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세렝게티 초원에 서식하는 누 떼는 매년 건기마다 새로운 풀을 찾아 무려 1,600km를” 이동합니다. 광활한 “초원에서 수많은 누 떼가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역주하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을” 이룹니다. 그런데 “가끔 리더가 한 방향을 고집하여 낭떠러지로 돌진하면, 다수의 누 떼가 생명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때로 “리더의 고집으로 마라강을 건너는 중, 악어 떼의 공격으로 수많은 누 떼가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불행히도 “살려고 이동하는 누 떼가 분별력 부재로 인해 안타깝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별력 부재는 누 떼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악과 생사를 생각하지 않고, 전진과 발전, 혁신만을” 강조합니다. 물론 “전진과 발전, 혁신이 주는 장점도 있지만, 바른 분별력을 잃으면 그 결과가 절대로 선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로 너무 위축되어서, 바른 분별력을 잃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코로나-19의 “엄청난 위기는 시간이 지나고,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백신의 개발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뜻을 바르게 깨닫는 분별력이 있어야, 지금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직접 종말에 관해 말씀하신 내용으로, 소 묵시록으로” 부릅니다. 주님은 “말세가 되면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전쟁과 기근, 지진과 재난, 불법과 미혹, 식어가는 사랑, 다양한 고난과 어려움이 일어날 것이다!” 말씀합니다.
주님은 “바른 분별력이 있어야 말세에 다가올 영육간의 엄청난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 도전하셨습니다. 누구나 “분별력을 잃으면 넘어질 수 있고, 심지어 구원마저도 잃을 수 있기에, 주님은 너무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종말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경고는 2000년 전은 물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도 “시한부 종말론과 많은 이단, 전쟁과 기근, 불법과 곳곳에서 끔찍한 테러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만 좋으면 그만!’ 탈현대주의, 코로나-19로 인한 위축과 패배의식, 불신은 우리의 분별력을 더 크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려면! 구원받으려면! 바른 분별력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영적 분별력을 잃으면, 사실은 다 잃는 것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지!” 살펴봅시다.
1. 바른 분별력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주님의 종말에 관한 말씀 중, 본문 14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종말은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의 미혹, 그리고 다양한 자연재해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 8절은,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다!” 말씀합니다. 주님은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비로소, 종말, 끝이 온다!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확신한다면, 영적인 미혹, 자연재해, 전쟁과 환난보다, 하나님 말씀이 모든 민족과 온 세상에 전파되었는지, 이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최근 “한국과 미국, 세계 곳곳의 시한부 종말론, 수많은 이단, 전쟁과 기근, 일부 지역의 산불에도, 세상은 종말이다!” 대서특필합니다. 특히 “코로나-19! 세계적 Pandemic이 종말의 징조라고 떠들지만, 말씀은 세상의 환난과 어려움은 종말의 시작일 뿐, 절대로 끝이 아니다!” 말씀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이후에야 종말이 온다!”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보다 세상 뉴스, 철학과 전통을 더 신뢰해서, 분별력을 잃고 두려워하며 영적 곁길로” 빠져듭니다. 심지어 “고대 예언자의 주장, 교묘하게 만들어진 거짓을 보고, 종말이 왔다고 분별력 없이 행동할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코로나-19로 힘들수록, 종말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리 삶의 기초가 하나님 말씀이 되어야!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유는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만이 가장 옳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인간이 말씀을 잃어버리면, 그 누구도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느 13:26절은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 하게 하였다!”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말씀을 기초로 살았을 때, 그는 풍요와 번영 중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말씀을 놓치고, 무려 1000명의 아내를 두고,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그 신앙마저” 잃었습니다. 불행히도 “하나님 말씀을 잃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던 가장 지혜로웠던 왕이 우상 숭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른 “분별력을 잃어서 악한 일을 반복하다가, 국가가 남북으로 나뉘고, 성경과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이유는 우리 삶의 기초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죄인인 인간, 인간이 모인 교회는 절대로 온전할 수 없지만, 성경은 항상” 옳습니다. 다행히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말씀이 생각나도록, 선한 길을 가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하나님 말씀이 옳다면 옳은 것이고, 틀렸다면 틀린 것”입니다. 어윈 맥매너스가 “섬기는 모자이크 교회는 코뿔소 교회로” 유명합니다.
코뿔소는 “눈이 나빠서 바로 앞만 볼 수 있고,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멈추지 않고 항상 전력 질주”합니다. 게다가 “강철같은 뿔과 갑옷 같은 피부 때문에, 대부분의 장애물을 부수고” 돌진합니다. 모자이크 교회가 “코뿔소 교회로 불리는 이유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강한 실천성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맞으면 회의와 토론보다, 일단 실천하는 특징이” 큽니다. 이처럼 “말씀에 기초한 바른 분별력으로 헌신한 결과가” 있습니다.
말씀에 “기초한 바른 분별력 때문에, 모자이크 교회는 다양한 봉사와 선교를 힘있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일을 실천하는 열정도 중요하지만, 그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분별력”입니다. 물론 “말씀대로 실천해도 장애물이 있지만, 말씀으로 무장한 분별력은 그 어떤 장애물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말씀보다 기분과 상황, 세상의 유행과 고정관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더 큰 분별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코뿔소 성도와 교회는 점점 줄어가고, 이익과 편안함만 추구하는 연약함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말씀에 “기초한 분별력이 없기에, 영적 모험은 물론 거룩한 욕심도 점점” 잃어갑니다. 코로나-19와 “미국 대선으로 인한 어수선함이 있지만, 나부터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하고, 말씀을 기초로 내 삶이 더 굳건해져야!” 합니다. 한주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도 말씀에 기초한 바른 분별력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세상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야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미혹, 플라나오란 단어가 4/5/11절 세 번이나” 나옵니다. 플라나오는 “아주 적극적인 태도로 속이려고 다가오는 거짓을” 뜻합니다. 플라나오는 “주로 분별력을 잃은 사람을 흔들고 잘못된 길로 이끌어갈 때” 쓰였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굳건하지 않고 흔들리는 영혼이 미혹에” 빠집니다. 실제로 “본문의 다양한 재앙과 재난, 다양한 미혹들이 수많은 성도를 영적으로 흔들어서 분별력을 잃게 하고, 믿음과 천국까지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말씀에 기초한 분별력으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면, 절대로 하나님 선물인 구원을 놓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말씀과 멀어지고, 그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기에, 그나마 있던 분별력마저 점점 잃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영적 팔랑귀가 참으로” 많습니다. 팔랑귀는 “줏대가 없어서 타인의 말에 잘 흔들리는 사람을” 뜻합니다.
쉽게 “흔들려서 누군가 좋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가고, 아니라고 하면 우르르” 빠져나옵니다. 어떤 “뚜렷한 기준과 원칙! 바른 분별력이 없기에, 계속 이리저리 헤매며” 살아갑니다. 특별히 “영적 분별력을 잃으면, 선악은 물론 생사마저 구분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잃으면, 매사에 쉽게 상처받고 시험 들며, 믿음의 자리를 너무 쉽게” 떠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분별력으로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문제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기에 분별력도 잃고, 계속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키면 바른 분별력으로 굳건한 반석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많은 박해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주의 일을 하는 중 당한 고난은 충분히 시험과 상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롬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고백합니다.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 주신 분별력도” 지켰습니다. 굳건히 “지킨 믿음과 분별력으로, 바른 것을 보았고, 바른길을 걸었고, 훗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넘어지고 연약해지는 이유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분별력마저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쉽고 평탄할 때는 누구나 그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어렵고 힘들 때 믿음을 지키는 영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믿음을 잃고 분별력마저 잃어서, 성장은 고사하고 시험과 상처로 허송세월하는 영혼이 적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인 믿음을 가지는 것도 귀하지만, 그 믿음을 지킴이 더 중요하고, 믿음을 지켜야 바른 분별력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순교자 폴리캅은 요한의 마지막 제자이자 서머나 감독”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황제를 신으로 추앙했기에, 서머나 총독은 황제를 숭배하지 않은 폴리캅을 무신론자로” 정죄했습니다. 이에 “폴리캅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숭배하는 너희가 무신론자다!” 일갈했습니다. 또한 “서머나 총독은 공개적으로 ‘예수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 선언했지만, 담대한 폴리캅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86년간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은 내게 한 번도 서운하게 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부인하겠는가?”
이에 “분노한 총독이 수많은 군중 앞에서 ‘가이사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명령해도, 폴리캅은 ‘나는 기독교인이다!’ 짧게 답하고 순교의 길로” 갔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삶은 물론 신앙마저 너무도 힘들고 어렵게 만들고 ” 있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지켜야 선한 길, 생명의 길로 가는 바른 분별력으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기에, 내가 더 믿음을 지켜야 하고,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더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내게 바른 분별력을 주실 것”입니다. 어렵지만 “다시 일어나서! 용기를 내서! 믿음을 지켜서! 항상 바른 분별력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