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블룸하르트 목사는 생전에 주님의 재림을 볼 것이라는 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항상 마차를 대기한 채, 주님이 재림하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블룸하르트 시대와 오늘까지도, 주님의 재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재림이 분명히 있지만, 우리는 재림에 대한 인식과 준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재림을 잊어버리고, 부인하고, 초대교회의 신화와 전설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재림에 관련된 예언이 무려 1,518번이나” 나옵니다. 또한, “구약에서 주님의 초림에 관한 예언이 총 456개인데, 주님의 성육신으로 456개 예언 모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재림 관련 구절 1,518개도 당연히 성취될 것”입니다. 롬 13:11 절은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대림절이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임을 알지만,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는가?”에 있습니다.

무작정 “기다림보다, 바르고 신실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기다려야 응답과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 25장은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종말에 관한 비유가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마태는 “세 비유를 반복하며, 재림이 분명히 있기에, 성도라면 누구나 주님을 바르게 말씀대로 기다려야 함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결혼식은 해가 진 후 시작되었고, 신부의 들러리가 등을 밝혀 신랑을” 맞았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열 명의 처녀 중 절반은 지혜롭고 절반은”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이 늦게 도착했는데, 절반은 신랑을 맞고, 절반은 신랑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다시 오실 주님을, 열 처녀는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를” 뜻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10은 완전수로, 이는 모든 성도가 주님을 기다려야 함을” 도전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본문에서 절반은 주님을 맞을 준비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 항상 연말에”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을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때지만, 현실은 주님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 24:36절은,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말씀대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부족해도 “말씀대로 주님을 기다리는 영혼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지나가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뿐인 주님의 오심과 재림을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신랑 되신 주님을 어떻게 기다려야 지혜로울지!” 살펴봅시다.

1. 영적으로 준비하며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열 처녀가 모두 신랑을 기다렸고, 등을 가지고 있었고, 졸았던 모습까지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로” 갈렸을까요? 열 명 “모두 등과 기름은 준비했지만, 어리석은 다섯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신랑이 늦게 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본문 4절에서,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까지” 준비했습니다.

특히 “본문 10절에서, 어리석은 다섯이 급하게 기름을 사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는 “비록 신랑이 늦었지만, 어리석은 다섯은 기름 살 돈이 있어서, 충분히 신랑을 잘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서, 결혼식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본문 12절에서, 늦게 온 신랑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냉정하게” 외면했습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대림절 말씀을 통해, 주님의 오심과 재림을 기다려야 함을 잘” 압니다.

문제는 “재림의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과 그 주님을 영적으로 맞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신실한 “기독교인은 지혜로운 분별력으로 매사를 꼼꼼하게 잘 준비하며” 삽니다. 반면에 “분별력을 상실해서 영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낭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리려면 철저하고 꼼꼼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철저하고 꼼꼼하게 준비할수록, 주의 재림을 더 확실하게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열 중 어리석은 다섯만 영적 준비가 안 되었는데, 어쩌면 우리 중 영적 준비가 안 된 경우는 절반이 아니라 대다수일지” 모릅니다. 교회에 “나와도 많은 분이 주님의 재림에 관해 무관심하고, 주님의 재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랑 되신 주님을 꼼꼼하고 바르게 맞으려면, 지금부터 영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주의 재림 시기를 모르기에, 지금부터 잘 준비해야 함을” 도전합니다.

그러나 “대다수가 나중에, 어떤 징조가 있으면 준비하겠다! 말하고, 혹자는 재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영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할 수” 없습니다. 정탐꾼 “12명 중 10명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여 선민이 밤새”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 신앙을 책망하시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다시 가나안에 올라가겠다!” 결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의 가나안 입성 준비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지금 “바르고 꼼꼼하게 준비하지 못해서, 출애굽 1세대는 40년을 방황해야!” 했습니다. 지금 “바르게 준비하지 못해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한 발도 디딜 수”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 명령이라면, 꼭 필요하다면, 바로 지금 준비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물쭈물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묘비 문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가 있을 때! 더욱 신실하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함은 나중으로 미룰 수 없고,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와 변명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 “한중일 삼국은 제국주의 위협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1868~1873년, 5년간 무려 1,000여 명의 유학생을 서구에” 보냈습니다. 중국은 “1872년, 120명을 서구로 유학 보냈지만, 이내 곧 소환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일본에 극소수의 유학생을 보냈을 뿐, 서구 유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문제는 “아시아 삼국 중, 지금부터 깨어서 미래를 준비한 일본은 아시아 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급부상했습니다. 반면에 “중국은 서구에 무릎을 꿇었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고, 남는 것은 상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바쁜 이민자가 지금 재림을 준비함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지금 “주의 재림을 준비하려면, 시간과 정성, 물질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영적으로 준비하는 영혼은 절대로 신랑 되신 주님을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 “준비하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주도! “신랑 되신 주님의 오심을 말씀대로 준비하는 신실함이 있기” 원합니다.

2. 영적으로 깨어서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5절은 “열 처녀 모두가 신랑이 더디 오므로 졸며 잘새” 말씀합니다. 여기서 “졸다, 원어 에카듀톤은 단순히 자는 것을 넘어 영적으로 죽어 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다섯은 깨어 있어야 하고, 어리석은 다섯은 졸아야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 “모두가 자다 깼지만, 다섯은 신랑을 맞고, 다섯은 신랑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열 처녀 모두가 다 졸았지만, 지혜로운 다섯은 다시 영적으로 깨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다섯은 영적으로 여전히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다섯은 영적으로 잠들었기에, 돈이 있었어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 13절에서, 결론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운전 중 졸면 차가 어디로 가는지, 도로를 이탈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차는 “움직이지만, 졸고 있기에 너무 위험하고, 자칫하면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지! 여부는 참으로 중요한 도전”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말씀이 들리고, 그릇된 신앙을 회개하여 고칠 수 있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고, 길지 않은 인생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연약한 우리도 지혜로운 다섯처럼, 항상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 중 “예배 때, 잘 조는 분이 시편 127:2절을 인용하며, 자신을 합리화할 때가”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연약한 “인간은 예배 중 정말 피곤해서 졸 수 있고, 피곤해도 예배에 참석해서 졸면, 그나마 다행이고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조는 분은 예배의 태도를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특히! “조신 분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큰 소리로 인사할 때! 참 기가!” 막힙니다.

본문에서 “기름은 등을 밝힐 때, 병자의 이마에 바르고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귀한 손님을 환영할 때” 사용했습니다. 특히 “기름은 왕과 선지자, 제사장을 세우고, 성령의 임재를 구할 때 주로” 썼습니다. 그러므로 “기름을 준비하는 삶은 성령 충만함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뜻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성령 충만을 잃으면, 너무도 어리석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께서 한 명이 나를 판다! 말씀하자, 저마다 누가 범인인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요 13:26절에서,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요 13:28절은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말씀합니다. 놀랍게도 “제자들은 주님께서 유다가 나를 팔 자다!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한 명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제자들이 주님과 같이 있었지만, 영적으로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잠들었기에,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더 깊이 잠들고” 말았습니다. 영적으로 “잠들었기에, 주님이 잡힌 후, 모두 도망가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는 9일, 사람은 12일, 개는 20일, 거북이는 500일을 안 먹고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 신앙인을 거북이 교인이라고 풍자”합니다. 영적으로 “잠들어서, 말씀을 전혀 안 먹어도 힘들지 않고, 어려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영적인 목마름이나 배고픔도 없고, 왜 말씀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라면, 말씀을 안 먹으면 배고파야!” 합니다. 삶에 “말씀이 공급되지 않으면, 목마름이 깊어서 영적으로 허덕여야!” 합니다. 문제는 “성령 충만하지 않기에! 거북이 교인이 되었지만, 이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지금 “내가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안 되는데도 내 삶이 평탄하면, 나는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는 은혜가 전혀 없다면, 역시 잠든 것”입니다. 두렵게도 “우리 중 많은 분이 성령 충만보다 성령 결핍으로” 살아갑니다. 부족해도 “성령 충만! 영적으로 깨어나면,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가 성령 충만함으로 깨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Categories: 일반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