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난한 가정에서, 누나가 남동생 세 명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누나가 갑자기 사망했고, 시력을 잃은 장남이 동생 둘을 보살펴야!” 했습니다. 이에 “장남은 동생들을 살피기 위해 시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 대답은 NO”였습니다. 상황이 “너무도 절망적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시각장애인 장남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훗날 한국인 최초로 백악관 차관보까지 역임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강영우 박사 이야기인데, 그의 책 ‘꿈이 있으면 미래가 있다.’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시력을 달라는 절박한 기도에 ‘NO’했던 하나님께서 서울에서 워싱턴까지, 백악관 차관보까지, 지난 45년을 복되게 인도하셨다.” 찾아보면, “당시 미국에 강영우 박사만 한 인물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절망 중에도 믿음을 지킨 강영우 박사의 인생을 풍성하게” 채우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풍족할 수 있고, 생각지 않은 고난과 어려움으로 힘들 수도” 있습니다. 특히 “고난의 원인이 내 죄와 허물일 수 있고, 최근 코로나-19처럼 외적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려울 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나오미는 “10년 전, 더 풍성하려고 베들레헴의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했지만, 불행히도 남편과 아들 둘을 모두” 잃었습니다. 특히 “본문 21절은 귀향한 나오미의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10년 전 “모압으로 이주할 때, 나오미는 풍족했지만, 지금은 너무 힘들고 어려운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선민이 철저히 외면하는 이방인 며느리뿐, 아무것도 없이” 돌아왔습니다.
그 이름이 “희락과 즐거움, 행복을 뜻했던 나오미가, 나는 마라야!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마라는 “괴로움과 슬픔, 쓰라림을 뜻하는데, 귀국 때 나오미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최근 “우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두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삶은 풍성한 나오미였는데, 점점 괴로움과 슬픔 많은 마라로 나빠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고난이 지나가겠지만, 이제 다가올 경제 불황과 그 회복 과정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우리가 이미 지나간 일! 나오미 시절만 붙잡고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 현실이 마라임을 인정하고, 마라에서 다시 출구를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얼마 후! 우리는 지금의 어려운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로 회복되겠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중에도, 하나님 백성답게 지금의 마라와 같은 삶에서, 풍성한 나오미로 가는 바르고 신실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마라의 삶을 이기고 나오미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두려움과 염려보다 주어진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미는 10년 전보다 경제력과 외모, 동행한 인물까지 전부다” 달라졌습니다. 비록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살아갈지! 막막함 그 자체”였습니다. 실제로 “나오미가 귀향 후! 할 수 있는 일은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출구 없는 삶 앞에서, 그 염려와 두려움이 얼마나 크고” 암담했을까요? 당시 “가장 밑바닥 삶에 직면한 나오미가 얼마나 비참하고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그러나 “나오미와 룻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룻은 마라의 삶을 인정하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하겠다!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구체적으로 “룻은 가만히 있지 않고, 남의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습니다. 심지어 “식사 시간과 휴식을 제외하고, 종일 허리 굽혀 이삭을” 주웠습니다. 그렇게 “마라의 삶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기에, 둘의 삶은 점점 나오미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우 중 많은 분이 가게 문을 닫고, 일을 못 해서 참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심중에 “어떻게 살아갈까?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염려와 두려움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결같이 염려와 두려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말씀합니다. 비록 “과거 내가 했던 일을 못 하지만, 오히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어쩌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해도, 지금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가만히 “넋 놓고 있기보다 믿음과 소망으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룻은 “베들레헴의 언어와 문화가 생소해서, 매사가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룻이 절망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믿음과 소망으로 할 일을 찾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삶을 넉넉히” 채우셨습니다.
놀랍게도! “보아스와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룻에게 젖 먹이는 은혜도” 채우셨습니다. 마침내 “이방 여인 룻이 다윗과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은혜까지” 채우셨습니다. 마라의 “시간을 보내며, 염려와 두려움으로 위축되어 살지! 아니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지!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마라의 삶에서 전후좌우가 막혔다면 위가 열려 있기에, 더 철저히 하나님 바라보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행해야!” 합니다.
17세에 “형들에게 노예로 팔린 요셉의 삶은 마라”였습니다. 언어와 “문화도 다르고, 버려진 상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래도 “요셉은 위를 바라보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고, 모진 고생을 이기고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마라의 “삶에서 위를 보고, 해야 할 일을 찾은 요셉은 모든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마라! 염려와 두려움에 빠져 낙심하는 것이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코로나-19는 우리 시각과 삶의 지경을 더 넓혀주는 중대한 삶의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에서, 다시 새로운 도약으로 이끄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마라가 나오미가 되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 선한 일을 찾아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 모처에서 강연을 마친 후, 한 여인이 상담을” 청했습니다. 여인은 “저는 이제 자살하려 합니다. 도저히 더는 못 살겠어요! 흐느껴” 울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흐느껴 우는 여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제안합니다. “먼저! 인도 캘커타에 와서 한 달만 생활해 보고, 그 후에 다시 대화 나눠요!” 여인은 “테레사를 따라 캘커타에 가서, 기아와 절망에 빠진 수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그들을 돕는 중, 자살을 결심했던 자신의 연약한 삶이 부끄러웠고, 살고 싶은 열정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생의 막다른 골목! 마라에 섰던 여인이 다시 나오미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삶에서 “심은 대로, 뿌린 대로 열매를 거두는 것은 불변의 법칙”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렵지만, 염려와 두려움의 씨를 뿌리는 삶과 위를 바라보고 할 일을 찾아서 다시 소망과 믿음의 씨를 뿌리는 삶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힘든 마라의 때지만,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찾아서 나오미의 삶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가 되려면, 서로를 사랑하고 챙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과부가 된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왔지만, 이들에게 약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누구도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정착하도록 돕고 마음 써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다행히 둘은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며느리 “룻은 시모 나오미를 존경했고, 시모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진심으로” 아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선민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지혜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젊은 룻은 시모를 위해 직접 수고하고 헌신하며,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만일 “마라의 삶을 살아가며, 고부간의 갈등이 깊었다면, 룻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사람은 항상 자기 위주, 내가 먼저인 연약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마라의 어려움을 겪을 때! 나만 챙긴다고 절대로 내 삶이 나오미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마라의 삶일수록! 주변 사람을 더 사랑으로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이 “내 가족과 구역 식구, 또는 주변의 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마라를 살아갈 때, 서로 사랑하고 챙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마라 중에도 “서로 사랑하고 챙길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2절은 “두 과부가 귀향할 때, 시기적으로 보리 추수가 시작할 때라!” 말씀합니다. 만일 “보리 추수기가 아니라 보리 씨를 뿌리는 시기였다면, 룻이 떨어진 곡식을 주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서로 돕고 사랑하는 나오미와 룻을 향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이었습니다. 또한 “본문 2:3절은, 룻이 우연히 보아스 밭으로 갔다!” 말씀합니다. 놀랍게도, “이는 우연이 아니라, 서로를 챙기는 두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이었습니다. 이처럼 “나오미와 룻은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 예비하신 복으로 마라의 삶을 이겨” 나갔습니다. 문제는 “나오미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챙기지 못하는 이기심에”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 일로 큰 망신을 당하고, 자녀 간 골육상쟁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어서, 다윗은 깊은 마라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를 버리고 외면하지 않았고, 더 깊이 챙기고” 보살폈습니다. 밧세바도 “마라의 시간이었지만, 다윗의 배려와 사랑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다윗과 밧세바 둘 다 마라의 시간이었지만, 서로를 챙기고 아껴서, 지혜의 왕 솔로몬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마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인을 향한 기독교적 내리사랑이” 필요합니다. 내리사랑은 “부모가 자녀에게, 형과 누나가 동생에게 베푸는 사랑을” 뜻합니다. 실제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내리사랑”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내리사랑은 은혜가 깊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마라의 때, “구역장은 영적인 내리사랑으로 구역원을 진심으로 더 챙기고 섬겨야!” 합니다.
마라의 때 “교역자는 영적 내리사랑으로 우리 자녀를 더 챙기고 섬겨야!” 합니다. 세상은 “마라의 때, 사재기 등, 나만을 위한 준비로 많이” 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내리사랑으로 서로를 돌보고 섬길 때,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이 더 큼을 믿어야!” 합니다. 아이가 “혼자 밥 먹는 것보다 엄마가 챙겨주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처럼 “마라의 때, 내가 나를 챙겨서 얻는 복과 하나님께서 타인을 챙기는 삶에 주시는 복이 어떻게” 같겠어요?
마라의 때! “힘들고 어려운 영혼을 위한 중보기도, 사랑과 배려가 코로나-19 위기를 더 속히 극복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어떤 “형제가 함께 농사를 지어 추수한 후, 그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은 동생이 갓 결혼해서 쌀이 더 필요할 거야! 동생은 형이 가족이 많으니 쌀이 더 필요할 거야!” 그래서 “서로 밤에 몰래 쌀을 형제의 창고에 옮겨” 놓았습니다. 아침에 “보니, 밤새 쌀을 옮겼는데, 쌀이 전혀 줄지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이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로, 세종 때, 충남 예산에 살았던 이성만, 이순 형제에 관한 실화”입니다.
훗날 “이 이야기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라면 광고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마라의 위기는 “홀로 이길 수 없고, 서로를 진심으로 챙기고 사랑해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힘들수록 “우리가 하나님 은혜를 덧입어 기독교적 내리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마라의 삶을 살아가지만, 서로 돕고 사랑하면, 하나님 예비하신 풍성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주도 “힘들수록, 서로 더 챙기고 섬겨서 나오미의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