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손양원 목사는 여수 순천 반란 사건으로,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입적했습니다. 특히 “가족의 반대가 컸지만, 이에 대한 손양원 목사의 답이 큰 감동을” 줍니다. “말씀을 지키려 신사참배를 반대했듯,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내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을 거야!” 손양원 “목사도 사람이고 아버지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아들을 잃은 아픔, 아들을 죽인 청년을 향한 원망과 미움보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손양원 목사와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다만 “하나님 사랑에 관해 자주 들어 익숙할 뿐, 내가 직접 체험한 하나님 사랑이 그렇게 깊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초대교회도 우리처럼 하나님 사랑, 부활을 통한 은혜를 모르고 넘어져” 갔습니다.

요한은 “본문 7절에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말합니다. 여기서 “알다! 원어 기노스코는 체험적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는 하나님 사랑을 듣고 배웠지만, 그 사랑이 아가페 사랑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몰랐기에, 세상의 미혹에” 흔들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사랑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하나님 사랑 밖으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진짜 기독교인답게, 하나님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이 “매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지만, 부활의 참된 가치와 능력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니, “신앙인 대부분이 부활을 이론으로만 알 뿐, 부활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최근 “우리는 코로나-19에 짓눌려서 답답함과 무기력함, 두려움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치료제가 개발되면, 확산이 줄어들면 다 회복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코로나-19를 온전히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죄인인 나를 향한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부활을 통해 주신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특히 “절망과 낙담, 좌절과 상실감이 가장 큰 바로 오늘, 부활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함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인한 상처와 아픔이 크지만, 오늘 우리는 이보다 더 큰 부활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부활로 주신 하나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하면, 코로나-19로 인한 오늘의 아픔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부활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부활의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신 사랑입니다.

본문 9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독생자는 하나뿐인 아들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본문 10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말씀합니다.

요한은 “본문 10절에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화목 제물로 보내셨다!” 말합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도 “당신의 전부를 드려서, 죄로 막힌 나와 하나님 관계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충분히 누군가를 세워서 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이지만, 독생자를 주심은 당신의 전부를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 이를 막으셨고, 대신 수양을” 준비하셨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전부를 드리려 했지만, 실제로 이삭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가장 사랑하고 존귀한 자, 사실은 당신 전부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사랑이 부활로 이어졌고, 그 부활이 죄인이 영생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부를 주고 살린 존귀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본문 11절은, 하나님께서 전부를 주신 사랑을 받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부활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누군가를 도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 “교인 대다수도 코로나-19로 인해, 힘들고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혹자는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가 밤에 출근하자, 목사님! 아내를 일 보내놓고 잠이 안 옵니다! 어려움을” 고백했습니다. 혹자는 “아픈데 병원도 못가고, 전전긍긍하며 버티기도” 했습니다. 혹자는 “일을 놓고 생계가 막막해서, 눈물로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혹자는 “양로원에 계신 부모를 찾아갈 수 없어서 마음 아파” 했습니다. 혹자는 “타지에 파병 나간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부탁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현실을 보면, 다수가 실직과 일하지 못함으로 불안이 날로 가중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 하나, 우리 가족, 우리 자녀를 챙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 전부를 주고 살린 존귀한 존재이기에, 힘들어도! 내 주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변명과 핑계로 사랑하려 하지 않음에 있지, 사랑하려면 충분히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주변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분을 실제로 도와야!” 합니다. 주변에 “목회자 사례비도 주지 못하고, 게다가 사모님도 일자리를 잃은 어려운 교회도 살펴야!” 합니다. 티넥의 “소방서와 경찰서, 시청, 주변의 병원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에 “교회는 이 어려운 때, 먼저 우리 안에서 사랑을 나누자! 결정하여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하려고 하면 방법이 보이고, 하지 않으려고 하면 변명과 핑계가 보인다.” 최근 “친구 목사가 보내준 글인데, 저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렵고 힘들어도 돕고 사랑하려 하면 방법이 보이고, 어렵다고 하지 않으려 하면 변명과 핑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섬기려는 삶에 더 큰 하나님 사랑으로 채우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은 “이론과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 인해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전부를 주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서,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 2020년 부활절 “가장 힘든 시간을 살아가지만, 전부를 주신 사랑을 받아서, 우리도 그 사랑으로 주변을 살리는 참된 부활의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2. 부활의 사랑은 죄인인 나를 살리신 사랑입니다.

본문 9절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살리려! “원어 자오는 이 땅에서 생활하다. 나아가서 믿음으로 누리는 풍성한 삶, 중생의 삶, 영생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 사랑은 이처럼 이 땅과 영생까지 철저하게 채우고도 남는 엄청난 사랑이다.” 말합니다.

실제로 “부활의 사랑은 이 땅의 삶에서 천국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죄로 “죽어야 할 존재인 우리에게 영생, 구원으로 살려”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살리심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하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 말씀하고” 운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는 내 모든 죄와 허물에 대한 값을 다 완불하셨음을” 뜻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다 사해 주셨고, 부활로 이 땅은 물론 내 죽음의 문제까지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전 15:20절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말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난 부활의 첫 열매이기에, 우리도 죽지만 부활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이처럼 이생과 영생까지도 보장받았지만, 이에 걸맞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작은 “문제에도 전전긍긍하고, 염려와 두려움으로, 아무것도 못 받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코로나-19는 “엄청난 재앙이지만, 이는 내 삶의 일부만 할퀴고 갈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깐 지나갈 어려움을, 평생 당하는 어려움처럼, 위축되어” 힘들어합니다. 힘들어도 “주님의 부활이 이미 이생과 영생까지 다 책임지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는 “이미 다 승리로 끝난 복음의 능력을 알기에, 부활의 사랑을 자꾸 의심하여 두렵게”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눈앞의 일에 함몰되어 전전긍긍하게” 미혹합니다. 2002-06- 22, “광주에서 한국과 스페인 월드컵 8강전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의 큰 삼촌 댁에서 모든 가족이 함께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외숙모님이 “준비하신 빨간 티, 빨간 두건을 두르고 가슴 졸이며 경기에” 보았습니다.

당시 “전후반, 연장까지 0:0이어서, 승부차기로 승패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한국은 “황선홍, 박지성, 설기현, 안정환, 홍명보 순으로 차서 결국 5:3으로” 이겼습니다. 당시 “한국 전체가 엄청나게 열광했고, 방송은 여러 차례 승리의 장면을 재방송하고 또 재방송”했습니다. 문제는 “몇 번은 재방송을 보며, 그래도 그 감격과 여운이 있어서 조금은” 떨렸습니다. 그런데 “재방송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면, 그 사람은 꼭 병원에 가봐야!” 합니다.

이유는 “다 이겨놓은 경기를 볼 때마다 떨린다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부활로 주신 사랑이 우리 이생과 영생을 다 승리로 예비해 놓았다!” 말씀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머리로는 이를 알면서, 실제 삶에서는 매번 이미 이긴 경기를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긴 경기라고 말씀해도, 우리는 계속 세상에 패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지난주와 이번 주가 코로나-19가 가장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활로 주신 사랑, 이생과 영생의 승리를 믿고 당당해야!” 합니다. 대하 15:7절은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말씀합니다. 지금 “세상은 고난의 정점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손을 강하게 하라! 영적으로 당당하면 내 삶과 행위에 분명한 상급이 있다!”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주신 사랑은, 나를 살린 사랑, 살리는 사랑, 살릴 사랑임을” 기억합시다.

비록 “내가 주님을 모르고 부인했어도! 십자가 사랑, 부활의 사랑은 나를 과거에도 살렸고, 지금도 살리고 있고, 미래에도 살릴 것”입니다. 그러니 “2020년 부활절! 코로나-19의 공격이 크지만,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은 “힘들고 암담하지만, 주님의 부활이 우리를 살릴 것이고, 승리하게 할 것이고, 가장 큰 은혜로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주도 “이생과 영생을 주신 부활의 사랑을 확신하고, 당당함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