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초호화 유람선 타이태닉이 침몰하여 1517명이 사망하고 706명이 가까스로 살아” 남았습니다. 당시 “승객 모두가 공포에 떨며, 곳곳에서 눈물과 한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 “윌리스 하틀리를 리더로 한 8인조 악단이 정복을 입고 연주를” 시작합니다. 무려 “3시간 동안 계속된 연주를 통해, 불안과 공포에 떨던 많은 승객이 점차 안정을” 찾아갑니다. 기록을 보면, “이들 8인조 악단의 마지막 곡은 찬송가 338장이었다고” 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특히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많은 사람이 4절 가사를 들으며 엄숙하게 이 땅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가까이 나가기 원합니다.” 엄청난 “위기 중에도 8인조 악단의 굳건한 믿음의 찬송이, 수많은 영혼을 불안과 공포에서 평안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상황과 처지에 따라 너무 쉽게 흔들리고, 심지어 믿음마저 저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만 주시는 하나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한 믿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성도의 절대적 가치임을 잊지 말아야!” 합시다. 요한은 “본문 19절에서,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말합니다. 굳세게 하다! “페이소멘은 흔들리지 않는 모습, 요동하지 않는 굳건함을” 뜻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단의 도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조차 부인”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니 개인과 교회, 주변 모두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굳건한 “믿음을 잃었기에,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을 닫았고, 자신을 책망할 것이 점점 쌓였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잃었기에, 행함과 진실함보다 말과 혀로만 형제 사랑을” 외쳤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 믿음도 견고하고 굳건하기보다, 흔들리고 요동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 “믿음을 갉아먹고 도전하는 이단의 발흥은 해결 방법이 쉽지 않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굳건하지 “못한 믿음 때문에, 많은 교회가 분쟁과 다툼으로 멍들어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책망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한 위기가 교회를 새로운 시험대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위기다! 어렵다! 이 말보다, 우리 믿음을 점검하고 더 굳건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내 믿음이 “굳건해야 내 삶과 가정, 교회, 사회가 굳건해지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믿음은 내 결단과 의지로 지킬 수 없고, 세상에서 배워서 가질 수도” 없습니다. 굳건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기에,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위기가 극심할수록! 어떻게 더 굳건한 믿음으로 승리할지!” 살펴봅시다.
1.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우리가 서로를 향해 책망하기보다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20~21절은 “책망할 일이 있어도! 책망할 일이 없으면,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씁니다. 책망하다. “카타기노스코는 적대적으로 알아서 타인의 잘못을 비난하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초대교회 성도에게, 너희가 스스로 책망할 것이 있는지 확인하라!” 도전합니다. 이는 “초대교회 성도 누구나, 자신의 모습에서 책망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 성도는 자신보다 타인을 향한 책망의 잣대가 훨씬 더” 강했습니다.
이처럼 “책망의 잣대로 매사를 판단하니, 서로 사랑하라! 주님 계명에 역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은혜를 상실하고, 굳건한 믿음을 점점 잃어” 갔습니다. 속담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 나에게는 관대하지만, 타인에게 엄격한 인간 본성을” 풍자합니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사위가 가정에서 설거지하면 딸이 시집 잘 갔다! 좋아하고, 아들이 설거지하면 며느리가 게으르다! 혀를” 찹니다.
예배 중 “내가 졸면 열심히 산 것이고 남이 졸면 믿음이 없다고” 책망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에게 엄격해서 항상 지적과 책망이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책망과 지적은 쉽지만, 누구도 책망과 지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책망은 “분쟁을 일으키며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내 믿음을 갉아먹는 해충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망보다, 형제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닫지 말고 열어야!” 합니다. 본문 17절에서, “도와줄 마음, 스플랑크나는 인간의 심장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스플랑크나는 긍휼로 많이 쓰였고, 특히 죄인을 향한 하나님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 마음은 “고집스럽고 악한 탕자에게 긍휼로 다가가서 이해하고 품어주고, 지적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이처럼 “책망은 내 믿음을 무너뜨리지만, 긍휼은 내 믿음을 굳건히” 세워줍니다.
책망은 “관계를 깨지만, 긍휼은 서로 굳건한 믿음으로 연합하고 동역하게” 이끕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지만, 누구도 바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낙향할 수밖에 없었고, 무려 10여 년간 칩거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을 향한 긍휼로 다가갔고, 함께 안디옥에서 동역을”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두 사도의 동역으로,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호칭까지” 들었습니다.
당시! “바나바의 긍휼로 시작된 동역이, 두 사도의 믿음을 더 굳건하게” 이끌었습니다. 나아가서 “안디옥 교회의 믿음과 주변 모두의 믿음도 굳건하게” 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성도는 책망보다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위기일수록! “우리 믿음을 더 깊이 점검해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른 누구보다 나부터 주변을 도와주려는 긍휼의 마음을 닫지 말고 열어야!” 합니다.
한소망 교회의 “부흥은 내가 먼저, 책망하기보다 긍휼로 다가갈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1968년 “유대인 600만을 학살한 주범, 아이히만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꼴 란즈가 아이히만 석방을 위한 대대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꼴 란즈가 “아이히만 석방을 주장한 이유는 5가지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➀ 아이히만이 죽는다고, 과거에 죽은 유대인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➁ 이제 곧 죽을 노인을 일부러 죽일 이유가 없다. ③ 하나님께서 이미 아이히만을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➃ 죄인인 우리가 누구를 당당하게 정죄할 수 있겠는가?” 당시 “꼴 란즈가 주장한 마지막 이유가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에서 이제부터라도 참사랑을 심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픈 “과거를 책망하고 정죄해서, 내가 얻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책망하고 “수모를 준다고 내 믿음이 굳건해지기보다, 오히려 나도 타인도, 모두의 믿음에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면, 내 믿음은 물론, 타인과 교회의 믿음이 점점 더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인데, 주님의 은혜로 산 내가 책망하며 살 것인가? 마음을 열고 긍휼로 살 것인가? 이는 철저하게 내 선택”입니다. 한주도 “우리가 책망보다 긍휼로 내 믿음이 더 굳건해질 수 있기” 원합니다.
2.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나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요한은 “본문 24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말합니다. 요 14:26절은 “성령님께서 항상 바른 것을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한다!” 말씀합니다. 요한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 누릴 수 있는 복을 다양하게” 말합니다. 성령님 “음성에 순종하면, 형제를 보고 도와주려는 마음, 긍휼을 가질 수 있고, 말과 혀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변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 “음성에 순종하면 진리에 속하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고, 주님의 계명도 지킬 수” 있습니다. 마침내 “죄인인 인간이 이전보다 더 굳건한 믿음 위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성령의 임재가 있었지만, 성령님 음성에 불순종해서 그 믿음이 점점” 흔들렸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니, 내 삶과 가정, 교회와 사회가 흔들리고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함을 비과학적, 비상식적으로 폄하”합니다.
문제는 “현대 과학과 상식이 준 결과가 오늘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현대 과학과 상식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과학과 “상식을 추종해서 환경 파괴가 극심하고,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피조물인 인간이 성령님 음성과 멀어지면, 재앙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하고, 다시 성령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코로나 19의 “피해가 상상을 초월하고 모두가 ‘죽겠다!'” 하소연합니다.
직접 “체감하는 경제적 손실, 계속되는 어두운 소식에 불안과 두려움이” 가중됩니다. 게다가 “나아질 기미는 안 보이고, 계속 나빠지는 모습도 참으로” 버겁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힘들고 어려운 갈등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성도는 더 성령님 음성에 집중하고, 내 믿음을 더 굳건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상식과 과학, 인간의 한계를 넘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음성이 나를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온전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에 온전하게 순종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님 “음성에 순종할수록! 내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의 기도에 환상을 통해, 고넬료 가정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모든 것이 “전부 다 부정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성령께서 이를 잡아먹어라!” 명령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 믿음으로 보면, 이는 불가능했지만, 성령님은 불가능을 통해 일하기” 원하셨습니다. 마침내 “베드로가 주님 음성에 순종함으로, 이방인에게 성령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성령님의 음성이 가장 옳기에, 사실,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무조건이란 말이 없지만, 성령님께는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위기 중에도 바른길, 해야 할 일, 금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말씀하고” 도전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세상 소리보다 성령님 음성에 순종해서, 우리 믿음이 더 굳건해지기” 원합니다. 한국인이 “중동을 여행 중, 어떤 목동이 Manah! Manah! Manah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Manah! “나를 따라오라는 말로,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정말 따라” 오더랍니다.
이에 “한국인이 목동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합니다. “내가 당신 옷과 지팡이, 신발을 신고 양을 부르면 어떨까요?” 마침내 “목동의 모습 그대로 양을 불렀지만, 한 마리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한국인은 양이 타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경우는 없는지!” 물었습니다. 목동이 “가끔 있는데, 양이 아픈 경우만 타인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 답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 때, 수많은 소리가 있지만, 모든 소리가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어떤 소리는 나를 세우고 돕지만, 어떤 소리는 나를 속이고 넘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음성은 들어야 하지만, 어떤 음성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소중한 “우리 인생에서, 위기일수록 세상이 아닌 성령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을 보내며, 내 믿음이 더 굳건해져서 더 큰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