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는 새롭게 가정을 이루는 부부에게 항상 오뚝이를 선물”합니다. 부부가 “살다 보면 생각지 않은 어려움과 아픔이 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부부관계는 물론 많은 것이 세워짐보다 무너짐이 더” 많습니다. 생각지 않은 “실패와 좌절로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도 “사람은 모두 넘어짐보다 일어섬을 원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무엇을 기초로 다시 일어나는가?”에 있습니다.

잠 24:16절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가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하고, 비록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도전합니다. 최근 “코로나-19의 상황이 점점 나아지면서, 모두가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다시 시작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핵심은 “다시 시작하되 바르고 신실하게, 이전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더 나아지도록 하나님의 방법대로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에스겔은 “환상에서, 완전히 패망하고 회복 불능에 빠진 이스라엘의 몰락을” 보았습니다. 골짜기 “사방에 마른 뼈들이 가득해서, 사방이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본문 3절에서, 이 뼈들이 다시 살 수 있을지! 에스겔에게 먼저 물으며” 다가오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면서, 사망이 생명으로,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환상을 통해, 넘어진 선민을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전대미문의 “재앙인 코로나-19는 절대로 인간의 과학과 의학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세상이 코로나-19를 극복해도, 여전히 말씀과 성령님의 이끄심 없이 세속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은 교회와 신앙인을 이전보다 더 부정적으로 보며,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와 성도가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가지만, 그래도 우리는 교회만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우리 교회는 많은 분의 헌신과 수고로 뉴저지를 대표하는 교회! 마치 큰 군대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이제 “우리 한 소망 교회가 다시 일어서려면, 무엇보다 우리 각자의 영적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의 일어섬은 교인과 재정이 늘어남보다, 우리 각자가 기독교인답게,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답게 새롭게 되어야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의 코로나-19는 우리가 새롭게 되고, 큰 군대가 되기 위한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와 교회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될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다시 하나님의 큰 군대로 서려면, 하나님 말씀만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너진 선민을 다시 큰 군대로 세우려고, 에스겔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말씀합니다.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생기가 들어가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뼈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여서 너희가 살아나리라!” 생각해 보면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명령이었지만, 에스겔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은 그대로 대언하여, 버려지고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에스겔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조금의 불평과 원망, 의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해석을 더 하지 않았고, 온전히 하나님 말씀만 듣고, 순종해서 그대로 대언”했습니다. 성경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 말씀만 들으면, 불가능이 가능함으로, 사망이 생명으로, 마른 뼈가 큰 군대가 될 수 있음을” 도전합니다. 이처럼 “교회와 성도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만 들어야 하는데, 오늘 이 시대의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은 세상과 인간의 소리에 너무 많이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교회 안에 세상의 황금만능주의, 인본주의, 탈현대주의 등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이 십자가 복음보다 세상 철학으로, 상식과 고정관념, 자기주장과 전통대로 교회를 섬기며, 이것이 옳다!” 착각합니다. 심지어 “많은 분이 하나님과 말씀을 바라보지 않고, 죄인인 인간 때문에 실망하고 절망해서 교회를 떠나가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사람과 갈등이 힘들 수 있지만, 사람 때문에 영생과 복음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 “삶이 다시 회복되고 일어나려면, 더는 사람 바라보지 말고, 오직 말씀만 붙잡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 “중동에서 이슬람 자살특공대의 기습 공격으로 약 200명가량의 해병대가 사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4성 장군이 참사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부상자를 위로하는 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크게 “다친 해병대 청년 한 명이 4성 장군 앞에서, 안간힘을 써가며 종이에 Sempre Fidelis 라고” 적었습니다.

이는 “미국 해병대 표어, 항상 충성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이를 보고 4성 장군은 물론 모두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청년이 자신의 정체성이 해병대임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하며, 우리는 더욱 하나님 말씀에만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살아난 기독교인이다. 바른 정체성을 회복해야, 나와 교회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는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선악마저 혼동하게” 합니다. 세상의 “소리가 절대로 참 회복을 줄 수 없기에, 오히려 우리 삶이 단순해져서 더더욱 하나님 말씀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이유는 “복잡하고 분산될수록 치유와 회복은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승천 후, 120명 성도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사도들은 주님을 부인했고, 서로 크다고 다투었고, 특히 주님 가족은 주님을 미쳤다며”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분산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 말씀에만 집중하여, 과거 모든 죄와 허물에서” 회복됩니다. 영적으로 “넘어진 영혼들이 하나님 말씀만 들어서 큰 군대가 되어 초대 교회를 힘있게” 세워갔습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만 들어야 할 이유가 딤후 3:16~17절에” 나옵니다.

“성경만이 죄인인 인간을 교훈하며 책망하고, 바르게 교육하고, 하나님 사람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문제는 하나님 음성보다 내 고집과 내 자아의 소리를 들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다시 말씀만 듣겠다! 결단해야!” 합니다. 말씀만이 “내 인생과 자녀 문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말씀은 목사와 중직자가 읽어야 하고, 자신은 덜 읽어도 괜찮다!” 착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가 직접 내 눈과 귀로 말씀을 보고 듣고, 십자가 복음을 믿어야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회복되기 원하고, 하나님 군대로 쓰임 받기 원한다면,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한주도 “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 말씀만 들어서 하나님의 극히 큰 군대로 회복되고 세워지기” 원합니다.

2. 다시 하나님의 큰 군대로 서려면, 서로 깊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골짜기에 “가득했던 마른 뼈들이 갑자기 큰 군대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른 “뼈들이 극히 큰 군대가 되기까지 힘줄, 살, 가죽, 하나님 주신 생기가” 필요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는 것보다 더한 것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신체 각 부위를 언급한 이유는, 우리 몸의 힘줄과 살, 가죽과 생기가 서로 깊이 연결되듯, 선민이 하나 되고 깊이 연결되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체 각 부분이 하나님 말씀으로 서로 연결되자, 사망이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무너져버린 “선민이 다시 하나님의 큰 군대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군대는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 명사이기에,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야 더 강하고 든든해지듯, 하나님의 교회가 큰 군대로 다시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각 지체가 연합하고 깊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부족한 여러 지체의 연합으로 더 든든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지탄받는 가장 큰 이유는 연합과 일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버스에서 “두 사람이 싸우자, 한 남성이 내리며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 소리쳤대요! 오늘날 “교회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더 많이 보고, 서로 크고자 경쟁하고, 차별과 분열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에 더 잘 모이는 악함이” 큽니다. 우리가 “정말 회복되어 군대로 쓰임 받기 원한다면, 나부터 하나 됨을 깨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분이 “타인이 일치됨을 깨면 강하게 책망하면서, 자신이 하나 됨을 깨는 것을 잘” 모릅니다. 문제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부터 일치됨을 지키는 성숙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며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죄를 용서하셨고, 내 양을 치라! 귀한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주님! 요한은 어떻게 되나요?”

당시 “주님은 요 21:22절에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이 말씀이, 요한은 죽지 않는다! 이상한 소문이 되어” 퍼졌습니다. 이유는 “베드로가 이 소문을 곳곳에 퍼뜨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때, 요한이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 청해서 사도 모두가” 분노했습니다. 어쩌면 “사도 10명 중, 베드로가 가장 크게 흥분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이 서로 연합하지 못했을 때, 생각지 않은 문제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둘이 말씀만 들으며 서로 일치했을 때,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초대 교회에서 “수많은 일을 감당하며, 함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합력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오기에, 일치보다 별별 일이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 다양한 별별 사람 중! 나 같은 죄인도 부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내가, 교회 중직자가 항상 먼저 양보하고 이해하고, 져주어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교회 일을 할 때,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고 합력해야!” 합니다. 비록 “손해가 있어도, 하나님을 위한 손해라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크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A.W. 토저는 “미국 교회 성도의 세 가지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➀ “성도가 성장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면서 살만 쪄서 비만에 허덕인다.”

➁ “성도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모르고 참관만 한다.” ③ “성도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는다.” 생각할수록! “이는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기에, 나부터 이 악한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코로나-19의 “아픔이 크지만, 상처로 끝나지 말고, 오히려 내가 화평의 도구가 되어 큰 회복을 체험해야!” 합니다. 마 5:9절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화평을 “지키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나부터 손해 보고 양보해서, 하나 됨을 지킨다면 나와 우리 교회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회복을 위해 내가 손해 보고, 억울해도 양보할 때!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한주도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 되어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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