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설명하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이 분은 “미국 초기의 정치가, 외교관, 과학자, 저술가, 언론인, 또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미국 독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이 분은 “피뢰침, 다초점 렌즈를 만든 발명가로도” 유명합니다. 답은 “벤저민 프랭클린인데, 그래도 모른다면, 이렇게 설명해 드리면” 어떨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100불짜리 지폐에 나오는 분이라고 하면, 아! 그 사람! 많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무엇인가를 많이 보고 듣고, 쓰면 익숙해져서, 그것을 잘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익숙하지만, 그것의 참 의미와 깊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참 많이 들어서 익숙하고 잘 아는 단어”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셨는지, 어떻게 우리 삶에서 임마누엘 하시는지, 그 구체적 의미는 잘” 모릅니다. 동시에 “예수!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사람이란 뜻”입니다. 역시 “내가 용서받은 죄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왜 내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셨는지,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2019년 성탄을 의미 있게 보내려면, 먼저 임마누엘과 예수! 이 단어가 익숙함을 넘어 바른 의미를 깨닫고, 내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서로 사랑하여 정혼했는데,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아이를 잉태” 했습니다. 요셉에게 “이 일은 상식에도 안 맞고, 성령을 통한 잉태가 너무도 생소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메시아가 오심을 많이 들었지만, 그 메시아가 막상 자신의 몸을 통해 오심을 듣고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러나 “첫 성탄은 메시아가 온다는 익숙함을 넘어 요셉과 마리아에게 임마누엘과 예수, 두 단어가 깨달아지고 자신의 고백이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익숙함은 “편하지만, 익숙함에 빠져서 긴장감을 잃으면, 참 의미를 놓치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익숙함과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분명히 다르고, 이는 성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성탄의 은혜는 주님께서 오셨다는 익숙한 사실을 넘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와 가치, 도전과 교훈을 바르게 파악함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임마누엘과 예수! 이 의미를 살피며 성탄의 참뜻을 살피기” 원합니다.
1.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공감적 이해자로 나와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감적 이해는 “심리학 용어로, 같은 입장에서 그 아픔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들레헴의 말구유, 가장 낮은 곳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때,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영혼처럼 이 땅의 삶을” 다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가장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셨기에, 이 땅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영혼, 가난하고 어려운 영혼의 삶을 공감적 이해자로 가장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왕의 왕,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을 가진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세상 모든 권력자와 통치자, 부자의 처지도 공감적 이해자로 너무 잘” 아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아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인간을 가장 깊게 공감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공감적 이해자로 이 땅에 오셨기에, 나부터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주께서 모두를 위한 공감적 이해자로 오셨기에, 나도 요셉처럼 마음을 넓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와 무관함을 알았기에!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듣고, 조용히 정혼을 파하려” 했습니다.
어쩌면 “당시 요셉은 배신감으로 힘들 수 있었지만, 마음을 넓혀 마리아를 정죄하지 않고 이해”했습니다. 힘들었지만 “성령의 음성을 듣고,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임마누엘로 오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탄은 주께서 마음을 넓혀서 나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사랑하고 살리기 위해서 오신 귀한 절기”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 은혜를 입고도, 타인을 향해 마음을 넓히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불행히도 “내 마음이 좁아지면, 누구보다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부터 내 마음을 넓혀서 상대방을 용서하고 품어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께서 마음을 넓혀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알면서, 어떻게 내 마음이 좁아질 수” 있겠어요? 마음이 “좁아지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해가 안 가! 불편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넓어지면 아!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탄 주일인 오늘! “지금 내 마음, 내 신앙이 좁아졌는지, 넓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한소망 교회가 “오랜 기간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음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누구나 더는 분쟁과 아픔으로 교회가 멍들고 어려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교회가 교회 되고, 다시 부흥을 원한다면, 나부터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혹시 “지금도 마음에 누구는 안 되고, 누구 때문이야! 생각되면, 이는 하나님 음성이” 아닙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나부터 마음을 넓히라고, 나부터 바뀌어야 함을 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 인생의 변화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0대에 세상을 바꾸겠다고 돌을 들었고, 30대에 아내를 바꾸겠다고 눈꼬리를 들었고, 40대에 자녀를 바꾸겠다고 매를 들었는데, 50대에 정말 바뀌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마음을 넓히면 “나를 바로 보게 되고, 타인이 아닌 나부터 바꾸어야 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해도! “마음을 넓히면, 타인을 탓하기보다 덮어주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넓히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살리고 세워 주며 합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2013-12-06!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이 사망하자, 91개국 정상이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과거 “남아공은 아파르헤이트! 흑백 갈등으로 많은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만델라가 마음을 넓혀서 흑인을 탄압했던 백인들을 품고 중용”했습니다. 만델라는 “흑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개인의 상처보다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남아공은 달라졌고, 과거와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좁아지는 이유는,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나를 살리고 세워 주신 임마누엘의 은혜가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마음을 넓히면 주변에 공감할 수 있는 일, 공감하고 동역할 영혼이 많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 “마음을 넓히면 나도 교회도 살 수 있지만, 여전히 마음이 좁아져 있다면,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나부터 마음을 넓혀서 주님처럼 공감적 이해자로, 2019년 성탄을 더 의미 있게 보내기” 원합니다.
2. 예수! 주님은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의 두 가지 이름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임마누엘”입니다. 둘째로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참으로 존귀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죄에 빠진 인간을 한 번 건져 주고, 더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은 주님께서 죄인인 나를 살리고, 내가 영생을 얻기까지, 끝까지 동행하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첫 성탄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특히 “이 구원의 은혜가 마리아에게 임해서, 시대적 핍박에 굴하지 않고 아기 예수를 낳게” 했습니다. 또한 “이 구원의 은혜가 요셉에게도 임해서! 마리아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호할 수 있게 역사”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이 구원의 은혜가 죄인인 내게도 임했기에, 힘들고 어려운 이민자로 살아가지만, 구원의 은혜,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며 헌신하게!” 합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왜 하필이면 나와 정혼한 여인에게 이런 일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하나님께 항변하고, 그 믿음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본문 24절에서, 주님의 사자가 명한 그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놀랍게도! “요셉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도, 자신의 믿음은 물론 정혼한 마리아까지 지켜냈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믿음을 지켰기에 아기 예수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요셉이 하나님 주신 은혜와 믿음을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고뇌했을까요? 오늘 “우리의 문제는 내 믿음은 물론, 내가 기도한 내용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우면, 내가 말한 것을 망각하고, 피하고 외면하려는 모습이 더” 많습니다.
어떤 “목사가 건강을 잃어서, 간 이식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교회가 목사에게 간을 이식해 줄 분을 찾았고, 다행히 교인 중 대다수가 자신의 간을 이식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마침내 “당회는 교회 2층에서 오리털 하나를 떨어뜨려서, 털이 떨어지는 분이 간을 이식한다! 결정하고, 다음 주일에 기도 후, 2층에서 오리털 하나를” 떨어뜨렸습니다. 문제는 “성도마다, 오리털이 가까이 오면 ‘주여! 믿습니다! 기도하며 바람으로 털을” 밀어냈대요!
연약한 “인간은 스스로 고백한 말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기도 쉽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주신 은혜를 지키며 살아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벧전 5:8절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합니다. 원어에서 “찾는다. 현재형 동사를 써서, 지금도 마귀가 삼킬 자를 찾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마귀는 연약한 영혼보다, 믿음을 지키려는 신실한 영혼을 더 강하게” 미혹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24:24절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았지만,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은 철저히 내 몫”입니다. 실제로 “믿음은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써서 지켜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성자 하나님도 세 번이나 미혹할 정도로 너무도” 집요합니다.
마귀는 “성경에서 욥과 베드로, 다윗도 미혹”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려면, 가장 먼저 고집스럽고 완악한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내가 “악으로 다가갈 때, 내 위주로 살려고 할 때, 내가 나와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이처럼 “치열하게 믿음을 지키려고 싸우지 않으면, 나는 마귀의 미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히 12:4절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았다.”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범하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집요하고 끝까지 도전하는데, 나는 대충 어정쩡하게 대응함이 문제”입니다. 마귀의 “공격 목적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 성탄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 흘리기까지, 나를 구원하신 성탄의 의미,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처럼 “나부터 끝까지 믿음과 구원을 지켜서 성탄의 참뜻을 붙들고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