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종 씨의 책 “아내의 빈자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어이없이 우리 곁을 떠난 지 4년, 지금도 아내의 빈자리가 크기만 합니다. 어느 날 출장으로 아이의 아침도 챙겨주지 못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저녁, 너무 피곤해서 귀가 후, 양복 상의를 벗어 놓고 침대에 쓰러져 누웠습니다.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뭔가가 느껴졌습니다. 빨간 양념 국물과 손가락만 한 라면이 이불에 쏟아져 있었습니다. 컵라면이 이불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옷걸이를 꺼내서 자기 방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이를 붙잡아 장딴지며 엉덩이며 마구 때렸습니다.”

‘왜 아빠를 속상하게 해?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말하며 아이를 때리는데, 아들이 울며 한 몇 마디가 제 손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빠가 가스레인지 불을 함부로 켜면 안 된다고 해서, 보일러 온도를 높여서 데워진 물을 컵라면에 부어서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아빠 주려고, 퇴근하고 오면 배고플까 봐, 식지 말라고 이불 속에 두었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가슴이 메어 왔습니다. 아들 앞에서 눈물 보이기 싫어서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을 틀고 엉엉 울었습니다.” 이는 “젊은 아빠가 아내를 잃고, 나름대로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며 일어난 에피소드”입니다.

이 글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나름대로 사랑했고, 아들도 나름대로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문제는 “과연 아들을 향한 아버지 사랑과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사랑 중 누구의 사랑이” 진짜일까요? 진짜 사랑은 “지식적으로 앎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앎은 많지만, 삶이 너무” 부족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인데, 우리는 성령의 엄청난 은혜와 능력을 알지만, 삶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본문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가르치다. 디닥세이는 성령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생각나게 하리라! “휘폼밈네스코는 끊임없이 계속 깨우쳐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해야 했지만, 오히려 더 두려워하고, 근심만 더” 깊어졌습니다.

이에 “주님은 본문 27절에서, 평안을 줄게!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당시 “주님은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앎이 아닌 삶으로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힘! 모르는 것이 약! 모순된 명언을 자주” 씁니다. 아는 것이 힘! “여기서 앎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는 앎이기에, 힘이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게 약! “이는 앎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실천 없는 앎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강림을 통해 새롭게 되고, 이적과 능력으로 변화되어 영적으로 항상 승승장구”했습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는 성령 강림 주일을 맞으며,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두려움과 근심이 큰 이유는 성령님의 무능력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성령의 능력을 머리로만 알뿐, 삶으로 연결하지 못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앎에서 삶으로 이어가면, 충분히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 주일을 맞으며, 어떻게 하면 성령의 능력을 앎이 아닌 삶으로 체험할지!” 살펴봅시다.

1. 성령의 능력에 관해 앎을 넘어 삶으로 체험하려면, 내가 말씀으로 더 굳건해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보혜사 성령께서 왜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셨을까요? 그만큼 “제자들이 약했기에, 성령께서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셔야, 제구실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주님과 항상 함께했지만, 주님이 떠나고 성령께서 오신다! 이 말씀을 듣고 불안했고, 두려움과 근심이 더” 커졌습니다. 다행히 “오순절에! 성령님의 능력을 삶으로 체험하면서, 모든 것이 다 바뀌어서, 사도들의 삶이 반석처럼” 굳건해졌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앎이 아닌 삶으로 체득했기에, 산헤드린 공회의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굳건해진 사도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영적으로 굳건하게 세워”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을 알면서도, 매번 무기력하고 연약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매사에 말씀을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머리로 알 뿐!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코로나-19를 겪으며, 많은 분이 힘들고 어렵다고, 두려움과 근심에 빠져, 말씀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문제는 “힘들어서 원망하고 불평함이 아무 소용 없음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을 외면하며 믿음의 길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영혼은 어려울수록 더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알아서, 마침내 삶으로 순종하여 더 굳건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유는 “성령님의 가르쳐주심과 생각나게 하심이 항상 가장 옳고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가르쳐주심과 생각나게 하심이 부족한 내 인생을 천국까지, 끝까지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300 군사에게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미디안과 나가서 싸워라!” 명하셨습니다. 당시 “기드온의 승리는 군사 전략과 신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드온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앎이 아니라 삶으로 체험”했습니다. 마침내 “삶으로 체험한 말씀의 능력이 기드온을 굳건한 믿음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네가 승리할 거야! 내가 너와 함께 할 거야! 하나님 말씀이 기드온을 더 굳세게 했고, 마침내 온전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삶을 보면, 하나님 말씀을 듣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게다가 순종과 실천도 없기에, 우리 삶이 점점 연약해져” 갑니다. 성령께서 “지금 내게 반복하여 강권하는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부터 삶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심중에 “말씀을 읽어야지, 써야지, 감동이 있으면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에 “지금 기도해야지, 봉사해야지, 사랑해야지, 감동이 있으면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말씀대로 살려 하면 힘들 수 있고 방해도 많지만, 앎이 삶으로 바뀌면, 내 믿음은 더 굳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으로 “성령님 음성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책임지심 구원하심 앞서가심 길을 여심,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안 늦었기에, 이제라도, 반복되는 말씀, 찔리는 말씀을 앎이 아닌 삶으로 순종하면, 내 삶은 더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 “선다씽이 동료와 함께 히말라야 눈길을 걸어가는 중, 길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얼굴은 얼어 있었지만,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이에 “선다씽은 동료에게, 이웃을 사랑하란 말씀에 순종해서 이 사람을 업고 가자!” 말했습니다. 당시 “동료는 이웃사랑에 관한 말씀을 알았지만, 선다씽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나도 다 죽게 되었는데, 나는 내 길을 먼저 간다! 말하고 앞서” 갔습니다.

이에 “선다씽은 혹독한 추위 중에도 쓰러지고 일어나길 반복하며, 죽어가는 영혼을 업고 계속 길을” 갔습니다. 놀랍게도 “얼마 후, 먼저 간 동료가 싸늘한 시신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반면에 “선다씽은 쓰러진 영혼을 업고 가며, 서로 체온을 유지하여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선다씽은 이웃사랑을 앎이 아닌 삶으로 실천하여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모르는 말씀, 할 수 없는 말씀으로 부담 주고 강요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님 말씀은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기에, 반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눈앞과 현실의 어려움에 빠져서, 반복되는 도전을 놓치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말씀대로 살아가면, 길이 열리고, 내 삶이 더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 주일을 맞으며, 성령님 말씀에 삶으로 순종해서 더 굳건해지기” 원합니다.
2. 성령의 능력에 관해 앎을 넘어 삶으로 체험하려면, 나부터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7절에서 “주님께서 연약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두려움과 근심을 이기게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단지 사도들만 잘 먹고 잘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성령의 능력을 삶으로 체험해서, 땅끝까지 이르러 모두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라! 도전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사도들이 신실한 은혜의 통로가 되었을 때, 성령님의 능력은 더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이 “은혜의 통로가 되어 복음을 전할 때마다, 모든 영혼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주의 백성이 주변 모두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하기에, 더 강권하여 성령을 받아라!” 도전하셨습니다. 최근 “중남미 지역에서, 코로나-19의 피해가 점점 커져서, 확진자와 사망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중남미 국가의 의료 시설이 열악하고, 그 혜택을 받는 영혼도 너무도” 제한적입니다.

경제적 “빈곤으로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알지만, 먹고 살려고 일터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상황이 열악하기에, 어쩌면 신문에 보도된 확진자 수보다 몇 배, 아니 수십 배가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최근 “우리 교회는 코로나-19로 어렵고 힘든 지역 사회와 성도들을 돕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많은 분이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기도로 동참해” 주셨습니다. 솔직히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최근 저는 우리가 섬기는 선교지의 아픔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도 실직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프고 힘든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직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고 불편하지만, 선교지 사람들은 생사가 갈리는 어려움에 직면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힘들고 어려운 우리에게 이처럼 선교지 소식을 반복하여 듣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관심하지 말고 “손을 펴고, 마음을 열라는 도전”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브라질, 페루, 온두라스, 태국은 미국과” 다릅니다.

특히 “브라질은 미국 다음으로 확진자가 많고, 아마존 원주민의 경우는 그 상황이 훨씬 더” 참혹합니다. 아파도 “코로나-19인지 모르고, 병원에도 못 가고, 병원에 가도 복도에서 사망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페루와 “온두라스, 태국도 악화일로이기에, 나아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많은 “선교사가 코로나-19로 인해 지원이 끊겨서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입니다. 지금 “우리도 힘들지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손을 펴야!” 합니다.

성령님 “말씀에 순종해서 손을 펴면, 성령께서 우리를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소아시아와 유럽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성령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성령님과 동행하며, 가족 모두를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위대한 영적 거장은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며, 신실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많은 생명을” 살렸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항상 더 연약한 곳, 살려야 할 곳, 은혜가 필요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부족해도 “우리 각자가, 우리 교회가! 성령님의 능력을 전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어렵지만, 선교지를 돕기 위해, 각 구역과 개인이 마음을 열고 손을 펴 주시기” 원합니다. 당회는 “교인과 각 구역이 믿음으로 손을 펴면, 이를 네 등분해서 전반기 선교비와 함께 브라질과 페루, 온두라스와 태국! 네 지역을 섬기기로” 했습니다. 과거 “내가 복음을 모를 때, 성령께서 누군가를 움직이셔서, 내게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은혜의 통로가 되어서,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다시 누군가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의 통로가 되고자 결단하면, 하나님께서 나는 물론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회복과 치유,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 강림 주일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앎이 아닌 삶으로 전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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