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는 “11월 중순부터 던져니스 크랩 가격이” 떨어집니다. 한 번은 “던져니스 크랩을 사서 귀가 중인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게를 찔 때, 맥주를 넣으면 잡내가 없어지니, 맥주를 사 오세요!” 무심코 “알았다! 답했지만, 막상 맥주를 어떻게 사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게다가 “맥주를 찾고 계산대에 섰는데, 저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당시 “집 주변에 한국인과 교회 성도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맥주를 샀지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손에 땀이 흥건할 정도”였습니다. 이유는 “목사가 맥주를 사는 것이 비상식적이고, 목사는 달라야 하는데,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떻게 하지! 누가 보면 뭐라고 설명하지! 걱정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세상과 다른 삶,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함을 잘” 압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많은 기독교인이 세상과 다르기보다, 오히려 세상보다 세속적으로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아람 왕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하려 계획을 세울 때마다, 매번 실패”했습니다. 당시 “엘리사가 아람 왕의 전략을 미리 알고 다 막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람 왕은 북이스라엘보다 먼저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성을” 에워쌉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엘리사 모두에게 큰 위기였지만, 궁극적으로 북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엘리사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엘리사가 위기 중에도 세상과 다른 시각, 구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참모습! 그 신앙과 인격은 평탄할 때가 아니라, 위기에 직면해 보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위기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있습니다. 레 11:45절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합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된 모습, 세상과 다른 관점과 태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의 문제는 세상과 구별되고 다른 모습, 거룩함을 잃고 살아감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을 봐도! 세상과 너무 유사하고, 세상보다 더 세속적일 때도” 많습니다. 교회가 “거룩함으로 세상을 주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주도할 때가 더” 많습니다. 성도 중 “세상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다!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많지!” 않습니다. 그 결과 “교회와 신앙인은 더 큰 위기에 빠지고 비판과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세상이 교회와 성도를 비판함은 세상과 다른 거룩함을 보여달라는 요청”입니다.

특히 “세상이 악하고 위기가 클수록! 교회와 성도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부터 “위기 중에 거룩하면 세상이 누리지 못하는 은혜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위기 중에도 세상과 다르게! 하나님 은혜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위기 중,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으로 승리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살펴봅시다.

1. 기독교인은 위기 중에도, 세상이 못 보는 것을 보고 살아가는 구별 됨이 있어야 합니다.

아람 왕이 “말과 병거, 많은 군사를 보내서 엘리사가 있는 도단성을” 에워쌌습니다. 당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이른 아침! 이를 먼저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당시 “게하시는 너무 놀랐고, 깊은 위기의식으로 ‘이제 다 끝났다!’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우리와 함께 한 자가 더 많다! 두려워하지 말라!” 강조합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기도로 게하시의 어두운 눈을 밝혀” 줍니다.

그 결과 “게하시는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하나님 군대를 보고, 더는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엘리사와 게하시는 같은 장소, 시간, 상황에 있었지만, 세상을 보는 영적 깊이가 너무도” 달랐습니다. 엘리사는 “위기 중! 세상이 못 보던 것을 보았지만, 게하시는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보았기에 절망에 빠졌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도 “이 땅을 살면서 생각지 않은 위기를 만나고, 병도 걸리고, 세상과 똑같은 아픔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세상과 구별됨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살아감에” 있습니다. 세상은 “상식과 과학의 눈, 통계와 분석에 근거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어떤 위기가 다가오면, 하나님 의도는 무엇일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뜻에 맞을까?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더 깊게 보는 영적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위기 중에 세상이 못 보는 것을 보려면, 다른 무엇보다!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엘리사와 “게하시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믿음의 깊이에” 있었습니다. 본대로 “판단하던 게하시가 믿음의 눈이 열린 후, 위기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악할수록! 더 깊게 보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베다니에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가 병들자, 주님께 속히 와 달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틀을 더 유하셨고, 마침내,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 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세상이 아닌 믿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려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은 위기 중,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엄청난 체험을” 합니다. 당시 “세상은 나사로의 죽음을 일반적인 죽음으로 보았지만, 주님은 이를 하나님 영광을 위한 죽음으로” 보았습니다. 이처럼 “위기 중, 믿음의 눈이 열린 후! 마침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관점을 가진다면, 위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절망과 좌절, 낙담과 포기가 아니라, 소망과 비전을 주고, 새 힘을” 줍니다. 믿음은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불평과 원망을 감사로 바꾸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려면, 항상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길, 선한 길로 이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의 유년시절에 관한 평가는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주의 산만, 과다활동, 충동성으로 인한 학습 장애, 학교생활에 부적합한 아이!” 마침내 “학교를 나와야 했지만,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 낸시는 세상이 아닌 믿음의 관점으로 에디슨을 양육”합니다. 세상과 “다른 믿음의 관점으로 에디슨을 보니, 아이에게 엄청난 가능성이 있었고, 점점 세상과 다른 탁월함이 끊임없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관점으로 성장한 후! 에디슨은 특허 1093개, GE의 창업자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평소에 못 보고 안 보이던 것을 본 후, 믿음이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더 깊어져야! 세상과 달라야! 비로소 남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업의 성공도 “믿음의 눈으로 세상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직장에서 “남이 못 보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승진과 성공이” 이어집니다. 나아가서 “삶의 위기가 찾아올수록! 악한 세상과 구별된 믿음의 눈으로 살아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되는 데, 더더욱 세상과 구별된 믿음의 눈으로 더 깊게 봄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기독교인은 위기 중에도, 항상 살리고 세우는 곳에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사는 침공해 온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한 후, 사마리아로 이끌어” 들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안방에 들어온 아람을 큰 어려움 없이 쉽게 몰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에게,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반복하여” 물었습니다. 이는 “충분히 아람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빨리 몰살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엘리사가 허락했다면, 아람 군대는 전멸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본문 22절에서,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말합니다. 비록 “자신과 국가를 힘들게 한 원수지만! 그래도 먹이고 살려야 한다!” 주장했습니다. 이에 “본문 23절은, 위기 중에도, 북이스라엘이 하나님 방식대로 아람을 살린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했다.”

오늘날 “세상은 약육강식,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이 사고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게 유익이 되면 함께하고, 불필요하면 주저하지 않고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또한 “사려 깊지 않은 말로 가까운 지인에게 평생의 상처를 주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심지어 “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안에서 힘들어하고 지쳐가는 영혼도” 많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는 사람을 살리고 세우기보다, 넘어뜨리고 상처 주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아프고 상처받은 영혼을 살리고 세우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주께서 나를 세우고 살리지 않으셨다면, 누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어요? 구체적으로 “우리가 타인을 살리고 세우려면, 더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본문 17절은, “절망에 빠진 게하시를 세울 때! 엘리사가 기도했다!” 말씀합니다. 본문 18절에서 “엘리사는 자신을 공격하러 온 아람 군대의 눈이 어두워지도록” 기도했습니다.

본문 20절에서 “사마리아에서 아람 군대가 눈을 뜨도록, 역시” 기도했습니다. 본문에서 “엘리사가 주변 누구와도 다르게! 위기 중 승리했던 이유는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기도로 “못 보던 것을 보았고, 기도로 죽이고 멸하려는 것을 살리고 세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치명적 약점은 기도의 능력을 알면서, 실제로 기도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깊은 기도는 “하나님 계획을 알고 가정과 직장,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깊은 기도는 “비판과 정죄보다 이해하고 품어주며 살리고 세우는 힘이” 됩니다. 깊은 기도는 “남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나를 먼저” 바꿉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기도할 때! 특이한 환상을 체험”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온갖 부정한 짐승이” 가득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율법에 부정한 것을 잡아먹어라! 명령까지” 하십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고넬료를 살리고 세우기를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를 살리고 세우려고, 베드로의 깊은 기도 중에 환상까지 보이며 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못 보는 것을 보려면! 주변의 사람을 세우고 살리려면, 기도가 깊어져야!” 합니다. 얼마 전! “이용걸 목사가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활동이 다 예배다.”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사로, 식당에서 봉사하기 전, 안내로 섬기기 전, 방송실에서 일하기 전, 예배와 찬양 전, 회의에 참석하기 전! 기도로 준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운전하기 전, 누군가에게 말하기 전,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하기 전! 먼저 기도로 임할 때!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녀가 “등교하기 전! 잔소리보다 아이를 붙들고 짧지만 간절하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우리 아이 앞에, 아이 곁에, 아이 뒤에, 아이 아래에, 아이 안에, 아이 위에 계시길 기도해” 주세요! 짧게라도 “남편이 아내를 위해, 아내가 남편을 위한 기도가 가정을 세우고 살리는 힘이” 됩니다.

우리 “삶이 바쁘고 분주해도! 기도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분주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민자가 뉴스와 TV 드라마도 보고, 할 일은 시간 내서 모두”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는 많은 변명과 핑계로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깊은 기도가 “나와 가족,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거룩한 능력임을” 기억합시다. 곧 “시작되는 사순절에도 깊은 기도로 세우고 살리는 삶,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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