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사막을 걷는 중, 아들이 불평을” 합니다. “목마르고 너무 힘들어요!” 아버지가 “그래도 좀 더 가자! 얼마 안 가면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올 거야!” 토닥였습니다. 그렇게 “부자가 계속 걷는 중, 무덤이 나오자, 아들이 또” 불평합니다. “저것 봐요! 저 사람도 우리처럼 지쳐서 죽었을 거예요!” 이에 “아버지가, 무덤은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다는 희망의 증거야! 마을이 없으면 무덤도 없는 거야!”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 중 누구의 모습과 더” 유사합니까?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 혹자는 부정적인 것만 보고 듣고, 혹자는 긍정적인 것을 보고 들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돌아보면, 어렵고 힘든 사막과 풍랑의 시간도 있었고, 평안과 번영을 누린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코로나-19는 마치 비와 바람 파도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거대한 풍랑처럼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불행히도 “연약한 인간은 인생의 풍랑을 홀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인생의 풍랑과 사막을 잠잠하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에 “우리는 눈앞의 상황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 들으며 어려운 풍랑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사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 당시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벳세다에 도착해서, 너무도 피곤한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막 6:31절에서, 주님은 너무 바빠서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던 제자들에게 잠깐 쉬라! 말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무리가 주님을 찾아와서 그나마 잠시도 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조금도 쉬지 못한 채, 오병이어로 남자만 5,000명인 무리를 위해 또 봉사해야!” 했습니다. 또한 “봉사가 끝난 후, 주님은 무리가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하자, 제자들을 재촉하여 현장을 떠나게 하셨고, 그렇게 쫓기듯 떠났는데, 설상가상으로 풍랑까지 만났던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지쳤고, 주님도 없이 풍랑을 만났기에 참 힘들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민자의 “삶은 매일 전쟁이고, 잠을 줄이며 2~3개 일을 해야 할 정도로” 고됩니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19는 우리 삶에 거대한 풍랑이 되어, 감당할 수 없는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하루에 수만 수천이 감염되어 죽어가는 속수무책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치료제와 백신 개발은 요원하고, 이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끝나면 어떻게 될지, 정말 괜찮아질지, 두렵고 답답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풍랑을 만난 제자처럼 힘든 우리에게, 주님께서 강하고 자신 있게” 말씀합니다.

“내니!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코로나-19의 “위세가 클수록, 연약한 인간은 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 위기는 “과학과 의학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와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힘들고 어려운 풍랑을 어떻게 극복할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 감당하기 어려운 풍랑 앞에서 우리는 세상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피곤하고 힘든 제자들을 재촉하여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기에, 제자들만 풍랑을 만나서 고군분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밤 사경, 새벽 3~6시 정도로,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어두웠습니다. 모든 “어려움이 한꺼번에 몰려 왔기에, 제자들은 풍랑 중 살기 위해 힘겹게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본문 48절에서, 주님은 풍랑으로 힘들어하는 제자들 옆을” 지나셨습니다.

당시 “상황이 너무 열악해서, 제자들은 주님을 유령으로 오해했지만, 그래도 주님을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특히 “본문 50절에서 보다, 에이도는 자각하다. 알아차리다!”란 뜻입니다. 엄청난 “풍랑 중, 두려움으로 소리쳤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에이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보았기에, 그들은 주님의 도움으로 풍랑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삶의 풍랑 중, 무엇을 바라보는가? 이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연약한 인간은 풍랑을 만나면, 부정적인 것, 나 위주로만 매사를” 바라봅니다.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현상에 빠져서, 쉽게 포기하고 낙담하며” 좌절합니다. 지금 “코로나-19는 정말 쉽지 않은 풍랑이지만, 이 또한 분명히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멀리, 더 온전한 것보다 눈앞의 코로나-19만 바라보며 불안해!” 합니다. 현실이 “답답하고 지루하니까, 생각과 시각도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답답할수록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좀 더 멀리 좀 더 온전한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지혜로운 “영혼은 눈앞의 현상이 아니라 정말 바라봐야 할 본질을” 봅니다. 물론 “코로나-19가 큰 풍랑이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이는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훗날 우리는 이를 웃으며 추억할 것”입니다.

아람이 “도단 성을 포위하여 엘리사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를 본 “게하시는 크게 두려워하며, 이 사실을 엘리사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전혀 요동하지 않았고, 기도로 게하시의 눈을 열어” 줍니다. 게하시의 “눈이 열리고 보니, 하늘의 수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아람 군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당시 “엘리사와 게하시는 같은 시간, 장소, 상황에 있었지만, 눈앞만 보는 태도와 더 온전한 것, 핵심과 본질을 보는 시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게하시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두려워 떨었지만, 본질을 본 엘리사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코로나-19 풍랑 중, 우리가 현상과 상황이 아닌 하나님을 보라!” 도전합니다. 이 풍랑을 통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함을 바라보고 살아가라!” 도전합니다. 에콰도르 “아우카 족 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짐 엘리엇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은 절대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푸에르토리코 “국립미술관 입구에는 노인과 여인이란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많은 “방문객은 검은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젋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불쾌해” 합니다. 게다가 “노인과 여인이 부녀관계임을 알면 더 경악하지만, 그림의 내용을 알면, 큰 감동을” 받습니다. 노인은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인데, 고문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산이 갓 지난 딸이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부끄러움 없이 가슴을” 풀었습니다. 이 그림의 “본질은 부녀간 아름다운 사랑, 애국심이 가득한 숭고한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내용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엄청난 “풍랑 중, 연약한 인간이 비본질만 보면 넘어지지만, 본질을 보면 풍랑을 이길 힘을”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엄청난 풍랑 속에 살아갈수록! 더더욱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 “시각이 더 멀리, 더 깊어져야!” 합니다.

지금 “비록 어렵고 답답함이 크고 깊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 풍랑을 이긴 후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풍랑에 빠진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주간을 “시작하며 코로나-19는 진정될 기미가 없고,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더 주님만 바라보고 이 풍랑을 극복하기” 원합니다.

2. 감당하기 어려운 풍랑 앞에서 우리는 세상 소리 듣지 않고 하나님 음성 듣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리적으로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보다 무려 212m가 낮은 지역에” 있습니다. 마치 “절구 밑바닥 같아서, 기온 변화가 극심하고, 풍랑으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풍랑이 일면 “빗소리와 바람 소리도 커지고, 생존을 위해 노 젓는 것이 더 어려웠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주님을 유령으로 보고 소리쳤기에,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엄청난 풍랑이 일고, 힘들고 어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놀랍게도 “제자들은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안심하라! “다르세이터는 기쁘다, 즐겁다, 용기내다.”란 뜻입니다. 문법상 “현재 명령형이기에, 한 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행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도 계속 용기를 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풍랑 중 “제자들은 이처럼 주님 말씀을 들은 후, 비로소 풍랑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 “코로나-19도 힘든 데, 방송과 정부의 발표가 다를 때가” 많습니다. 때로 “언론과 방송이 너무 많은 정보를 제공해서, 오히려 우리 두려움을 부추길 때도” 많습니다. 또한 “정확하지 않은 거짓 정보, 그릇된 소식도 큰 문제”입니다. 게다가 “많은 분이 잘못된 정보, 다 알고 있는 정보를 얼마나 열심히 타인에게 전하는지!” 몰라요!

어쩌면 “당분간 전화기를 끄고, 정보를 차단하면, 불안감이 더 감소 될지도” 모릅니다. 연약한 “인간은 반복해서 무엇인가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고, 정말 그렇게 된다고 확신”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매일 유사한 뉴스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집중해서 들어야 할 때”입니다. 실제로 “세상 뉴스는 우리를 풍랑에서 구할 수 없지만, 말씀은 나를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주님의 말씀과 사역 모두를 생각나게 하고,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풍랑 중, 정말 들어야 할 음성은 성령님의 음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소식은 “불안과 두려움을 주지만, 하나님 음성은 소망과 승리를 주기 때문”입니다. 범죄 한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소리가 그 마음에” 들렸을까요? 어쩌면 “탕자 자신도 너는 염치도 없다! 어떻게 돌아가? 부정적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도 “저렇게 바보 같은 인생이 어디 있어! 조롱하고 비난했을지” 모릅니다.

집에 왔을 때! “어쩌면 종들도 뒤에서 욕했을지 모르고, 형은 대놓고 탕자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인생의 풍랑을 이기고 다시 둘째 아들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괜찮아! 잘 왔다! 너를 기다렸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풍랑 중 “세상은 이기적이고 악하기에, 절대로 내게 호의적이고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어려운 풍랑을 이길 수” 있습니다.

풍랑이 심할수록 “우리가 세상과 악한 영의 부정적, 비관적 소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 우리를 살릴 수 있기에, 우리가 그 음성에 더 귀 기울여야!” 합니다. 183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너무도 작고” 병약했습니다. 의사도 “아이가 약해서 얼마 못 살 것이다. 말했고, 실제로 아이가 자라며 잔병치레도”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아이가 병약해서 수업받기가 힘들다는 평가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다!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을 들으며 아이를 키웠고, 하나님께 아이를 온전히” 맡겼습니다. 아이도 “어머니 신앙을 본받아, 낙심하지 않고 말씀 안에서 풍랑의 삶을” 이겨나갔습니다. 훗날 “이 아이가 커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고, 세계적 재벌이 되어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모든 재산을 내놓았고, 이것이 훗날 노벨상으로 제정”되었습니다.

바로 “알프레트 노벨의 이야기로, 풍랑 중 무엇을 들어야 할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연약한 “인간은 선한 것을 들으면 선하게 되고, 악한 것을 들으면 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랑을 만날수록! 더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시 119: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 말씀합니다. 고난 주간을 “시작하며, 한주도 말씀에 귀 기울여서, 풍랑을 이기고 승리하시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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