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5! “제가 부임한 후 어제까지 주일과 수요예배, 새벽기도회와 한 소망 만나를 통해 전한 설교를 세어보니, 약 570편이” 넘었습니다. 세상일은 “할수록 익숙해지고, 더 잘하고 나아지는데, 설교는 그렇지 않고 항상 부족해서 두려움이” 큽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한 마음은 설교만이 아니라, 부모를 향한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잘 해야지, 더 효도해야지, 생각하지만, 한다고 해도 나아지기보다 항상 부족한 마음이 더” 큽니다.

세상 “누구도 나는 효자야! 나 정도면 괜찮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인 효는 항상 부족하고, 부끄럽고, 죄송해서 고개를 떨구게”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효도가 어렵고 힘들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명령에 맞게 부모를 더 잘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이 룻을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로” 표현합니다. 이를 “직역하면, ‘며느리 룻이 일곱 아들보다 너에게 더 선을 행하였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아들 선호 사상이 강했던 유대 사회에서 일곱 아들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온전한 축복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 룻이 완전한 축복의 상징보다 더 나오미에게 효도했다!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룻은 “말씀을 힘있게 전한 사역자도 아니고, 이적과 기사를 베푼 능력의 종도 아니고, 솔로몬처럼 많은 잠언을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시모인 나오미를 최선을 다해 섬겼고,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해서 메시아의 조상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팬더믹은 다른 무엇보다, 부모님과 관계를 더욱 어렵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부모가 “가까이 계셔도 유리창에 비친 부모를 보고 눈물 흘리며 되돌아서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부모가 아프고 돌아가셔도 찾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상황이 열악하다고 효도를 멈추고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룻처럼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고 최고의 찬사를 받지 못해도, 우리가 부모를 바르게 섬길 방법을 하나님 말씀에서 배우며 실천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효는 “상황과 무관하게 절대로 놓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효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풍성히 받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어버인 주일인데 “우리가 룻이 나오미를 어떻게 섬겼는지를 살피며, 부모님을 향한 바른 태도를 배우기” 원합니다.

1. 우리가 룻처럼 부모님에게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배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이민 왔을 때를 상상해 보면,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막막함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이민 와서 가장 먼저,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룻은 힘든 중에도 정성을 다해 나오미를 섬겼고, 이로 인해 보아스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고, 오벳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특히 “본문 16절은,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말씀합니다.

당시 “룻에게 오벳은 가장 귀한 하나님 선물이었지만, 그 아들을 나오미가 키우도록 배려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으로 나오미를 섬겼던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정성을 다한다 해도, 이는 때에 따라 주관적이고 가변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실례로 “자녀는 정성을 다해도 부모가 이를 흡족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어려워서 정성을 다하지 못해도, 부모가 이를 이해하여서 흡족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해도, 자녀는 정성을 다해서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정성을 “다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의 선물에 기뻐해도, 실은 선물보다 선물에 있는 정성과 사랑을 더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성을 다하기보다 변명과 핑계가 많고, ‘이 정도면 돼! 어쩔 수 없어.’ 자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내가 부모에게 정성을 다했는지, 정확히” 압니다.

자녀가 “부모를 섬기며 물질과 시간, 존경과 사랑을 드릴 수 있지만, 문제는 ‘정성과 최선을 다했는가?'”에 있습니다. 부족해도 “자녀가 정성을 다하면 사랑과 진실이 전달되기에, 하나님께서 그 정성과 마음을 보고, 하늘의 풍성한 복을 채우실 것”입니다. 볕이 “좋은 공원에서 80대 노인과 40대 중반의 아들이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연로한 “아버지가 나무에 앉은 까마귀를 보고, ‘저게 뭐야!’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이 “까마귀요! 답하자, 아버지가 조금 후 다시 ‘저게 뭐야!’ 물었고, 아들이 ‘까마귀요!'” 답했습니다. 그렇게 “3~4번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며 ‘까마귀요! 까마귀! 몇 번을 말해야 해요!’ 버럭 화를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서, 아들이 세 살 때 있었던 일을 기록한 일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창가에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아들이 저게 뭐야 물어서 까마귀라고 답해 주었다. 그렇게 아이가 23번이나 물었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다정하게 답변해 주었다!” 우리가 “부모에게 정성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부모가 나에게 먼저 정성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부모 세대는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더 열악했지만, 그래도 자녀에게 정성을” 다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 삶이 버거워서 부모님께 정성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민자로 “먹고살기가 버겁고 힘들어도, 부모를 섬기려고 작정한 시간과 상황만큼은 항상 최선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실례로 “전화 한 통화, 용돈을 드릴 때, 부모님 말씀을 들을 때, 작은 선물을 드릴 때, 항상 최선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만, 어쩔 수 없어서 드리는 형식적인 섬김은 정성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며 어머니 마리아를 다른 형제가 아닌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당시 “마리아는 다른 아들들이 있었지만, 요한의 섬김을 받으며 요한과 평생을 함께” 했습니다. 만일 “요한이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면, 마리아도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면, 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은 초대교회의 수많은 풍랑 속에서도, 마리아가 에베소에서 사망하기까지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한의 정성과 사랑을 기쁨으로 흠향하셨고, 장수하게 하셨고, 그 사역에 수많은 열매로 응답해 주시고” 채워주셨습니다.

엡 6:1~3절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말씀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려고 부모를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부모에게 정성을 다할 때, 장수와 형통함을” 주십니다. 어버이 “주일인데, 우리가 항상 부모님께 정성을 다해서 룻처럼 복을 누리기” 원합니다.

2. 우리가 룻처럼 부모님과 은혜를 같이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3절은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말씀합니다. 특이하게 “룻이 오벳을 낳았는데, 모든 축복과 축하는 나오미가” 받았습니다. 이는 “계대 결혼 때문이었는데, 가장 가까운 친족이 자녀가 없는 가정의 미망인을 책임져서, 아이를 낳아서 대를 잇게 하였는데, 보아스도 엘리멜렉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오벳을 낳아 나오미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당시 “룻은 계대 결혼 제도를 받아들여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인 오벳을 나오미와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만일 “룻이 계대 결혼을 부인하고 오벳을 독차지하려 했다면, 룻기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효도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받은 은혜를 깊이 나누어야 더” 깊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자녀가 성장할 때에는,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이제는 자녀가 부모를 보호하는 상황으로” 바뀝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외로워지고, 대화 상대가 점점 더” 줄어갑니다. 그래도 “부모는 자녀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나눔은 더욱” 줄어갑니다. 또한 “많은 자녀가 어릴 적 받은 상처 때문에, 말이 안 통한다며 부모와 삶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삶이 줄어가기에, 관계가 더 멀어지고, 마침내 서로의 삶을 나누지 못함을 한탄하지만, 이미 때를 놓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효도는 “자녀가 부모의 아픔과 어려움을 깊이 공감하고,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며” 깊어집니다.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 했지만, 결론은 가족의 하나 됨이” 무너졌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할 때, 리브가와 야곱의 의견을 묻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도 “야곱이 받을 복에만 집중해서, 자기 생각과 계획을 남편과 장남과 나누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이 서로 삶과 복을 나누었다면, 이삭의 가정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장성한 “자녀와 연로한 부모가 서로 삶을 나누려 할 때, 생각지 않은 어려움과 갈등으로 서로 깊은 인내심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연로한 “부모가 자기만 알고, 노년의 서러움과 아픔을 모르는 자녀와 삶을 나누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도 “연로한 부모가 고집도 있고, 잘 바꾸려 하지 않고, 매번 가르치려고만 할 때, 역시 어려울 것”입니다. 마침내 “자녀와 부모 모두 힘들어져서, 서로 대화하며 삶을 나누려는 것에 지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자녀가 먼저 부모에게 다가가서, 사랑과 인내로, 받은 은혜와 삶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모와 세상 돌아가는 문제, 자녀 양육 문제를 함께 나눈다면, 부모에게 큰 동기부여가 될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받은 은혜,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일, 건강 문제, 과거의 소소한 추억까지, 부모와 나눌 것을 찾으면 얼마나” 많겠어요? 자녀와 “부모가 서로 삶을 나누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존중하며 의지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지금 부모와 삶을 나누어야 할 이유는, 지금 나누지 않으면 후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로 삶을 나누어야 부모와 자녀가 더더욱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 한 분은 한국에 계신 연로한 어머니와 매일 화상으로 성경공부를” 합니다. 어머니가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피곤한 일과를 끝내고, 일부러 한국시각에 맞추어 같이 성경을 읽고 받은 은혜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파킨슨과 치매로 고생하다가, 지난 목요일에 요양원에” 들어가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을 잘 몰라봐도 그래도 저는 잘 알아보시는데, 통화 중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가 잘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더 대화하고 삶을 나누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서, 통화 때마다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말씀드려도 죄송한 마음이 참으로” 큽니다. 효도는 “무엇을 드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삶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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