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독교 학자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삶을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1) 지금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잠잘 공간이 있으면, 당신은 세계 25% 부유층에 속합니다. (2) 지금 당신의 은행 계좌나 지갑에 돈이 있고, 심지어 얼마의 동전이 있어도, 당신은 세계 8%의 부유층에 속합니다. (3) 지금 당신이 전쟁의 위험, 투옥, 고문, 배고픔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런 고통에 신음하는 500만 명보다 더 낫습니다. (4) 당신이 죽음의 위협 없이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은 30억 명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민자의 삶이 버겁고 힘들지만, 통계는 우리가 그래도 더 감사할 조건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크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생각할수록! 죄인인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음, 영생을 선물로 받음이 가장 큰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엄청난 감사의 은혜를 누리지만, 우리가 이를 특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감사는 삶에서 감사의 조건을 계수할수록 더 커지고, 계수할수록 더 깊어지고, 계수할수록 더 온전해집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감사의 조건이 분명히 있지만, 아니! 차고 넘치지만, 이보다 불평과 원망의 조건을 먼저 바라보고 살아감에 있습니다. 작아 보이지만, 이처럼 ‘감사의 조건을 계수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불평과 원망의 요소를 계수하고 살 것인가?’ 이는 미래를 바꾸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을 반복하면 생활이 되고, 생활이 반복되면 그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우리는 내 삶에 감사의 조건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감사의 조건을 찾고 고백함이 삶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감사의 조건을 찾는 습관이 쌓일 때!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고, 마침내 감사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인데,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내 삶에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계수해 봅시다. 그리고 그 계수함이 매일의 삶에서 반복되고, 생활화를 넘어 감사의 인격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