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의 책, 인간의 일생 에필로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목사님이 “교계 원로와 함께 여행 중, 원로께서 이런 권면을” 하셨습니다. “나는 차 운전을 좋아하다 보니, 차를 편하게 운전하는 방법을 잘 알아! 차가 거친 길에서 흔들리면 나도 흔들려야 편해!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안 흔들리려고 버티면 너무 피곤해져! 우리 인생과 목회도 마찬가지야! 세상이 흔들리는 대로 나도 흔들려야 편해져! 세상이 흔들리는 데, 혼자 꼿꼿하려면 피곤해져!”
이는 “이 목사님의 삶과 목회가 너무 꼿꼿해서, 적당히 살라는 권면”이었습니다. 당시 “이 목사님은 원로의 권면에, 잘 알겠지만, 저는 지금처럼 살다가 죽겠습니다. 다짐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편한 대로 흔들리는데, 신앙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하나님 편과 세상 편에서 오락가락” 합니다. 그러나 “미쁘고 신실하려면! 나부터 세상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은 “서론에서 수신자를 너희로 불렀는데! 본문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 바꿔” 부릅니다. 비록 “하나님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지만,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야 할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본문 1절에서, 요한은 주님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로” 말합니다. 대언자 “파라클레이톤은 요한복음에서 보혜사, 성령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법정 용어로, 심판 때, 범죄 한 성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돕는 주님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요한은 “이를 통해! 우리가 범죄 하지만, 주님께서 항상 내 편이 되심을 강조”합니다. 나아가서 “주님께서 대언자로 항상 내 편이기에! 나도 주님 편에 서서 살아가야 함을 도전”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나의 대언자! 항상 내 편”입니다. 아니! “주님은 십자가 보혈을 믿는 진짜 기독교인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은 “악한 세상에서 내 편 되신 주님과! 나도 주님 편에 서서 매일 동행하는 삶”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 삶은 정반대로” 살아갑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정말 세상보다 주님 편에 서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 편에 서야 할지, 왜 하나님 편에 서야 하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에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 편에 서는 삶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나도 하나님 편이 되려면, 삶으로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5절에서, “그의 계명을 지킨다! 이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쓰였습니다. 지키다! “테르멘은 시선을 고정하다. 말씀을 받은 대로 준행하다!”의 뜻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편에 서려면, 말씀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대로 준행해야!” 합니다. 1세기 말! “영지주의자는 그를 안다. 그 안에 거한다. 빛 가운데 거한다! 세 가지 삶의 지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실제 삶은 주님을 몰랐고, 주님 밖에서, 어둠 속에서” 살았습니다.
영지주의는 “주님과 복음 반대편에 서서, 많은 영혼을 사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기독교인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 편에 서려면, 더더욱 말씀을 삶으로 지켜야 한다! 힘들어도, 보고 듣고, 배운 말씀에 시선을 고정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도전합니다. 1세기 말은 “행함과 진실함보다 말과 혀로만 하나님 편에 선 영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 다양한 신학 자료, 말씀에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삶이 말씀과 너무” 멉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고, 직분도 있지만, 실제 삶을 보면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도” 다릅니다. 간디가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예수 믿는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이 이 말을 인용하면, 교회와 기독교인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음이 현실”입니다. 주님은 “사랑하고 용서하라 하셨지만, 우리는 내가 먼저 사과하면 자존심 상한다고” 주저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괜찮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 삶이 말씀에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내 자존심과 고집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유대 종교지도자의 외식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이들은 나름대로 말씀을 잘 지키며 산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일례로 “거리와 회당에서 기도하고 구제하며 자신을 과시했고, 그들은 이를 참된 기도와 구제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금식을 공개하며, 이를 거룩한 금식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했고, 율법을 정기적으로 묵상하며, 율법대로 살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삶이 하나님보다 자기 의로움에 따라 살았고, 하나님 말씀과 다르게 살았기에 외식이라! 책망”하셨습니다. 문제는 “혹시! 나도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실제 내 시선과 신앙생활이 하나님보다 내 의로움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나도 모르게, 아닌 줄 알면서, 내 생각과 경험이 말씀보다 앞서서! 내 신앙생활을 내가 주도할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열심히 믿는다고 생각할수록! 내가 내 신앙을 더 엄격하게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고후 13:5절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매번 자기 신앙을 점검하며 살았다면, 우리는 더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정말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지! 내 삶이 신실한지! 이는 사람이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타인이 “나를 신실하고 잘 믿는다 해도! 하나님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과 나 자신만! 내가 주님 편에서 삶으로 믿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목사가 하나님은 내 편이다! 이 말에 ‘아멘!’ 한다고, 내가 진짜 하나님 편이 되지!” 않습니다.
말씀에 “‘아멘!’으로 동의하고 인정해도! 삶이 다르면, 누구도 나를 하나님 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주신 청지기 삶에서, 정말 신앙인답게 사는지!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정직하게 사는지! 사랑하고 용서하며 사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정말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답게 사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는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평론가들이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안다! 명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내 신앙을 점검하지 않으면, 마침내 나와 타인, 주님도 내가 하나님 편이 아님을 다 알게” 됩니다. 이민 생활이 “힘들기에! 더더욱 하나님 말씀대로, 삶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항상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점검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웁니다.
물론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 편에 서면! 핍박과 무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것도 아시고, 어려운 상황을 역전시키고, 더 창대하게”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나는 안 돼! 못 해!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힘들어도 말씀대로 살려는 영혼의 편이 되셔서! 돕고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한주도 “내 신앙생활을 잘 점검해서! 말씀대로 살아서! 항상 하나님 편에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나도 하나님 편이 되려면,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본문 6절은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행할지니라! 페리파테인은 본이 되신 주님을 따라서 걸어가는 삶을” 뜻합니다. 1세기 말 “영지주의는 내가 그 안에 거한다며! 자신들만 진리 안에 있다!” 주장했습니다. 말은 “빛 가운데 걸어간다! 주장했지만, 모두를 어두움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주님이 모델이 아니었고, 세상 철학과 자기 위주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랐기에! 영지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삶은 이처럼 인간적 주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교훈을 따라서” 걸어갑니다. 여기서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삶은 주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많은 신앙인이 영지주의가 아니라, 주님을 닮으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현대인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대로 닮기 원해서 Wannabe 대상을” 정합니다.
유명인을 “좋아해서, 착용하는 옷과 신발, 머리 모양까지 똑같이 하려” 합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유명 연예인처럼 되겠다고! 과감한 성형수술도” 불사합니다. 서울의 “유명 성형외과 광고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부모님 나를 낳으시고, 원장님 나를 만드셨네!” 인간의 “패망은 누가 나를 만드시고, 누구를 닮아가야 할지를 모름에서” 비롯됩니다. 실제로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떤 철학과 사랑도! 우리가 닮아가야 할 모범 답안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선택할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들어야 할지! 왜 살아야 할지! 가장 모범적인 답을” 주십니다. 이처럼 “가장 완전한 답이 있지만, 이를 알려 하지 않고, 닮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닮지 말아야 할 대상을 닮으며, 나도 모르게 하나님 반대편에 서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닮으려면!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자라가야!” 합니다. 본문 5절은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말씀합니다. 온전하게 되다! “원어는 지속적 성장과 발전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계속 성장하고 자라면, 세상이 아닌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면 나는 점점 주님보다 세상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운 “지인이 10년 만에 만나서, 어쩌면 이렇게 외모가 똑같으세요? 말하면 칭찬”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10년 전과 똑같으세요? 말하면, 이는 욕”입니다. 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전혀 성장하지 않고, 그 삶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술사 집에 생쥐가 살았는데, 항상 고양이만 보면 겁먹고 두려워” 했습니다.
이에 “마술사가 생쥐가 불쌍해서! 두려워하는 고양이로 만들었더니! 고양이가 된 쥐가 개만 보면 또 겁을” 먹었습니다. 마술사가 “쥐를 다시 개로 만들어 주었지만! 이번에는 호랑이를 보고 꼼짝도” 못합니다. 마침내 “마술사는 생쥐가 겉은 커지고 바뀌었지만, 속은 전혀 바뀌지 않음을 보고 다시 생쥐로” 만들었대요! 바쁜 “이민 생활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기가 쉽지 않지만, 많은 은혜를 받고도 매일 그 자리! 생쥐처럼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렵다고! 이런저런 핑계로 성장하고 자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내 신앙생활이 “더 성장해서 주님을 닮으려면, 하나님 편에 서려면, 다시 주님 말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났던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주의 일을 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한 번 더!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한 번 더 예배드리고, 말씀 읽고, 봉사하고, 기도하면, 내 영성이 더 깊어지고, 점점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바빠도! “한 번 더 행하려는 영적 노력이 내 삶과 가족, 교회를 자라게 하고, 바꿀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행함이 습관을 넘어 생활이 되면! 내 신앙이 점점 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주도 “한 번 더! 말씀대로 살아서 성장하고, 더 주님을 깊이 닮아서,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