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버러 노블은 “감사의 힘이란 책에서! 사람이 감사의 마음을 품기까지 0.3초가 걸린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불과 0.3초 만에 감사함이 뇌에 전달되면서 우리 몸에 다양한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물질이 분비되어서, 하루에 단 두 번만 감사 인사를 해도 면역력이 눈에 띄게 강화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감사할 때와 웃을 때, 엔도르핀이 가장 많이 생성되고, 근육이 이완되어 체온이 올라가서, 감기도 예방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와 민족이 ‘엄마, 아빠’ 다음으로 감사의 말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처럼 “감사에는 능력이 있고, 우리의 전인격적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이처럼 놀라운 감사의 능력을 체험하는 영혼보다, 그렇지 못한 영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삶이 “각박해서! 감사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감사보다 “어렵고 힘든 일에 마음과 삶을 빼앗겨 아파하고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능력을 체험한 영혼은 이 땅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포로기에 기록된 저자 미상의 시편이지만, 전형적인 감사 시편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모든 구절마다 감사하라! 호두는 감사하다! 찬양하다!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감사하라, 대신에 찬양하라! 고백해도 의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동시에 “감사하라! 이를 복수 명령형 동사를 써서, 공동체 모두를 향한 도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은 모든 절기마다 이 시편을 찬양하며, 하나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감사의 능력이 쌓여서, 마침내 성경에까지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로, 감사에 관해 가장 깊이 묵상하는 주일”입니다. 문제는 “입술로 드리는 감사는 너무 많지만, 감사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함이 더 중요한 도전”입니다.
사람이 “이 땅을 살며 다양한 감사 조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의 능력은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온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능력을 체험하면 내 삶과 인간관계, 삶의 자세와 태도가 바뀌고, 나아가서 감사가 확장되어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됩니다.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는 인간이 범하는 가장 큰 죄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다. 지옥은 배은망덕한 무리로 가득 차 있다!”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할 필수”입니다. 감사가 “이 땅의 행복은 물론 천국까지! 영생까지 이끌어가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의 능력을 바로 알고, 이를 누리는 방법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감사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할지!” 살펴봅시다.
1. 감사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감사하는 삶이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구절마다 이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인자하심! “하스또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뜻합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에서! 다양한 주제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를 감사로” 고백합니다. 실례로 “창조와 출애굽 사건, 가나안 정복 전쟁, 구원에 관한 감사 등이” 이어집니다. 모든 “구절마다 과거와 현재, 모든 삶의 현장과 역사적 사건을 통해 감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반복되는 감사가 후대로 이어지면서, 감사의 능력이 더” 깊어졌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세상이 주는 혜택과 첨단 과학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끊임없이 주시는 하나님 은혜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경우! 우리가 구하지 않는 은혜까지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은혜로 살면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너무도 단편적”입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과 고난을 전부로 알고, 그 속에 함몰되어 판단력을” 상실합니다. 당연히 “삶의 태도와 입술의 고백이 감사보다 원망과 불평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감사와 불평, 둘 다 삶의 습관이고, 하루아침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며 생기는 영적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삶에서 감사를 상실하면, 그 피해는 내가 가장 크게” 받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영적으로 살아나려면! 나부터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의 능력을 누리려면!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는 감사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부족해도! “감사가 이어지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감사가 “이어지면, 내 신앙이 굳건해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감사가 “이어지면, 못 보던 것을 보고, 못 듣던 것을 듣고, 새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든 이민 생활을 해도! 항상 삶의 모든 순간마다,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참으로 많음을 이렇게 글로” 썼습니다. “10대 자녀가 반항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있다는 것이다. 내야 할 세금이 있다면, 지금 내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다. 파티 후! 치워야 할 것이 많으면, 친구들과 즐겁게 지냈다는 증거이다.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내가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깎아야 할 잔디가 있고,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한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증거이다.”
“주차장 맨 끝에 차를 세웠다면, 내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이고, 내가 차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겨울에 난방비가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아간다는 증거이다. 교회에서 뒤에 있는 사람의 엉터리 성가가 영 거슬리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증거이다.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계수해 보면 “우리 삶에는 원망과 불평보다 감사의 조건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문제는 “원망과 상처, 좌절과 낙담에 빠져 살아가기에, 감사가 끊어지고, 감사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를 찾고 또 찾으면, 감사는 무궁무진하고, 계속 이어지고 또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뉴저지에 와서, 운전 중 Dead End에 들어서서 헤매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Dead End는 “길이 막혀서, 밖으로 나가는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실수로 “Dead End 길에서 헤매면 시간 낭비가 크고,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계속 이어질 수” 없습니다. 문제는 “감사가 내 삶에서 Dead End가 된다면, 이는 참으로 큰 비극”입니다. 삶에서 “감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새로운 감사가 이어져야!” 합니다. 내가 “체험한 감사가 우리 자녀에게 이어져서 Dead End! 끊어진 감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민 생활이 “힘들수록! 나부터 감사의 징검다리가 되어 계속 감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마 1장에서, 주님의 족보를 만나는 데! 놀랍게도 은혜의 체인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많은 사람 중! 한 대라도 은혜가 끊어졌다면, 성경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수록! 감사의 조건을 더 찾고 계수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찾고 계수할수록! 감사의 능력이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찾고, 이를 계속 이어가며, 감사의 능력을 누리기” 원합니다.
2. 감사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절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26절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을 다양한 내용으로 표현”합니다. “신 중에 뛰어난 신, 주들 중에 뛰어난 주,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주! 등등”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받은 은혜와 감사를 고백”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다양하게 표현함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깊이 계수하며 살았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만 묵상하지 않고, 감사의 내용을 직접 표현하며 본 시편을 썼던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를 일일이 표현해서! 후손에게 선민을 향한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더 깊이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롬 10:10 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말씀합니다. 구원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받을 수 있듯이, 감사도 받은 은혜를 표현해야 더 온전하고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감사하다는 말보다 왜 감사해야 하는지,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 감사의 깊이를 내가 직접 표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감사하다 원어는 ‘찬양하다!’와 같은 뜻도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찬양은 “마음으로, 속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밖으로, 큰 소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매 주일 “한소망 교회 찬양대의 찬양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탁월하고 멋진 찬양대가, 속으로, 입술로만 찬양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 “은혜를 체험한 인간은 누구도 침묵하며, 조용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언약궤가 들어올 때! 힘을 다하여, 속살이 보일 정도로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문제는 “미갈이 이를 보고, 수치스럽고 창피하게 여겨서, 다윗을” 책망했습니다. 당시 “미갈도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뻤을 것이고, 나름대로 은혜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을 같이 보았지만! 하나님 은혜를 온몸으로 표현한 다윗과 이를 억누른 미갈의 운명이 같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감사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감사를 내 입술과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표현을 통해 “내 감사가 더 깊어지고, 구체화 되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지인 세 분과 함께 플로리다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각자 “아내가 교회까지 Ride 해준 후, 한 차로 움직여서, 다시 아내들이 교회로 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몇 시에 도착한다! 각자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한 분은 “접니다. 몇 시에 도착합니다. 부탁합니다. 깍듯한 높임말을” 썼습니다. 저는 “나 몇 시에 도착하니, 와 줘요! 부탁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자기야! 몇 시에 가니까, 알지? 사랑해! 말해서, 눈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분은 내다! 알제? 말하고 전화를 뚝 끊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경상도 남성들이 심히 무뚝뚝해서, 직장에서 귀가 후 몇 마디 안 한다고” 합니다. “별일 없지? 아는? 밥 줘! 자자!”
부부가 “모두 사랑해서 가정을 이루었지만, 사랑을 표현하는지! 여부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부관계는 물론, 관계에서도, 은혜를 입었다면 감사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짧은 “감사 표현이 서먹한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찬양도 “주님께 받은 은혜를 마음으로만 고백하지 말고, 큰 소리로 찬양 드려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한 옥타브 낮추어서 찬양할 수” 없습니다.
미국인이 “서로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같은 은혜! 아니, 더 큰 은혜를 받기에,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표현해야 “내 고백이 되고, 표현해야 확정되고, 표현해야 더 많은 감사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사랑해! 감사해! 표현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삶과 가정, 교회에 감사의 능력이 더 충만해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