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짐 엘리엇이 남미 에콰도르 아우카 족 선교를 위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짐 엘리엣은 결혼 1년 차! 신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우카 족을 만나자마자! 그들의 창과 도끼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보고, 선교에 대한 회의감이 들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짐 엘리엇이 죽고 이듬해! 아내 엘리자베스가 남편이 못다 한 사역을 마저 감당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아우카 족을” 찾아갑니다.

다행히 “아우카 족이 엘리자베스를 공격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른 뒤, 자신들이 짐 엘리엇을 죽였고, 그런데도 그 아내가 사랑으로 다가옴을 듣게” 됩니다. 마침내 “아우카 족 많은 영혼이 변화되었고, 특히 짐 엘리엇을 죽인 영혼 중에서 목사가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남편을 무참히 죽인 아우카 족이 왜 밉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미움과 증오보다, 복음 전파와 사랑을 선택한 신실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삶에서 “미움과 사랑은 항상 공존하는데, 무엇을 선택하는가로 그 인생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례로 “미움을 택하면 사망에 이르고, 사랑을 택하면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미움보다 사랑을 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의 삶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고, 신실했던 신앙생활이 영지주의 미혹으로, 구원의 복음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게다가 “본문 13절은, 세상이 교회와 성도를 미워하고, 이를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미워하다! “미세오는 감정적 싫어함을 넘어 실제적 적대행위를 보이며 미워하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세상을 미워하고, 공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래도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미워하고 증오하기보다, 서로 사랑해야 나와 가족, 섬기는 교회와 세상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인은 “서로를 미워해서 물리적으로 박해하고, 적대행위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쁘고 분주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할 때가 더” 많습니다. 누구나 “심중에, 타인을 향해 결례하지 않기 원하고, 상대방의 결례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성경의 교훈대로 사랑하기보다, 그저! 나 편한 대로, 세상의 상식에 맞추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성경의 교훈대로 살아가야,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영혼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말씀합니다. 미움보다 “사랑하며 살아감이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가 “신실하려면, 서로를 향한 무관심보다, 미움보다 형제 사랑의 바른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미움보다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1. 내가 사망이 아닌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미움보다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면,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형제를 미워하면, 사망에 계속 머물러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본문 15절은 형제를 미워함이 살인과 같다!” 말씀합니다. 살인하다. “안드로폭토노스는 고의적 목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한 살인을” 뜻합니다.

이는 “사람을 너무 미워해서, 마침내 그 영혼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악함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인인 인간이 형제를 미워하면, 나는 나도 모르게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요한은 누구보다 나를 위해서! 미워하기보다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강조합니다. 살면서 “내게 상처 주고, 시험 들도록 나를 아프게 하는 영혼이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상처받은 나는 그 영혼이 미워서 잠도 못 자는데, 나를 힘들게 한 영혼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자고, 잘 먹고 잘”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 다치고 은혜로 살아가려면, 미워하기보다 사랑해야!” 합니다.

실제로 “미워하기보다 사랑해야! 내가 더 큰 은혜로,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할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수확 때마다 “100배를 얻었고, 물이 귀한 곳에서, 파기만 하면 우물이” 나왔습니다. 이에 “그랄 주민이 이삭을 박해하고, 파 놓은 우물을 메꾸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그랄 주민을 미워하지 않고, 인내로 다시 우물을 팠고, 계속 묵묵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충분히 “미워할 수 있었지만, 사랑과 인내로 그랄 주민을 대했을 때! 훗날 그랄 주민이 이삭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습니다. 하나님은 “미움보다 사랑과 인내로 일관한 이삭에게 더 큰 복과 은혜로” 채우셨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중심적, 이기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아이가 “경찰에 전화해서, 자기 아빠가 30분째 싸우고 있다고” 신고했습니다. 경찰이 “왜 30분째 싸우는 데, 이제야 신고했는지! 묻자, 아이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우리 아빠가 이기고 있어서 신고하지 않았어요!”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내가 가장 우선이고, 내 유익에 맞춰 모든 일을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문제는 “무엇이 나에게 진짜 유익을 주는가? 바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내게 가장 큰 유익은 물질과 성공,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를 미워하기보다 사랑해야 누릴 수 있다!”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죄를 이기고,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미워하기보다 사랑하려면! 타인의 좋은 점을 보는 긍정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 “성도가 서로 다투고 미워한 이유는 서로 다른 점, 부정적으로 상대방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서로 긍정적인 관점으로, 장점을 보았다면, 미움보다 사랑으로 더 큰 열매를 맺었을 것”입니다.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동료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감정이 “상한 다빈치는 유다의 얼굴에 다툰 동료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볼 때마다 공개적으로! 자신과 다툰 동료에게 망신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의 얼굴을 가장 먼저 그렸는데, 더는 진전이” 없었습니다. 특히 “예수님 얼굴을 그릴 때! 전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도저히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방해 원인이 동료를 미워하고, 망신을 주려는 생각에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다시 붓을 들었을 때! 예수님 얼굴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부정적이면 “가장 먼저 내가 상하고, 내 상함이 주변에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움을 이기고 사랑하려면, 타인의 좋은 점,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유는 “아무리 밉고, 나와 달라도, 좋은 점을 찾으면,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타인이 아니고, 내가 살아야 하고, 내가 내 믿음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움은 백해무익하지만, 사랑은 백익무해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누구보다 나를 위해! 미움보다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2. 성자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받았기에 미움보다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씀합니다. 요한은 “예수그리스도가 죄인인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큰 사랑을”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직접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면서까지 내 죄를 깨끗하게 하신 주님의 큰 사랑을” 말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영적 곁길로 빠진 연약함까지 다 대속해 주신 큰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는 이 사랑을 알다! 기노스코,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사랑을 받았을 때! 형제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사랑까지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고귀한 대속의 사랑을 상실했기에, 다시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처럼 고귀한 대속의 사랑을 받았기에, 미움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항상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내 삶에 “십자가 대속의 은혜, 날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이 많이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대속의 사랑을 알지만, 그 고귀한 대속의 은혜가 더는 나를 위한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대속적 사랑을 알아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대속의 사랑을 모르면, 타인을 미워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12 사도는 “주님 공생애 때. 주님과 동행했지만, 주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항상 서로 크다고 다투었고, 각자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했습니다. 당연히 “서로 경계했고, 경쟁의식에 사로잡혔고,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자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온전히” 체험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보여주신 대속의 사랑, 부활의 은혜가 모두 다 나를 위한 사랑임을” 절감했습니다. 놀랍게도 “대속의 은혜를 체험한 후! 사도들은 미움과 경쟁을” 이겨냅니다.

오히려 “서로를 사랑하고, 중보 하고 합력하며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헌신”했습니다. 이처럼 “나도 주님의 대속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면, 미워하기보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한 상처와 시험보다,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가 당하는 그 어떤 고통과 상처도, 십자가 대속의 은혜보다 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체험하면 미움보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체험하려면,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 나를 위한 것임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인 믿음은 내가 가진 지식, 감정, 의지로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 나를 위한 은혜임을 먼저 지식으로 알아야!” 합니다. 나를 위한 “십자가 사랑을 머리로 안 후, 그 은혜에 대한 감정적인 뜨거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마침내 “십자가 은혜에 감동한 후! 의지적 결단의 단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실례로 “나도 십자가 사랑으로 살아가야지! 각오와 결단으로, 내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지, 정, 의로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확신하면, 나는 미움보다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1900년 초, “강화읍 교회에 출석하던 과부 김씨가 여종 복섬이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당시 “김씨가 마 18:18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을 읽고 큰 갈등에” 빠졌습니다.

고민 끝에 “과부 김씨는 주일에 전 교인을 집으로 초청해서 대접한 후!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의 주인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한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겠습니까? 내가 복섬이를 땅에 매어놓고서 어떻게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복섬이 노비 문서를 찢어버리자, 오히려 복섬이가 나를 버리지 말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마침내 “과부 김씨는 복섬이를 더는 종이 아닌 수양딸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로 인해 “주변 모두가 큰 은혜를 받았고, 수많은 영혼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과부 “김씨가 하나님 말씀을 머리로 알았고, 가슴으로 감동받았고, 믿으려 작정하면서, 성경이 교훈하는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신은 “지적으로 주님을 알려 하지 않고, 감동받으려 하지 않고, 나아가서 의지적으로 잘 믿어보려는 결단이 없기에 발생하는 삶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알면! 누구라도 주변에 있는 모두를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항상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미움보다 사랑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