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에는 “미국의 유명 건축가 F. L 라이트가 지은 100년 역사의 데이코구 호텔이” 있습니다. 데이코구 호텔은 “완공까지 총 4년이 걸렸는데, 절반인 2년을 기초공사에”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기초공사에 집중해서, 건축 비용이 계획보다 총 6배가 들어서 일본인의 불평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도 7의 관동 대지진이 동경 2/3를 파괴하고, 무려 14만의 사상자가 났을 때, 데이코구 호텔은 유리창 다섯 장만 깨졌을 뿐!” 멀쩡했습니다.
이유는 “F. L 라이트가 지진을 대비해 호텔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과거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영적 기초가 너무도 약함에” 있습니다. 많은 영혼이 “교회에 나오지만, 무엇을 믿는지, 왜 믿어야 하는지,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이유는 “많은 교회와 목회자가 영적 기초를 외면하여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많은 기독교인도 진심으로 복음에 관해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영적 기초가 약하면 작은 시련에도 흔들리지만, 영적 기초가 든든하면 그 미래가 더 견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하나님이지만,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어 가장 낮아졌고, 죽기까지 말씀에 순종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주님을 높이셨고, 모든 피조물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복음의 핵심을 명쾌하게 설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신앙인이 예수를 믿는다면서, 복음에 관한 영적 기초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불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적 기초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가 영접 기도를 따라 하면 구원받았다고! 설교 후 결단하여 강대상으로 나오면 구원받는다고,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영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이 없는 영접 기도, 강대상으로 나옴, 교회에 출석함이 정말 능력이” 있을까요?
마 7:21절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합니다. 마귀는 “이처럼 복음의 기초가 없는 행위, 표면적 선언에 만족하게 하고, 자신을 속이도록” 미혹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기독교인으로서 꼭 필요한 영적 기초를 갖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남이 하니까, 그냥 생각 없이 교회 마당만 밟으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이제 “곧 교회가 열릴 것인데, 문제는 단순히 여는 것보다, 영적 기초를 든든히 하고 교회를 열어야 할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 각자의 영적 기초가 든든하고 굳건할수록, 우리가 누릴 은혜가 더 커지고, 교회가 더 든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영적 기초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어디에도, 주께서 나를 사랑했다, 직접적인 표현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종의 형체로 우리와 같이 되심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내 죄 전부를 깨끗이 씻어주심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가장 낮은 구유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역하다가, 비참한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죄인인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말과 혀로 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 아니! 당신의 전부를 주신 사랑,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문제는 “바울이 이처럼 존귀한 복음을 전했지만, 빌립보 교회와 신앙인이 주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교육과 선교, 친교와 교제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물론 “교회가 이 모든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하지만, 문제는 그 기초가 과연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기초한 프로그램, 교육과 선교, 친교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와 신앙인 안에 십자가 복음과 사랑이 너무도” 희미합니다. 비록 “우리 각자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진심으로 주의 십자가가 나를 정결케 했고, 나를 살리셨다는 사실이 내 영적 기초가 되면, 이것이 바르고 구원받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향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A.W 토저는 “‘철저한 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세 가지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 사랑은 영원무궁하고 한계가 없고, 끝과 바닥이 없는 무한성이 있다. 십자가 고난은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할 수 있는 전능성이 있다.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에는 더는 무엇인가를 보탤 수 없는 완전성이 있다.” 문제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서, 이처럼 십자가의 온전한 사랑이 내 삶의 기초가 되지 않는다면, 내 신앙은 모래 위에 세워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연약한 “사도들이 어떻게 완전히 180도 변해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했을까요? 주님 “공생애 때, 제자들은 십자가 사랑, 복음의 기초를 모르고 그냥 주님만” 따라다녔습니다. 반면에 “성령 체험 후, 제자들은 십자가의 무한성 전능성 완전성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마침내 “사도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하며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이처럼 십자가 사랑이 내 삶의 영적 기초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마귀는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도록, 바쁘고 분주하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지루하고 딱딱하며, 낡은 이야기로 여기게” 합니다. 물론 “십자가 복음이 절대로 쉽지 않지만, 그래도 바른 영적 기초가 다져져야, 악한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십자가 복음을 모른다면,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직분이 있어도, 그 신앙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유명한 수도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습니다.
수도사는 “설교 대신, 촛불을 밝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새긴 조각상을” 비춥니다. 수도사는 “채찍에 맞은 예수의 가슴을 비추었고, 이어서 못 박힌 주님의 손과 발, 마침내 창에 찔린 주님의 옆구리를”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사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 사랑!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세요! 십자가를 항상 주목하여 살펴보세요!” 이제 “우리는 코로나-19를 뒤로하고, 교회를 다시 열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시 “정상적인 예배와 일상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등불을 밝혀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가슴과 손, 발과 옆구리를 통해 주신 사랑과 은혜, 구원과 치유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지금 십자가 복음을 듣는데, 내 가슴이 뜨겁지 않다면, 내 신앙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지만, 십자가 사랑과 복음을 영적 기초로 든든히 가지고 있다면, 우리 미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이 십자가 사랑, 십자가 복음을 더더욱 가슴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그렇게 “내 영적 기초가 든든해져서, 앞으로 나와 가정, 교회가 든든한 반석이 되기” 원합니다.
2. 어떤 어려움에도 최후 승리를 믿는 믿음이 우리 영적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0~11절은 훗날 천국에서 일어날 일을 참으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천국에서 모든 영혼이 예수께 무릎 꿇고, 모든 입술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찬양할 것이다.” 여기서 “주님께 무릎 꿇고 찬양할 영혼은 모두 십자가 복음을 믿는 성도일 것”입니다. 부족해도 “예수를 주로 고백한 모든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또한 “천국을 소망하고 확신하는 영혼은 힘들어도 이 땅에서 주님을 본받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처럼 “낮아져서 손해 보고, 양보하며 져주고, 고난과 어려움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환난이 크지만, 그래도 십자가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면, 최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 확증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빌립보 교인에게, 최후 승리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이 피었다 지는 풀과 안개처럼 짧지만, 수고와 슬픔이 가득하고, 날아갈 정도로 빠르다!” 강조합니다.
성경은 “이 땅의 삶이 참으로 변화무쌍하지만, 성도에게 최후 승리가 있다!” 약속합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서면, 이 땅에서 당한 고난과 좌절, 질병과 약함이 사라질 것이다!”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최종 승리를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누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최후의 승리가 있기까지는, 지금처럼 항상 희로애락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과 미혹에도, 나는 최후에 승리할 것이다! 확신이 필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최후 승리를 확신하면, 지금의 어떤 환난과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최후 승리를 믿지 못하기에, 작은 일, 눈앞의 일에 전전긍긍하며” 삽니다. 지금도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참 힘들고 어려운 터널을 통과 중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훗날 천국에 대한 확신,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만일! “아직도 영적 조울증이 깊다면, 나는 최후 승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험과 “상처로 너무 쉽게 믿음을 저버린다면, 이 또한 최후 승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너무 크다면, 이 또한 최후 승리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 있다면, 이 또한 최후 승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11장에서, 사역 중 당한 수많은 고난 목록을” 열거합니다. 바울은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파선하고, 깊은 바다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강도와 강의 위협, 동족과 이방인의 위협, 광야와 거짓 형제의 위협도” 컸습니다. 수고하고 “애쓰며 잠도 못 자고, 목마르고,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음도” 많았습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바울이 이 고생을 하며 복음을 전해야!” 했을까요?
바울이 “이 모든 환난을 이긴 이유는 하나님 주실 최후 승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민자의 “삶이 버겁고,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이 적지 않기에, 더더욱 최후 승리를 믿는 믿음이 영적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훗날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면 지금의 고난과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는 번영신학의 문제는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합니다. 자녀가 잘 됩니다.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은, 훗날 천국에서 누릴 최후의 승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레슬리 플린은 “이방 종교와 기독교를 ‘하라’와 ‘행해졌다!’로 구분하여 그 차이점을” 설명합니다. 세상 종교는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마라! 그래야 복이 있다!”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슬람과 불교, 힌두교가 모두 다 하라! 하지 말라!”를 강조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십자가 복음으로 이미 우리 죄와 허물이 용서받았다!” 강조합니다.
이미 “최후의 승리가 보장되었다! 행해졌다!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 모든 죗값을 다 갚았다. 선언하시고” 사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이미 주님께서 행해놓으신 것, 승리와 은혜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라! 하지 말라! 내 노력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미혹하지만, 주님은 내가 다 준비했다!” 말씀합니다. 한주도 “악한 세상으로 나가지만, 최후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의 기초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