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7-200122) ▶ 주님께 등 돌리지 않으려면(마태복음 21:6~13)!
공산주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랍비의 후예로” 태어났습니다. 마르크스는 “신학을 공부하는 중,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적 부조리를 보고, 무신론자로” 변합니다. 마침내 “동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했고, 종교는 아편이다!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문제는 “훗날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레닌은 더 과격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은 자본가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집필한 창작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믿음에 등 돌린 삶의 악순환을 마르크스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교회와 복음의 가장 큰 해악은 불신자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이었다가 등을 돌린 영혼들로 인해서 더 크게” 발생합니다. 본문은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 요일로 치면 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말씀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 대다수가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열정적으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불과 한주도 안 되어, 대다수 무리가 주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누구도 “더는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 외치기보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소리쳤습니다. 당시 “호산나 소리쳤던 사람들 대부분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동의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바꾸시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셨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영혼이 공생애 말기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서 주님께 등 돌렸고, 마침내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성장하는 교회 대부분이 교인의 수평 이동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교회가 정체되고, 수적으로 줄어가고, 심지어 복음에 등 돌리는 영혼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길에서 등 돌리고, 세상으로 나간 것이 절대로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등 돌리게 한 교회와 기독교인의 문제도 절대로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라도!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중에도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주님께 등 돌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교회에 등 돌린 이유가 있겠지만, 등 돌린 영혼은 복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 등 돌리지 않고 살아가는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등 돌림은 단순히 자세 문제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 등 돌리지 않기 위해 경성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루살렘 주민과 달리, 주님께 등 돌리지 않을지!” 살펴봅시다.
1. 주님께 등 돌리지 않으려면 믿음의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 대다수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겉옷은 밤에는 이불로, 낮에는 외출복이었기에, 가장 중요한 생필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빚진 자라도, 그 날에 겉옷만큼은 반드시 돌려주라! 명령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려고, 그렇게 중요한 생필품을 벗어서 길에 폈던 것”입니다. 게다가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 소리치며, 구원에 대한 사모함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뜨거운 환영이 한주도 안 되어, 완전히 식고” 말았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주님을 환영했지만, 왜 주님을 영접해야 하는지, 주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 믿음의 기초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군중심리! 남들이 하니까 나도 덩달아서 겉옷을 펴고 호산나! 외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기초가 약했기에, 며칠 만에 등을 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진이 “잦은 CA는 건축 때, 내진을 위한 기초 공사를 철저하게” 합니다.
건물의 “기초가 든든해야, 강진이 찾아와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이 든든하려면, 영적 기초가 견고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분이 말씀과 진리를 사모함보다, 오히려 친교와 사업 목적으로, 외롭고 힘들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교회를” 찾습니다. 문제는 “그럴 수도 있지만, 교회를 찾는 진짜 동기가 잘못되었기에,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족해도 “내 영적 기초가 세상과 나보다 말씀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평생 주님께 등 돌리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며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내 신앙의 기초가 든든하려면! 항상 말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부족해도 “말씀 앞에 서고 듣는 훈련, 적용하는 훈련이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쁘다고! 인터넷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영적 훈련을” 게을리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내가 말씀 훈련에 대한 사모함이 없으면, 내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훈련이 없으면 “작은 시험과 상처에도 주님께 등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말씀 훈련은 섬기는 교회를 통해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섬기는 교회를 통해, 내게 충분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 밖에서 성경공부를 하면, 담임 목사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이유는 “참석하려는 성경공부가 복음적인지! 분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항상 말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광야에서 모두 사망”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당시 “출애굽 1세대는 엄청난 이적을 보고 듣고 체험했지만, 말씀 훈련이” 없었습니다. 율법이 “있었지만, 율법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말씀 훈련을 받은 모세는 출애굽 1세대와 접근하는 방법부터 완전히” 달랐습니다. 힘들었지만 “모세가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께 말씀 훈련을 받으며 율법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오전 5:30분! 초등학교 6학년 소녀가 가쁜 숨으로 15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일도 많았겠지만, 골프에 대한 열정으로 매일 6km 달리기, 600번 퍼팅 훈련을 했고, 마침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 골퍼 박세리의 성공담인데, 박세리는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대회에서 우승한 원동력은 끊임없는 훈련이었다.” 생각해 보면 “믿음의 기초가 든든해지는 것! 말씀 훈련도 그냥 자연스럽게 되지!” 않습니다. 말씀 공부 때, “혹자는 머리가 나빠서,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말씀을 들어도 금방 잃어버려서 안 된다!” 말합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훈련이 힘이 있고, 돌에 반복적으로 새겨지면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훈련은 어떤 목적을 달성했다고 끝날 수 없고, 또 다른 비전을 향한 훈련이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성공도 이처럼 훈련이 필요한데, 믿음의 훈련이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훈련하려면 “먼저 주어진 현실에서, 바로 지금부터,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항상 말씀을 훈련하며 살아가면, 주님께 등 돌리는 악함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삶이 항상 말씀으로 훈련받아서, 주님께 등 돌리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2. 주님께 등 돌리지 않으려면 나 중심적인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은 후, 가장 먼저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셨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매매하고, 환전하고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가득했습니다. 당시 “외국에서 오는 유대인은 제물을 가져올 수 없어서, 돈을 주고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유대 절기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영혼은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성전 매매 뒤에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깊이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이 사 56:7절 말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이를 왜” 몰랐겠어요? 실제로 “너무 잘 알았지만,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이 말씀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서서히 등을 돌렸던 것”입니다. 주님은 “눅 9:23절에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서 살아가려면, 먼저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말씀한다. 실제로 “내 것을 다 챙기고, 나아가서 주님 주시는 은혜까지 챙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먼저 주님의 일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가 내 삶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취할 이익을 쉽게 내려놓지!” 못합니다. 심지어 “물질보다 하나님이 소중하다! 고백해도, 실제 삶은 이와 정반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등 돌리지 않고 살아가려면! 이처럼 나 중심적인 사고! 내 이익을 먼저 탐하는 연약함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이유는 “나 중심적 사고를 버리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나 중심적 사고를 이기려면, 매사에 하나님이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롬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말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아멘! 하지만, 실제 삶은 나 중심적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부족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는 영혼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어서 브닌나에게 많은 시달림을 당해서, 자녀에 대한 애착이” 컸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처음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립니다. 특별히 “한나는 사무엘이 젖 뗄 때!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울 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한나는 “너무 귀한 사무엘이었지만, 하나님과의 약속!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먼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나가 하나님 최우선을 삶으로 고백했을 때! 사무엘의 미래는 더 창대하게” 열렸습니다. 또한 “삼상 2:21절은, 하나님께서 그런 한나에게 3남 2녀의 자녀를 더” 주셨습니다. 우선순위는 “내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만일 “물질이 매사에 가장 먼저라면, 하나님보다 물질이 더 먼저인 것”입니다.
만일 “명예와 권력이 가장 먼저라면, 역시 하나님보다 명예와 권력이 먼저인 것”입니다. 세 명의 남성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각각 결혼하자고, 적극적으로 청혼”했습니다. 이에 “처녀는 달리기 경주를 제안했고, 먼저 뛰어간 자신을 붙잡는 사람과 결혼하겠다!” 말했습니다. 처녀는 “경주 전! 주머니에 돈을 잔뜩 넣어서, 첫째 청년이 뛰어올 때! 돈을” 흘렸습니다. 놀랍게도 “첫째 청년은 뛰다 말고 돈을 줍느라, 더는 처녀를 쫓아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둘째 청년도 돈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셋째 청년은 처녀가 남은 돈을 다 흘렸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처녀를 쫓아가서 처녀를” 잡았습니다. 누가 “이 처녀와 가정을” 이루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물질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 명예와 권력보다, 하나님이 최우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최우선이 되어야, 절대로 등 돌리는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반복하지만 “주님께 등 돌리면, 그 당시 믿음만 잃는 것이 아니라, 영생까지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중심적 사고는 나를 넘어뜨리지만, 하나님 최우선의 신앙생활만이 부족한 나를 살려낼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살아서, 하나님께 등 돌리지 않고 살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