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출판사가 상금을 내걸고 ‘친구’란 말의 정의를 공모”했습니다. 그 결과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가지는 사람, 내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언제든 만나도 싫지 않은 사람, 내게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사람! 이런 내용이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반면에 “영예의 1등은, 친구는 온 세상이 다 나를 떠나도, 나를 먼저 찾아오는 사람이란 정의”였습니다. 생각할수록 “온 세상이 다 나를 떠나도 나를 먼저 찾아오는 분은 오직 단 한 분뿐”입니다.
모두가 “나를 거부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셔서 먼저 다가오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사 49:15절은, 여인이 자식을 잊어도, 하나님은 안 잊는다!” 말씀합니다. 세상의 “친밀함은 시간과 장소, 상황적 제한이 있지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친밀함은 그 어떤 제한도” 없습니다. 문제는 “주님은 죄인인 나! 죽을 수밖에 없는 나와 친밀하기 위하여 항상 먼저 다가오시는데, 내가 친밀함을 잃고 주님을 멀리하며 살아감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중, 갑자기 세족식을” 행하셨습니다. 세족식은 “공생애 마지막 밤, 열두 사도를 향한 주님의 가장 큰 친밀함의 표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끝까지 누가 큰가 다투었지만, 그래도 주님은 친밀함으로” 다가갔습니다. 주님은 “누가 자기를 팔고 배반할지 잘 아셨지만, 그래도 깊은 친밀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친밀한 사랑이 넘어진 사도들을 일으켰고,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왜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아짐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 생각하는 절기여야!” 합니다. 주님은 “죄로 끊어진 하나님과 나의 관계, 미움과 반목으로 깨진 인간관계를 다시 친밀하게 이어주려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수직적 수평적 친밀함을 위해 오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친밀함을 잃고” 살아갑니다. 특히 “올해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다가감보다 서로 떨어져야 했고, 그나마 있던 친밀함마저 많이 잃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원함과 떨어짐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함, 성도와의 친밀함을 점점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버겁고 힘든 성탄 주일을 맞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친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2020년 성탄 주일! “주께서 말씀하는 친밀함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주님께서 성탄에 친밀함으로 먼저 다가오셨기에, 우리도 주님께 친밀함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마지막 밤! 여전히 서로 크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주며” 다가가셨습니다. 또한 “식사 중, 주님은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까지 내려가셔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당시 “주님은 어쩔 수 없고,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원하여, 나중이 아니라 먼저, 철저하게 낮아짐으로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비록 “당시는 잘 몰랐지만, 먼저 다가와 주신 주님의 친밀함이 제자들의 인생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성탄은 “성자 하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성탄은 “성자 하나님께서 자격 없고 죽어가는 나를 살리려고, 친밀함으로 먼저 다가와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에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 주변 사람과 더 친밀해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처럼 위대한 주님의 명령! 친밀함을 모르고 살아감에”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주께서 먼저 친밀함으로 다가오신 은혜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악함과 더 친밀하게” 살아갑니다. 심지어 “많은 분이 ‘나는 주님과 너무 가까워! 주변 사람과도 너무 잘 지내지!’ 착각하고, 자기 의로움에 빠져, 주님이 원하는 친밀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에 정장의 성도들이 성탄 예배를 드리려고 삼삼오오”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남루한 옷을 입은 여행객이 성전에 들어가려는데, 안내위원이 그를” 막았습니다.
“오늘 성탄절 예배는 정장을 한 사람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거부당한 “여행객이 큰 상처를 받고 성전 밖에서 울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말합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니?” 고개를 드니 “예수께서 서 계셔서, 여행객은 더 서럽게 울며” 말합니다. “주님께 예배드리려는데, 주님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은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나도 저 성전에 못 들어갔단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 말씀하셨대요! 이는 “성탄절에 모든 교회가 예배드리지만, 정작 주님과 친밀하지 않고, 주변 사람과도 친밀함을 잃은 오늘 이 시대의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거룩한 성탄을 통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장 큰 친밀함으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셨는데, 우리 삶에 주님은 없고 내 만족과 기쁨이 먼저라면, 어떻게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겠어요?
지금 “내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삶의 방향을 바꾸어서, 친밀함으로 주님께 다시 다가가야!” 합니다. 이유는 “원망과 불평, 낙담과 좌절보다, 주님께 친밀함으로 다가감에 더 큰 능력과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친밀하게 다가오는 영혼을 받아주시는데, 이를 외면함은 가장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가 사람답게 살아야 하기에, 주님께 친밀함으로 가까이 다가오길” 원합니다.
힘들수록 “주님께 친밀함으로 다가가야, 꼬이고 얽힌 삶의 실타래를 잘 풀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힘들고 어렵다면서, 주님께 다가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밀함으로 내 아픔과 연약함을 해결하기 위해 다가오셔도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부터 친밀함으로 주님께 더더욱 다가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만이 “유대인을 몰살하려 할 때, 모르드개가 이 위기를 황후였던 에스더에게” 알렸습니다.
당시 “에스더는 자신의 상황과 처지가 좋지 않다면서, 모르드개의 요청을 고사하다가, 마침내 죽으면 죽으리라! 민족을 위해 나서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진심으로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다가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가 간절함과 친밀함으로 다가옴을 아시고, 당시 열악한 상황과 처지는 물론 역사까지도 바꿔” 주셨습니다. 마침내 “유대인은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던 대적을 심판할 수 있었고, 그렇게 부림절이 제정되었던 것”입니다.
2020년 “어렵고 힘든 터널을 지나며, 지금 여러분과 하나님의 영적 친밀함, 사랑하는 주변 지인과의 친밀함은” 어떻습니까? 주님은 “당신 전부를 주시며 하나님은 물론 사람과 친밀함으로 살게 하셨는데, 마귀는 ‘네가 어떻게 하나님과 주변 사람과 친밀해! 염치없고 뻔뻔하다!'” 미혹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탄을 통해 주신 친밀함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주께서 다가오셔서 주신 친밀함으로 복된 성탄을 누리기” 원합니다.
2. 성탄은 친밀하게 다가오신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절기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려 하자, 베드로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당시 “가장 낮은 종이 발을 씻어 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어쩌면 이는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본문 8절에서,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체면과 염치, 전통과 고정관념,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그냥 발을! 아니, 인생을 다 맡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더러운 발이었지만,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주님께 온전히 맡기면서 그 관계가 더 친밀해졌고, 마침내 온전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은 “그 의미를 묵상함도 귀하지만, 실제로 내 삶이 변화되어야, 주님과 더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성탄은 “주님께서 당신 전부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알고 깨달았다면, 부족하고 연약해도, 염치없지만, 나도 주님께 내 전부를 다 맡겨야!” 합니다.
성탄은 “가까운 지인끼리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송년회를 즐기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탄은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 제자들이 더러운 발을 맡긴 것처럼, 내 모든 것을 맡기는 절기, 그래서 내 믿음을 회복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가진 것, 누리는 것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산과 생각이 많고, 변명과 핑계, 자기 합리화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2020년 “성탄 주일인 오늘! 주님은 우리가 악한 세상이 아니라, 더더욱 주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도전합니다. 이유는 “연약한 내가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가야!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해는 “염도가 높아서 인체가 가라앉지 않지만, 사해에 들어갈 때, 꼭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해에서 “절대로 수영을 하면 안 되는데 이유는 만일 물에서 헤엄을 치거나, 빠질까 두려워서 허우적거리면, 사해 물이 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해 물은 “다량의 광물질이 함유되어 있어서, 눈에 들어가면 심각한 통증과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해에 가면, 누구나 물에 몸을 완전히 맡기고 누워야, 안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을 말할 때,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속담을 자주” 사용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쉬운 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안전을 위한 유일한 법칙은 창조주 하나님께 내 삶을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탄은 “주님께서 나를 살리고 구원하려고, 당신 전부를 주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안다면, 나부터 더러운 발을 맡긴 제자처럼,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자존심, 꼼수 부리는 세속적 사고, 체면과 계산적 태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2020년! “우리 삶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기에! 더더욱 주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맡기는 영혼을 위해 일하고, 앞서가고, 가장 선한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악법 때문에 삼 개월 된 모세를 나일강에 떠내려 보내는 요게벳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생각할수록 “요게벳은 간절함으로 핏덩이 모세를 하나님께 맡겼을 것”입니다. 당시 “아기 모세를 넣은 갈대 상자, 원어 테바는 무동력 배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대홍수를 위해 노아가 건조한 방주도, 갈대 상자와 같은 테바를!” 썼습니다. 테바는 “인간이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다 맡기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요게벳이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전부를 맡겼을 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온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노아가 “대홍수 때,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테바! 방주를 온전히 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생명과 번성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크건 작건, 똑똑하건 어리석건, 부유하건 가난하건, 테바인 인간은 하나님께 맡겨야, 이 땅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려면, 계산하지 말고 테바와 같은 내 인생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맡겨야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탄 주일이지만 “우리가 엄청난 재앙을 통과 중이기에, 더 주님께 온전히 맡겨서 성탄의 깊은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