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동물학자의 공통된 주장이” 있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는 개미는 개별생활을 하는 말벌이나 바퀴벌레보다 몇 배나 더 오래 산다. 그리고 정글북의 모글리처럼 동물이 키운 아이는 치료과정에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치료에 성공해도 5살 이상의 지능을 가질 수 없다!” 죄인인 “인간이 성숙한 인격이 되기까지, 여러 사람과 함께 함이 꼭 필요”합니다. 연약한 “인간은 이처럼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정말 사람답게! 기독교인답게 살려면, 누구보다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아가는 쉬르 하쉬림! 노래 중의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불립니다. 아가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다룬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게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먼저 다가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 일어나 함께 가자!” 청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소망교회 담임목사로 결정되면서, 이 말씀을 올해 주제로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떤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본문을 처음” 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넘어져 있던 제게, 먼저 다가오셔서! 사랑하는 자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좌절로 넘어져 있지 말고 일어나라! 이제 함께 가자! 격려해” 주셨습니다.

과거 “우리 교회도 서로 사랑을 잃고, 일어나지 못해서, 주저앉아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또한 “함께 해야 할 일이 있고, 함께 이루어가야 할 비전이 있었지만, 함께 하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년 주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여! 일어나 함께 가자!”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자! 하신 곳이라면, 그곳이 가장 온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자고 하셨다면! 이미 복과 은혜를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 되어 하나님께서 함께 가자는 곳으로 가는 순종이 남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4주 동안, 한소망 교회 여러 부서와 예배로, 섬김으로, 말씀 공부로, 기도로, 선교로, 사랑과 배려로, 이제 소명과 은혜로 함께 가자!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2020년! “한소망교회 성도 모두가 함께하고, 하나님과 함께할 때! 예비하신 부흥과 성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서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갈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함께 가려면, 먼저 다가가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여기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솔로몬이고, 내게! 이는 술람미 여인을” 지칭합니다. 당시 “정확한 사연은 모르지만, 솔로몬은 타지에 출타했다가” 돌아왔습니다. 당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를 향한 사랑이 많이 식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돌아오자마자, 사랑의 감정이 약해진 술람미 여인에게 먼저 다가갔던 것”입니다.

당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찾은 이유는 단순한 구애가 아니라 청혼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이 먼저 다가갔기에! 둘의 동행과 사랑은 더 굳건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한 곳을 향해 함께 가려면! 당연히 그 관계가 원만해야!” 합니다. 문제는 “동행을 위해 양쪽이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가까이 다가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이 먼저 다가오기까지, 술람미 여인은 애타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가려면, 하나님과 함께 가려면,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원만한 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고, 내가 먼저 다가가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주님께서 죄인인 내게 먼저 사랑으로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요 15:16절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주님의 먼저 다가오심으로 살았고 구원받았기에, 나도 타인에게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가 함께 가기 위해,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 “용기 내서 사랑으로 먼저 다가오면, 내가 이를 거부하지 말고 받아야!” 합니다. 소원한 “관계에서, 함께하자고 먼저 손 내미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렵게 용기 내서 내민 손을 거절하고 외면하면, 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손 내미는 사랑과 내민 손을 받아줌이 있어야! 함께 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같은 자리에 있는 동석과, 같은 곳으로 함께 가는 동역은 심히 다른 개념”입니다.

어떤 “남성이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갔는데,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습니다. 남성이 “얼른 엉덩이를 내렸는데, 간호사가, 팔 걷으세요!” 말했대요! 함께함은 “한쪽만의 생각이 아니라 양쪽 모두의 생각이, 하나 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같은 자리에 있는 동석은 있지만, 함께 가는 동역이 없음에” 있습니다.

많은 분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지만, 서로 교제 없이 예배만 드리고” 헤어집니다. 동역보다 “주일에 안 나오면 께름칙하고, 불편해서 나올 뿐, 다른 성도와의 교제를 어려워!” 합니다. 그래서 “정작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막상 도움을 청할 사람이 주변에 없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달라도! 함께하면,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면, 내 삶과 미래가 달라지고, 하나님의 교회도 새롭게 되고,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선교사역을 계획할 때! 마가의 동행 문제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마가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요? 실제로 “마가가 자신을 거부한 바울에게 미안한 동시에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딤후 4:11절에서, 네가 올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한때, 바울과 마가의 관계는 깨졌고, 서로 껄끄러워서 한동안 안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명이 먼저 다가갔고, 다른 한 명이 그 손을 외면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마침내 “바울과 마가는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 함께 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함께 가려면 “먼저 다가가는 사랑은 물론, 다가오는 사랑을 받아주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보다 “내가 먼저 마음을 풀고 열어야 하고, 먼저 다가가고, 다가오는 영혼을 받아줄 때! 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2020년 “한소망교회 성도 각자가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고, 그 사랑을 기쁨으로 받아주는 성숙함으로 함께 나아가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함께 가려면, 영적으로 일어나서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함께 가자! 이 말 직전에, 일어나서! 일어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일어나서 “원어 쿠마! 바로 앞에 라크, ‘너는’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일어나되, 다른 누구보다 술람미 여인, 바로 네가 일어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함께 가자! 울레키 라크! 여기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지목했습니다. 솔로몬은 “출타에서 돌아온 후, 구체적으로 술람미 여인, 바로 당신이 일어나서 나와 함께 가자! 재촉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오랜 기간 떨어져서 낙담 중이던 술람미 여인이 일어나기” 원했습니다. 실제로 “술람미 여인이 낙담에서 일어나야! 솔로몬이 원하는 곳으로 함께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일어나서 쿠마! 이는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것을 뜻하지만, 영적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강조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영적인 낙담과 좌절에 빠져 있으면서, 타인과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 일에 함께하지 못함은, 하나님 일이 악하고 무가치해서, 무의미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받은 상처와 시험이, 내가 받고 누린 은혜보다 더 크기에 주저앉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저앉아 있으면 은혜를 못 누리고, 계속 웅크리고 있으면 시간만 낭비하고, 마침내 나와 하나님 모두 아프고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저앉아 있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하고 한탄할 수밖에 없기에, 영적으로 일어나서 굳건히 서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일어나려면,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말을 잘 들은 이후! 다시 일어나서 솔로몬과 함께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사모함으로 잘 들어야 영적으로 일어서서 주님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말씀이 “넘어진 나를 일으켜 위로하고,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습니다. 사모함으로 “내 이야기로 말씀을 들으면, 상처와 시험보다 말씀의 은혜가 더” 커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바르게 듣지 않으면, 여전히 영적으로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기에! 이제부터 내게 주시는 말씀을 잘 듣고 새기며, 바르게 적용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예배 중, 눈은 목사를 보지만, 말씀을 잘 안 듣고, 그래서 새기지 못하고 적용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두 귀로 듣고, 입으로 다 쏟아버리고, 남성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냄이 큰 문제”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성령님께서 항상 부족한 내게 말씀으로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시며” 다가오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일으켜 세운 것은 주님께서 풀어서 들려주신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10여 년 “칩거하며 은둔했던 바울을 주저앉지 않게 한 것도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낙담과 좌절로 고국으로 돌아온 선민을 깨운 것도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이 “임하는 곳은 언제나 회복과 치유, 살아남의 역사가” 넘쳤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상처받고 넘어진 나를 깨울 유일한 도구는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헨델은 “저명한 음악인으로서 40여 년이 넘게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헨델이 이탈리아에서 계속 실패해서, 마침내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건강까지 나빠졌을 때! 찰스 기븐이 찾아와 헨델을 위로하며 이사야서를” 건넸습니다. 헨델은 “성경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지인의 정성을 생각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읽은 성경에서 주님을 만났고, 큰 감동과 도전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그 유명한 메시아를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헨델은 다시 유명해졌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실명까지 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굳건히 설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은 “출생으로 시작되지만,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만남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됩니다. 문제는 “말씀과 만나지 못했기에, 여전히 주저앉아서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직분자만 부르지 않으시고,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족한 내게도 함께 하자!” 부르십니다. 2020년 “다른 무엇보다 여러분에게 말씀이 들려서 영적으로 일어나 굳건히 서기” 원합니다. 말씀이 “내 삶의 문제와 질병, 상처와 시험을 이기게 하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힘들고 어려움 중에도, 기쁨과 감사 중에도 더 말씀 앞에” 섭시다. 그래서 “올해도 하나님 주신 비전을 향해 힘있게 함께 나아갈 수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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