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8-31 “36세의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일 후, 인도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가 87세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세상은 두 여인의 삶을 조명한 후! 전혀 다르게 평가”했습니다. 하나는 “미와 화려함의 상징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빈곤과 질병으로 소외된 자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하나는 “매번 화려한 옷을 입고 생활하였지만, 다른 하나는 평생 세 벌 옷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는 “엄청난 재산을 남겼지만, 다른 하나는 5루피, 한화 125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도 “역사는 테레사의 유산이 다이애나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뛰어났다.” 평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고 뛰어나기를 원하는데, 문제는 그 성격과 기준에” 있습니다. 적어도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뛰어남과 아름다움은 세속적 개념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기독교인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아름다움과 뛰어남은” 무엇일까요?
악한 “마귀는 교묘하게도, 우리가 복음에 합한 절대적 뛰어남과 아름다움보다, 세상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로 살아가도록, 상대적이고 세속적인 뛰어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미혹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독교인에게 세상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 개념으로, 하나님 말씀에 합하도록 더 뛰어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가 마지막임을 언급하며, 예수를 더욱 강조하며 서론을” 시작합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고 만유의 상속자요 창조주이다. 하나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말합니다. 이어서 “본문 4절은 그런 예수가 천사보다 뛰어나고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뛰어남과 아름다움의 원어는 모두 비교급인데, 이는 다른 누구보다 훨씬 더 우월하고 탁월함을” 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왜 수많은 사람 중, 부족한 나를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주님을 믿도록” 택했을까요?
부족해도 “우리도 주님처럼, 악한 세상에서 절대적인 뛰어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팬더믹이니 ‘그냥 현상 유지나 해, 그냥 대충 살아.’ 참으로 소극적 태도를 강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서, 우리를 주님처럼 뛰어나고 아름답게 살라고 부르셨기에, 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더 아름답고 뛰어나려면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2절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여러 부분은 하나님 계시가 여러 시기와 단계를 거쳐 전해져 왔고, 여러 모양은 꿈과 환상,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과 내적인 감동, 다방면으로 말씀하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반복하여 메시지를” 주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내가 부족해서 잘 알아듣지 못해도, 끊임없이 필요한 말씀과 알아야 할 말씀, 삶에서 바꾸어야 할 말씀을 반복하여” 주십니다. 실례로 “설교와 성경공부, 책과 신문, 영적 선배와 대화와 상담을 통해,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그렇게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반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깨달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마침내 신앙생활이 계속 느슨해져 가는 악순환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2살의 어린 나이였던 사무엘을 처음” 부르셨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엘리에게 두 아들의 악행을 반복하여 경고하셨지만, 엘리는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 전쟁에서 언약궤까지 빼앗기고, 같은 날”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실 때, 4번이나 반복하여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반복되는 메시지를 엘리는 거부했지만, 사무엘은 받고 들었다고” 말씀합니다.
특히 “삼상 3:20절은, 사무엘이 반복되는 메시지를 받은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우리가 “뛰어나고 아름답게 살려면, 하나님 주시는 반복적 메시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에게 메시지를 주실 때, 절대로 한 번만 말씀하고 침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까지, 말씀하고 또” 말씀합니다.
생각할수록 “설교는 매주 새롭기가 어렵고, 오히려 관점과 표현이 조금 다를 뿐, 유사한 메시지가 계속 반복되어 선포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유사한 메시지를 반복하여 주셔도 우리는 이를 듣고도 계속” 망각합니다. 교회 “유튜브 홈피에 제 설교가 올라가면, 한국에 계신 저희 어머니가 이를 열심히” 들으십니다. 외아들이 “멀리 있으니까, 그렇게라도 저를 보려는 어머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덜 하지만, 과거에는 설교 후 잔소리가 좀” 있었습니다. “살이 쪘다, 운동해라, 타이 색이 너무 밝더라! 입술이 왜 터졌느냐?” 그러면 “제가 중간에 말을 끊고 ‘제가 설교에서 뭐라고 했어요?’ 물으면, 잠깐 말이 끊어지고, 꼭 이렇게” 말씀합니다. “몰라! 잘 들었는데 생각 안 난다. 너희 교인들은 안 그러지?” 우리도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반복되는 메시지를 듣는데, 여러분은 그 메시지들을 얼마나 기억하며” 살아가세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반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어떻게 깨닫고 구별할 수” 있을까요? 만일 “계속 내 기억에 남고, 들을수록 찔리고, 잊었는데 다시 또 주시고, 언젠가 꼭 해야겠다고 생각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반복하여 메시지를 주시는 이유는, 그 메시지가 내 일상과 미래, 신앙을 바꾸는 데 꼭 필요하고, 무엇보다 내게 큰 은혜를 주고 유익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받고 순종한다면, 내 삶은 기독교인답게 뛰어나고 아름다운 삶으로 바뀌지!” 않겠어요? 특히 “하나님께서 내게 메시지를 반복하여 주시는 진짜 이유는, 내가 메시지를 받고, 이전과 달라지고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 자기 의로움과 고집, 습관적이고 형식적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반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서 나를 바꾸어간다면, 내 삶은 더 뛰어나고 아름답게 되어갈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삶의 목표를 세속적 수준과 자기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합한, 절대적으로 더 뛰어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팬더믹이 “힘들지만, 여전히 내가 반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들어서 찔림이 있다면, 나는 아직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고, 앞으로 더욱 뛰어나고 아름답게 될 여지와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한주도 “반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서, 하나님께 합한 더 아름답고 뛰어난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2. 우리가 더 아름답고 뛰어나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체험과 앎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본문 2~3절은 “예수를 만유의 상속자로, 창조 과정에서 함께 하셨다고, 하나님 영광의 광채라고,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라고,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예수에 관해 알아야 할 내용을 거의 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선민은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예수가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더욱 잘 알아가야 세상에서 아름답고 뛰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선민에게 천사 숭배 사상이 퍼져 있었기에, 히브리서는 처음부터 예수가 천사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구약을 인용하며”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인지, 꼭 알아야 할 영적 지식을 꼼꼼하고 자세하게 기록했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많은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에 관하여 너무도 무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인가를 자주 들어서 익숙한 것과 분명히 아는 것이 같다고 혼동하며” 살아갑니다.
예배란 “단어가 익숙하지만, 내가 실제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 얻는 은혜는 훨씬 더” 깊습니다. 나아가서 ” 내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땀 흘려 봉사하여 받은 은혜와 들어서 아는 봉사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해도 익숙해서 습관적으로 오는 것과 은혜를 사모해서 교회에 오는 것이 어떻게” 같겠어요? 최근 “한 성도가 ‘교회 가는 길이 즐겁다.’ 보내 주신 글을 보고, 제 가슴마저 벅찼는데, 과연 여러분의 삶은” 어떠신지요?
시 144:2절은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요, 나의 요새이요, 나의 산성이요, 나를 건지시는 이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말씀합니다. 다윗은 “짧은 한 구절에서 하나님을 일곱 가지로 표현하며, 그 어떤 신학적 개념보다, 삶에서 직접 느끼고 체험한 하나님 은혜를 찬양”합니다. 다윗의 “찬양은 배워서가 아니라, 삶의 모든 현장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했기에, 그 능력이 더” 컸습니다.
그렇게 “삶의 희로애락 중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하나님을 직접, 더 깊이 알아가며, 다윗은 더 뛰어나고 아름답게 성장해” 갔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아갈 때, 간접적 앎과 직접적 앎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알다! 야다와 기노스코 둘 다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하여 아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주님을 안다면서, 지식적으로 간접적으로 들어서 아는 것에” 그칩니다. 체험적 “앎이 없기에 감동과 변화도 없고, 그저 오랫동안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면서, 자기만족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요 17: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말씀합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뛰어남과 아름다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예수를 체험적이고 인격적으로, 바르게 알아가야!”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 체험적인 지식과 간접적 지식의 차이는 절대로 작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는 것과 희미하게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히 아는 것은 내 것이지만 희미하게 아는 것은 남의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믿는 것과 희미하게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히 믿으면 신뢰받지만, 희미하게 믿으면 의심받기 때문이다. 분명히 사랑하는 것과 희미하게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분명히 사랑하면 아름답지만, 희미하게 사랑하면 추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떠나는 것과 희미하게 떠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히 떠나면 새로운 것을 얻지만, 희미하게 떠나면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세상 누구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하게 다 알 수 없기에, 다만 사모함으로 평생 알아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 지식과 경험으로 다 알 수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불행히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다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알아갈 수 있고, 점점 더 많이 알아가면, 우리 삶이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으로 더 뛰어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행히 “아직 안 늦었기에, 우리가 여러 모양과 부분으로 주시는 반복적 메시지를 잘 들어서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한주도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적으로 알아가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뛰어난 삶을 살아가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