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1950-06-25부터 1953-07-27까지, 3년 1개월 2일간 북한이 남한을 남침하여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로 인해 “남북한 군인 사상자 140만, 유엔군과 중공군 사상자 100만, 남북한 국민 180만, 합하여 무려 420만이 전쟁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쟁으로 “남한의 40%, 북한의 60% 산업 시설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6.25는 근대에 핵을 사용하지 않은 전쟁 중, 엄청난 피해를 남긴 아픈 과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70년 전 “6.25는 너무도 아픈 과거의 상처이기에, 어쩌면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분 중에도,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분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전쟁과 아픔, 비극과 재앙이 있었다. 아팠다. 힘들었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는 항상 반복된다!”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70년 전 6.25! 아픈 과거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그 아픔은 오늘과 미래에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레몬서의 “주인공은 바울, 골로새 교회의 리더 빌레몬,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입니다. 빌레몬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해준 영적 은인이었지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는 심판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고, 바울은 오네시모를 더는 종이 아닌 동역자로 받아달라! 빌레몬에게 간곡히” 청했습니다. 당시 “오네시모에게 도망친 노예로 쫓기며 살아온 삶은 분명히 아픈 과거”였습니다.
빌레몬에게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 역시 참으로 아픈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여서 초대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빌레몬도 “과거의 원한과 악감정을 이겨내고, 오네시모와 함께 초대교회를 힘있게” 섬겼습니다. 올해 “70주년인 6.25는 비극적이고 아픈 과거이지만, 한국은 6.25의 참화를 잘 극복하고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아픈 과거 6.25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은 결과”입니다.
현재 “코로나-19가 주는 시련과 아픔이 참으로 참담하지만, 우리가 지금의 아픔을 통해서 받을 도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한 상처와 시련만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제는 “아픈 과거의 상처는 역사와 사회 곳곳은 물론, 하나님의 교회와 우리 개개인의 삶에도 참으로”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 중에도 여전히 아픈 과거 때문에 힘들고 눈물 흘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아픈 과거가 있다는 것보다, 아픈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우며 살아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아픈 “과거를 향한 해석과 태도에 따라서, 더 나은 미래가 열릴 수도 있고, 아픈 과거가 반복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6.25 “70주년을 맞으며, 아픈 과거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아픈 과거를 극복하려면, 과거 믿음의 선조가 남긴 교훈을 깊이 새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노예는 말하는 짐승으로, 인격은 고사하고, 단지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도망친 노예를 붙잡으면 현장에서 죽이거나, 가혹하게 심판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스승이 도망친 노예를 종이 아닌 동역자로 받아달라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당시 “빌레몬은 충분히 바울의 제안을 거부하고 외면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사회적 상식을 깨고, 도망친 노예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주변의 반대가 컸을 것이고, 나아가서 집안의 다른 노예가 오네시모처럼 도망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바울의 요청대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동역자로” 받아들입니다. 이유는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 세상 상식보다 영적 스승 바울이 전해준 복음과 가르침, 도전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6.25는 “참으로 아픈 과거이지만, 이를 통해 수많은 교훈과 도전이 오늘까지 남아” 있습니다.
6.25 전쟁은 “그 참혹한 고난 중에 피어난 젊고 순수한 학도병의 숭고한 애국심, 이름도 빛도 없는 많은 사람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음을” 도전합니다. 전쟁의 “폐허로부터 일어나기 위해 근검절약하며 살아온 희생과 수고도 큰 도전”입니다. 또한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기 위한 기독교인의 헌신과 기도도 참으로” 컸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처럼 아픈 과거를 이기고자 노력한 모두의 엄청난 수고와 헌신, 교훈과 도전이 오늘을 풍요롭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요로운 현재를 가능하게 한 과거의 교훈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픈 과거를 대하는 태도는 절대로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픈 “과거에서 배우고 도전받는 태도와 상처로만 여기는 태도가 남기는 열매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아픈 “과거를 이기고 성장하려면, 우리 시각이 항상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부정적 시각이 아픈 과거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과 도전을 막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가 악해서가 아니라, 나의 비판적이고 부정적 성향이 아픈 과거를 악하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매사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과거가 주는 교훈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968년 어느 날!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3개월 된 아이를 한국의 할머니에게 맡겨야 했고,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서 4살까지 할머니 품 안에서” 자랐습니다.
다행히 “아이가 5살에 부모와 함께 시카고로 이주했지만, 아이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부모 때문에 늘 혼자였고, 때로 무서워서 울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았던 다짐이” 있었습니다. “이민자인 우리 부모가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는데, 나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부모의 고생과 외로움,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소년이 훗날, 한인 역사상 세 번째로 미국 연방 종신 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픈 과거를 긍정해야 현재를 긍정할 수 있고, 미래를 긍정으로 열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픈 과거를 부정하면 현재도 부정되고, 다음 세대가 나를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부정은 은혜의 통로를 막고, 매사에 백해무익”입니다. 반면에 “긍정은 힘이 있고, 모두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형을 속여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개인 이름으로 국호로 삼은 나라가 없는데, 그만큼 야곱을 향한 하나님 사랑이 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정보다 긍정과 사랑으로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도 긍정과 사랑으로 봐 주셔서” 살리셨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죄인인 나를 긍정하고 사랑하셔서 영생까지” 주셨습니다. 비록 “내 삶에 아픈 과거가 있지만, 이처럼 엄청난 사랑을 받았기에, 아픈 과거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은 절대로 지혜로운 모습이” 아닙니다. 힘들어도 “아픈 과거에 채우신 하나님 사랑, 이끌어 주심, 막아주시고 열어주신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6.25 70주년을 맞으며, 긍정으로 우리 삶과 역사의 아픈 과거가 주는 도전을 배우며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아픈 과거를 극복하려면 서로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빌레몬서 “어디에도, 빌레몬이 바울의 제안대로 오네시모를 받아들였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만일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거부했다면, 빌레몬서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빌레몬은 아픈 과거를 극복하고, 하나님 마음, 하나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당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났을 때, 경계심이 극에 달해서, 어쩌면 짐승처럼 거칠고, 그 언행은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을 정도로 공격적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난 후, 하루아침에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의 헌신적이고 끊임없는 사랑이 오네시모의 닫힌 마음을 열어갔을 것”입니다. 6.25 “70주년을 맞으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더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군비확충으로, 군사적 우위로 또 다른 전쟁을 막을 수” 없습니다. 힘의 “논리는 또 다른 힘의 논리를 유발하여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적 사상과 상식이 아닌 하나님 방법, 십자가의 고귀한 사랑만이 과거의 아픔을 이길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레몬이 “하나님 사랑으로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받았습니다. 바울도 “하나님 사랑으로 비참했던 오네시모를” 살렸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이 비참했던 오네시모를 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철학과 상식이 아닌 하나님 사랑이 얽히고설킨 세 사람의 아픈 과거를 아름답게 풀었던 것”입니다.
과거가 “아플수록, 내가 먼저 십자가 사랑을 품어야 얽히고설킨 과거의 아픈 매듭을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인력이 아닌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만 아픈 과거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십자가 사랑이 없다면, 죄인인 인간은 아픈 과거로 인해 더 괴로워하고, 상처와 시련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쿠바의 “언론인 카를로스 온타네르가 ‘완벽한 라틴 아메리카가 바보가 되는 지침’ 다소 과격한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온타네르는 “책에서, 왜 남미 국가들이 가난과 무지의 땅이 되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실패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지 않고 외부 상황에서 찾아서! 실패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남에게 찾아서, 오늘의 허물을 어제의 탓으로 돌려서, 자유로운 경쟁을 죄악시해서, 권력욕에만 눈이 먼 부패한 정치인을 세워서, 국민이 그렇게 탐욕스러운 정치인에게 속아서!” 문제는 “온타네로의 이 지적들이 절대로 남미 국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현재 “미국은 물론 한국도 온타네르의 지적을 깊이 새기며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미국은 코로나-19로 아파하는 국민을 위로하지 못하고, 국민적 통합도 점점 잃어가고, 즉흥적인 생각으로 자기 이익만 챙기는 위정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문제는 “국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도” 똑같습니다. 우리 교회도 “아픈 과거가 있기에, 교회가 아픈 과거를 이기고 교회답게 서려면, 바로 나부터 하나님 사랑을 깊이 체험하여 서로를 품어야!” 합니다.
성도 중 “한 분이 카톡에서 ‘남 말 말고 나나 잘하자!’ 글을 보고 진짜 맞는 말이다!” 생각했습니다. 부족해도 “나부터 남의 탓 하지 말고, 십자가 사랑으로 예수 잘 믿으면 우리 교회는 아픈 과거를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판 가룟 유다에게 다른 제자와 똑같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발도 다른 제자와 똑같이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에게 당신의 살과 피도 똑같이” 주셨습니다.
문제는 “유다가 이처럼 고귀한 주님의 사랑을 몰라서 아픈 과거에 빠져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만일 “나도 주님께 받은 고귀한 사랑을 모르고, 사랑과 용서 없이 이 땅을 산다면, 나는 또 다른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랑으로 살아가는지, 여부는 나와 교회, 가정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이 말씀을 들으며, 나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은 사람이 생각난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과거에 “서로 사랑하지 못해서 아팠던 경험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내가 먼저 다가가서, 넘어진 영혼을 사랑으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가까운 지인에게 먼저 하나님 사랑으로 다가가고, 받아줄 때, 아픈 과거를 이길 수” 있습니다. 6.25를 기억하며 “한주도 하나님 사랑을 가지고 아픈 과거를 넉넉히 이겨나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