입니다. 이들은 “삼상 22:2절에서!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함이 있었지만, 다윗이 모두를” 품었습니다. 이처럼 “망명 중 동고동락했지만, 처자식을 잃자 다윗을 향한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본문 6절에서 “다윗이 급히 하나님을 찾을 정도로 모두가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은 다윗이 추종자 600명과 함께 약탈자 아말렉을 찾아 나섰다.” 말씀합니다.

 

동역자들이 “처음에는 흥분해서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계속 울고 있지 않았고, 다시 수평적 친밀함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아말렉을 추적하여! 빼앗긴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았습니다. 당시 “다윗은 홀로 아말렉을 칠 수 없었기에! 동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비록 “변덕스러웠지만! 다시 그들과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여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다윗과 동역자들이 서로를 덮어주며! 아말렉과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문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은혜를 체험한 동역자와 서로 수평적으로 친밀할 때! 그 승리가 더 커지고 분명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은혜를 주셔도! 수평적 친밀함을 잃은 공동체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수직적 친밀함을 가진 영혼이 절대로 수평적 친밀함을 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1서 4:20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 “각자가 나 자신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안다면! 반드시 믿음의 동역자와 친밀한 수평적 교제를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기에! 자기 기준으로 보면 누구도 만족스러울 수 없지만! 하나님 시각으로 보면! 누구라도 충분히 덮어줄 수” 있습니다.

 

결국 “내 삶이 바뀌지 않고, 신앙생활이 힘들어짐은 나는 이해받기 원하면서! 타인은 덮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창 9:25 절에서! 포도주에 취한 자신을 덮어주지 못한 함을 이렇게 저주”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홍수 후! “가장 큰 문제는 영적으로 해이해진 노아에게” 있었습니다. 마침내 “노아가 함을 못 덮어주었고! 함도 아버지를 덮어주지 못해서! 그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고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의 덮어주심을 체험하고도!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친밀한 교제가” 있겠어요? 같은 “교회, 같은 선교회, 같은 구역에서 함께 사역하고, 함께 자녀를 믿음으로 키우면서, 서로를 덮어주지 못하는데 무슨 승리가” 있겠어요? 제가 “애틀랜타에서 Part Time 목사로 사역할 때! 주일 오후에 한 가정의 개업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보통 “부목사가 예배 중 대표기도를 하는데! 당시 담임 목사님이 모 장로님께 대표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이에 “긴장이 풀린 제가 깜빡 졸았는데, 목사님이 갑자기 제게 축도를 시키셨던 것”입니다. 아내가 “툭 쳐서 잠이 깼고! 손을 들었는데! 축도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가까스로 “예배를 마쳤는데, 한 장로님께서 제게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잠깐 묵도하고 축도하시니! 더 은혜로웠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장로님이 왜 부족한 저를” 몰랐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저를 덮어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비록 “나와 달라도! 미숙해도! 먼저 하나님 시각으로 서로 품고 덮어주고 이해해야!” 합니다. 혹자는 “목사님이 잘 몰라서 그래요! 그럴 수 없어요! 저 사람하고는 절대로 안 돼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덮어주심으로 살았기에! 힘들어도! 주님 마음으로 나를 힘들게 했던 영혼도 덮어주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포용해야! 하나님께서 나를 바꿔 주시고, 교회를 부흥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힘들어도 “나부터 하나님 시각으로 먼저 사랑해서! 수평적 친밀함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