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스윈돌은 “그의 책 ‘성령의 품에 안겨라!’에서 성령이 임재하면 우리 삶에 나타나는 변화를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임재하면, 내 심령이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잘 받는다. 내 심령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솟아오른다. 내 심령에 항상 감사와 만족이 찾아온다. 내 심령이 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해진다.” 찰스 스윈돌의 “도전은, 과연 내가 성령께서 임재하신 삶을 살아가는가? 나는 과연 신실한 기독교인인가? 자기 점검을 하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옳고 틀림없다고 동의하며 인정한다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몇 대째 믿는 모태신앙이고, 직분이 있고, 주의 일을 많이 했다고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기독교인은 성령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갑니다. 오늘의 “문제는 무늬만 기독교인일 뿐, 진정으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령과 동행하는 기독교인이 점점 줄어감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더 큰 능력으로 많은 일을 하실 것으로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행전 1:4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말씀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더는 분쟁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확신하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채, 온전히 기도에 집중하며 성령의 임재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고, 성령을 체험한 제자를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졌습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로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성령 강림 주일의 “목적은 성령에 관해 아는 것보다 성령의 임재를 깊이 체험해야 함에”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이 땅에서 연약한 나를 보호하고, 내 눈물과 상처를 씻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공 지향적인 세상은 매사에 우리를 무한 경쟁으로 몰아가지만, 찬송가 438장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부족해도 “성령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면 적어도 우리가 세속적 삶에 함몰되지 않고,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며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가장 절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지!” 살펴봅시다.

1. 나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려면, 세상과 떨어져서 하나님과 독대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 절기는 유월절이고, 성령님은 오순절에” 임했습니다. 시간상! “50일의 차이가 있는데, 주님께서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동역하셨기에, 제자들은 오순절이 되기까지 약 10일간 기도에 전념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특별히 “행전 1:14절은, 이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말씀합니다. 만일 “120명 성도가 열흘간 낮에는 일하고 밤에만 모여 기도했다면, ‘오로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120명은 모두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뒤로하고, 세상과 떨어져서 기도와 말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그렇게 “세상과 떨어져 하나님과 독대하며 영적으로 집중하였기에,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밤낮 안 가리고, 2~3가지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심지어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교회에 올 생각도 못 하고, 말씀 묵상과 기도를 잃어가고, 봉사할 마음은 엄두도 못 내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매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내며 열심히 살아가지만,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공급과 충전 없이 다 쓰기만 하는데, 어떻게 우리 삶이 이전보다 더 나을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수록, 바쁘고 분주할수록, 세상과 조금 떨어져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하늘의 능력과 지혜를 새롭게 공급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힘들어도, 성령의 임재로 공급받는 은혜가 더 크면, 우리 삶이 더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학은 “엥겔 지수로 가정과 사회, 국가의 생활 수준을 가늠”합니다. 엥겔 지수는 “전체 생계비 지출 총액에서 음식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뜻하는데, 후진국은 엥겔 지수가 높지만 선진국은” 낮습니다. 문제는 “영적 엥겔 지수도 똑같은데, 하루에 나를 위해 쓰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을수록, 그 사람은 경건함에서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과 떨어져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그 신앙이 더 경건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나를 위해 쓰는 시간과 세상과 떨어져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의 비율이” 어떠세요?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많다면 내 삶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세상과 떨어져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많다면, 나는 성령님과 함께하는 기독교인 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과 번영, 잘 먹고 잘살려고 아등바등”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어려워도 “작정해서, 세상과 떨어져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나만의 시간과 장소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새롭게 채워주는 성령의 은혜와 위로를 깊이 체험한다면, 우리 삶은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막 1:35절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기도하시다. 이는 미 완료 과거형 동사로” 쓰였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꾸준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때, 먹고 잠자는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하루하루 많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매번 “유대인과 논쟁했고, 말씀을 전했고, 병자를 치유했고, 필요하면 초자연적인 이적을 베푸시면서, 실족하고 넘어진 주의 백성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상과 떨어져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매일 세상과 떨어져서 하나님과 독대하며 은혜를 공급받았다면,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더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 번뿐인 “우리 인생이 이전보다 더 큰 은혜로 채워지기 원한다면, 성령의 임재하심이 꼭 필요”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연약한 내 인생길에서, 열어주고 막아주는 은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성령의 임재를 날마다 체험하며,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영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받고 누려야 할 필수 은혜”입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반드시 하루에 시간을 정해서 세상과 잠깐 떨어져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마침내 “나도 성령의 깊은 임재하심을 체험해서, 힘든 이민자의 삶이 더 풍성하고 복될 수 있기” 원합니다.

2. 나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려면, 내 자아와 생각을 비우고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본문 4절은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일부가 아닌 120명 모두가 성령 세례를 체험했다!” 증언합니다. 당시 “성경은 120명 성도가 오로지 기도에 전념했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분명한 것은 “120명 성도가, 성공을 위해서, 돈 많이 벌려고, 자녀가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고, 무병장수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전 2:38절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말씀합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보면, 120명 성도는 모두 죄를 고백하며, 자신을 비우는 회개가 가장 먼저” 있었습니다. 당시 “120명은 오로지 기도에 전념하되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자신을 비웠을 것이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간절함과 갈급함으로 구하며 성령의 임재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은혜는 내 안에 내 자아와 세상의 악함과 죄가 가득하면 절대로 임하지 않고, 임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를 비우지 않고 기도하기에, 은혜를 받아도 금방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문제는 “성령의 인도함보다, 여전히 내 생각과 아집, 세상 상식이 내 삶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처럼 내 삶에 채워진 것을 살펴서, 나를 인도하는 주관자를 바꾸는 것이고, 바꾸어야 비로소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큰 은혜를 사모한다면, 더 간절하고 온전하게 내 죄를 고백하고 내려놓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머리로는 회개를 알지만, 실제 삶을 보면, 하나님과 무관한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러면서도 내가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중세의 “유명한 성직자 줄리어스가 천사가 찾아와서 함께 대화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줄리어스는 “꿈에서 천사에게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열정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천사고 나는 사람이지만, 주님을 향한 열정은 제가 천사에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줄리어스의 마음에 있는 열정을 측정하고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당신의 열정이 참 크군요! 그런데 당신 열정의 40%는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고, 40%는 명예에 대한 열정이고, 15%는 기타 잡다한 열정이고, 주님을 향한 열정은 5%뿐이군요!” 줄리어스는 “꿈에서 깬 후, 자신의 신앙과 열정을 살피며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회개로 내 것을 비우는 것을 손해 보고, 망하고, 다 잃어버린다!” 착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철저히 비울수록, 채워지는 은혜가 훨씬 더” 큽니다. 마음에 “생각나는 과거의 죄악이 있다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과거에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죄라고 생각된다면, 역시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언행과 선택이 있다면, 이것도 역시 진심으로 회개하며 내 속사람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게 “철저하고 온전하게 비울수록, 나도 하나님 채우시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난 후, 재산 절반을 내놓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 고백했습니다. 과거 “여리고 세리장일 때, 삭개오는 토색하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빼앗고 더 괴롭힐수록 얻는 것이 더 많아져서, 더 기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과거의 악행을 깨닫고, 주님 앞에 서서 진심으로 회개했고, 주님은 회개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전과 후, 삭개오는 언제가 더 행복”했을까요?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못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회개하지 않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고, 회개하는 영혼을 심판할 수 없다.” 말했습니다.

회개하면 “성령이 임해서 영생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바로 나에게 있는데, 진심으로 회개하려면, 세상과 떨어져서 하나님과 독대하며 틀렸고 악했던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 일들을 기록해” 봅시다. 이처럼 “철저하게 회개할수록, 부족한 나도 성령의 임재를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주도 “기억나는 죄를 다 내려놓고 회개해서, 나도 성령의 임재하심을 깊이 체험하여, 승리할 수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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