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은 “팝의 황제로 불렸던 세계적 스타”였습니다. 무려 “31개 기네스북 기록이 있고, Thriller 앨범은 6,600만 장이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은 공연 후! 관객이 떠난 빈 무대에서 고독한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 번은 “잭슨이 공연 후! 슬피 울고 있는데, 청소부 한 명이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돈과 명예는 인간을 파멸시킬 뿐, 참 기쁨을 못 줘요! 참 기쁨을 누리려면, 주 예수를 영접하세요!”
세계적 “스타는 외로움에 눈물을 흘릴 때! 초라한 청소부는 참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기뻐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영원한 기쁨은 자주 들어 익숙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영혼은 사라질 기쁨보다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요한은 “서론에서 믿음 안에 있는 우리와 연약한 믿음에 있는 너희를 구분하여” 썼습니다.
당시 “요한이 이렇게 ‘우리와 너희’를 구분한 기준은 외적인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을 얼마나 깊이 누리는가? 이것으로 우리와 너희를 구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 4절에서, 요한일서를 쓴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충만하다. 원어는 흘러넘칠 정도로 기쁨이 풍성하고 크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이 기쁨은 순간적이지 않고, 일시적이지 않고, 오히려 계속 유지되는 기쁨을” 말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리는 이 기쁨을 ‘너희’로 불리는 영혼들도 누리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많은 “이민자가 내 삶은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 고백하기보다 힘들다! 버겁다! 죽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으로 살기보다, 마지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갑니다.
핵심은 “기쁨이 분명히 있지만! 그 기쁨이 과연 어떤 기쁨인지, 그 기쁨의 기원이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으로 기뻐하고, 그 기쁨이 얼마나 삶에서 계속되고” 있으세요? 우리가 “새 차와 새집을 사면 참 좋지만! 그 기쁨은 길게 계속되지!” 않습니다. 혹시 “새 차와 새집을 사고 끊임없이 마음이 설렌다면 병원에 한번 가보셔야!” 합니다. 결국 “세상도 기쁨을 주지만, 이는 제한적이고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은 너무 기쁘지만, 그 기쁨이 곧이어 고민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시는 기쁨은 이 땅은 물론 영생까지 이어지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시는 기쁨은 이 땅의 고난과 아픔, 눈물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특별한 정체성은 이처럼 하나님 주시는 기쁨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감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으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을 누리려면! 우리가 ‘무엇을 듣고 살아갈 것인가?’ 바른 결정이 필요합니다.
본문 5절에서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말씀합니다. 요한이 “본서의 수신자에게 듣고 전한 소식은 하나님은 빛이고 조금도 어두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1세기 말은 “복음의 변질이 가장 컸고, 이단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연히 “누군가 영적으로 넘어졌다. 복음을 버렸다. 복음을 왜곡했다는 소식이” 많았습니다. 함께했던 “동역자가 등 돌리고, 이제는 배교자가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런데 “동시대를 살았지만, 많은 영혼이 이단의 음성을 들을 때! 요한은 복음을 들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두움이 없는 빛이다!’ 복음을 더 깊이 들었기에, 기쁨으로 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기쁨과 힘을 주는 격려도 듣고, 때로 좌절과 낙담, 분노와 아픔을 유발하는 소리도 함께 들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소리만 듣고, 어떤 소리는 귀를 막고 거부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 세상과 내 자아의 소리가 매일 들리고, 동시에 성령께서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시는 음성도 매일” 들립니다. 문제는 “내가 세상과 성령의 음성중 무엇을 선택하는가? 이로 인해 참 기쁨과 세속적 기쁨이” 결정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참 기쁨으로 이 땅을 살려면, 듣고 싶은 소리보다 꼭 들어야 할 소리를 듣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게 유리하고, 좋은 소리, 나를 지지해 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반면에 “내가 꼭 들어야 할 음성은 내게 부담이 되고,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꼭 “들어야 할 소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멈추도록 강권할 수 있고, 더 많은 희생과 헌신, 시간과 노력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들어야 할 주의 음성은 내가 이 땅의 고난을 이기고도 남을 은혜를 공급하고, 참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힘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꼭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겠다고 고집”부립니다.
문제는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잠깐 내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지만,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꼭 들어야 할 소리가 힘들어도!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세상이 아닌 하늘의 기쁨을 누리도록” 이끕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소리를 들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들은 음성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존 번연이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는데, 어느 날 간수가 특이한 제안을” 했습니다. “목사님! 많이 힘드시죠? 오늘은 댁에 가셔서 사모님과 자녀들 좀 보고 오세요! 뒤는 제가 책임질게요!” 그런데 “번연은 옥을 나선 지 얼마 후, 다시 옥으로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맙지만, 성령께서 인도하는 길이 아니기에 돌아왔어요.”
놀랍게도! “그날 밤! 영국 왕이 번연을 감시하려고 직접 감옥에” 왔습니다. 국왕이 “돌아간 후! 간수는 번연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당신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저도 살았습니다. 앞으로 저도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살게요!” 한 번뿐인 “인생이 참 기쁨을 누리려면, 꼭 들어야 할 소리!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나아가서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이가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이 죽어가자, 주님께 나아와서 ‘딸을 살려달라’ 청했고, 주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 중! 기막힌 소리를” 듣습니다. 이미 “딸이 숨을 거두었기에, 주님이 오셔도 아무 소용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고” 앞장서셨습니다. 야이로는 “죽은 아이를 보고 온 하인들의 음성보다!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고, 마침내 죽은 딸이 살아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과 인도하심은 항상 옳고, 절대로 오차가 없기에!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듣는 것을 넘어 온전히 순종해야!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결단이고 도전이기에!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면, 힘들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주께서 앞서가고, 예비하신 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주도 “주님 음성을 듣고, 이에 온전히 순종해서 하늘의 기쁨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을 누리려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며 살아갈 것인가?’ 바른 결정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빛이고 어두움이 없다!’ 성령께 들은 그대로, 입술을 열어 세상에” 전했습니다. 당시 “요한은 주님을 목격한 마지막 증인이었기에! 이단의 도전에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곳곳에서 “영적으로 넘어져서 우리가 아닌 너희가 된 영혼에게 줄 도전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어쩌면 “바울처럼 책망하며, 엄하게 꾸중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입을 열고, 펜을 들어 기록한 소식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이었습니다.
“예수만이 생명의 말씀이다. 예수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만 참 하나님이다.” 당시 “요한은 타인을 책망하고 정죄함보다! 입술과 글로 하나님 말씀과 은혜를 전하며 더 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약 3장은 “인간의 혀가 작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나게 크다!” 증언합니다. 혀는 “작은 지체인데,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 엄청난 파괴력이 있다! 길들일 수 없고, 쉬지 않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말은 하나님 주신 선물이지만, 나와 주변을 가장 힘들게 하는 악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누군가의 생각 없는 말 때문에 시험 들고,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무심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평생의 상처를 주고,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영생까지 포기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같은 내용의 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이로 인해 웃음과 여유를 주고, 막힌 관계를 열어 줄 수도” 있습니다.
지난주! “제가 충청도 사투리를 언급했는데! 오늘도 충청도 사투리 한 마디를 더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떤 “남성이 운전 중! 초보운전자 때문에 짜증이 났는데, 차 뒤에 쓰인 글이 서로를 웃게” 했습니다. “R아서 P하슈! 답답하쥬? 지는 환장해유!” 우리가 “참 기쁨을 누리고 타인에게도 참 기쁨을 주려면, 우리 말이 거룩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영혼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나는 뒤끝 없어!’ 말하는 경우”입니다. 기독교인은 “하고 싶은 말보다, 사람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되는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 말이 “사람을 세우는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심사숙고하고 말해야!” 합니다. 만일 “내 말이 자꾸 사람에게 상처 주고,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면 침묵해야!” 합니다. 내가 “들어도 싫고 아픈 말이라면, 상황이 답답해도 하지 말고 침묵함이” 옳습니다.
구체적으로 “내 말이 사람을 세우고, 하나님 영광이 되도록 항상 훈련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영적인 훈련과 연습 없이 기쁨을 주는 말! 살리는 말을 절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분이 자기 말에 문제가 있음을 알지만, 고치려 하지 않고, 훈련조차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 잘못된 말과 언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삶에서 쌓인 결과이기에! 이제라도 선한 말을 연습하고 훈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꼿꼿한 신앙을 지킨 최 권능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평양 백동 거리에서, 일본군 장교가 거만하게 말을 타고 그곳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최 권능 목사님이 큰 소리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외쳤습니다. 벽력같은 “소리에, 일본군 장교가 말에서 떨어졌고, 목사님은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최 목사님은 감옥에서 매를 맞을 때마다, 계속해서 외치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경찰이, “‘미쳤다고 조롱하자, 최 목사님이 답변이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내 안에 오직 예수만 가득 차 있기에, 건들기만 하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나온다!” 당시 “최 목사님의 삶에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얼마나 깊게 쌓였는지, 연습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내 “말은 멀리 있고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운 지인에게 더 큰 영향력을” 줍니다. 안타깝게도! “내 말로 인해서, 내 사랑하는 가족과 자녀, 동역자가 다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말한 그대로 응답하기에! 말은 교회와 영생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말은 내게도! 타인에게도 참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살리는 말! 하나님께 영광되는 말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한주도 “내 말로 인해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을 누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