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6-200115) ▶ 주님과 만남이 더 깊어지려면(누가복음 19:1~10)!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 복음성가 가수 레나 마리아는 태생부터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었지만, 신실한 부모를 만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당시 “주변 사람 대부분이 마리아를 보호소에 맡기라고 권유했지만, 부모가 이를 거부하고 말씀과 기도로, 긍정적인 아이로 바르게 잘 양육”했습니다. 지난 “2007년! 미국을 방문한 레나 마리아를 보고, 많은 사람이 세 가지에 놀랐다!” 합니다.

“발로 모든 것을 다 처리하는 탁월한 능력, 친절하고 밝은 미소, 선교에 대한 열정!” 레나 마리아의 “인생은 좋은 부모와 만남, 나아가서 하나님과 더 깊은 만남으로 그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만남은 이 땅은 물론 영생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기에, 복되고 귀한 만남이 날마다 더 깊어져야!” 합니다. 삭개오! “그 이름은 순결하고 무죄한 자, 깨끗하고 의로운 자란 뜻이었지만, 실제 모습은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었지만, 주님은 본문 9절에서 삭개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주님과 “삭개오의 만남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참으로 깊고 의미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삭개오는 소문으로만 듣던 주님을 뵙고자, 큰 사모함으로 나왔고, 작은 키와 많은 사람 때문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야 했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응했고, 주님을 집까지 모실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죄를 온전히 회개했고, 주님은 그런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묵상할수록 “주님과 삭개오의 만남은 점점 깊어졌던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영생과 가까워지고, 이전보다 신실해지려면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주님과 “관계가 이전보다 더 깊어지고 온전해져야!” 합니다. 주님과 “만남이 깊어질수록! 말씀이 들리고, 은혜받고, 신앙생활이 기쁨과 감동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만남이 깊어질수록!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고, 상처와 시험을 이기고, 영과 육의 질병이 치유되고, 내 삶이 이전보다 점점 더 나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만남이 깊어지고, 내 삶에서 주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가는 것이 바로 영적 성장”입니다. 그러므로 “이민 생활이 힘들수록! 이처럼 주님과 만남이 더 깊어진다면 얼마나” 감사할까요? 그러나 “현실은 주님과 관계가 점점 피상적, 형식적으로 굳어져 감에”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혼이 변화된 삭개오보다 변화 전 삭개오처럼” 살아갑니다. 주님과 “깊은 만남이 가지는 능력과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함몰되어, 사람과 흥미, 순간적 쾌락에 더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깊이 만날수록! 내 삶은 더 신실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보다, 주님과 깊은 만남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과 만남이 더 깊어질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주님과 만남이 더 깊어지려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보고자 했지만, 작은 키와 많은 사람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함은 호기심이 아니었고, 그 증거가 본문 4절에” 나옵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호기심이었다면, “굳이 달려갈 필요가 없었고, 나무에 올라갈 이유도” 없었습니다. 특별히 “달려가! 능동태 동사인데, 삭개오가 자기 의지로 주님께 달려갔음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주님을 꼭 뵙기 위해, 돌무화과나무까지”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누가는 삭개오가 주님을 뵙기 위한 열정적 태도를 다양하게” 소개합니다. 이에 “주님도 삭개오의 열정을 보고, 본문 5절에서”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처럼 “삭개오의 열정적 태도가 주님과 깊은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문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의 일을 위해 열정적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주님과 만남이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과 능력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현대 신앙인 대다수가 영적으로 미온적이어서, 삭개오처럼 장애물을 극복하면서까지 주님께 달려가는 열정이 참으로” 드뭅니다. 때로, “체면 때문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잘 모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나려는 열정을 잘 아시기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주의 백성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님을 만나려는 열정이 식었기에, 그 믿음도 형식적, 피상적으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세상에 대한 열정에도 열매가 맺히지만, 세상에서 맺은 열매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열정은 내 삶을 바꾸고, 형통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이 땅의 복을 하늘의 복으로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려라!”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거부하고, 다양한 변명과 핑계로 이를 실행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이삭을 주신 자도, 이삭을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순종해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열정을 다해서 순종”했습니다. 심지어 “말씀하신 그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다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아브라함은 메시아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열정은 “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를 결정하는 척도가” 됩니다. 내가 “가진 열정의 깊이에 따라서 내가 받고 누리는 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한국교회는 새해 벽두에 두 주간 동안, 말씀 사경회를 가지는 전통이 전국 곳곳에” 있었습니다. 혹한의 “추위에도 수많은 사람이 말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당시 “곽안련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란 책에서, 강릉에서 한 여인이 아이를 업고 쌀을 지고, 걸어서 서울까지 온 열정을 소개”합니다. 초기 “한국교회의 열정은 선교사들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이 3.1운동을 가능하게 했고, 일제의 폭압을 이기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런 열정을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훗날! “초대교회 성도와 함께 심판대에 서야 하는데, 진심으로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어야, 주님과 만남도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님을 만나려는 열정, 주의 일을 위한 열정이” 있으세요? 만일 “열정이 식었다면 다시 뜨거워지기 위해 기도해야 하고, 열정이 있다면, 그 열정을 지키며 살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과 만남이 깊어지는 것이 신실한 신앙생활”입니다. 항상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주님과 더 깊은 만남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주님과 만남이 더 깊어지려면, 온전히 회개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현실적인 장애물, 자신의 작은 키와 군중을 넘어서려고 달려갔고, 마침내 돌무화과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삭개오의 열정으로, 주님을 집으로 모셔서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7절에서, 뭇 사람이 삭개오 집에 들어간 주님을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는 “삭개오가 여리고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였습니다. 삭개오도 “이를 알고, 본문 8절에서 작정하고, 주님께 파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당시 “삭개오는 모두가 보도록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리장으로 악착같이 모았던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내놓겠다!” 고백합니다. 특히 “토색하다. 쉬코판타이는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불법으로 돈을 강탈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동족의 물질을 토색 했기에, 4배를 배상하겠다! 용기 있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타인의 것을 부당하게 취하면, 취한 양의 1/5만 더해서 갚으면 된다!” 말합니다. 그러나 “4배를 갚겠다는 것은 타인의 것을 도둑질했고, 억지로 빼앗았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개적 장소에서, 일어서서 고백한 것은 온전한 회개를” 뜻합니다. 삭개오는 “내가 틀렸고, 잘못 살았고, 그래서 이제는 안 그렇겠다! 회개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삭개오의 진심이 가득한 회개를 듣고,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열정으로 “만난 주님과 관계가 회개를 통해,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온전한 만남으로 깊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내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합리화하고 변명과 핑계로 일관할 때가 더욱” 많습니다. 비록 “입술로 인정해도, 이는 단지 자백일 뿐, 180도 바뀌어야 할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과 더 깊이 만나려면, 내 죄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행전 3:19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진심으로 “회개해야 구원이 있고, 새롭게 되고, 주님과 영적으로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나보다 저 사람이 더 나빠요! 나는 피해자예요! 나도 힘들어요! 회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과오는 그 사람이 직접 회개해야 하듯이, 나는 내가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회개가 꼭 있어야, 주님과 영적인 만남이 더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살 수 있고, 일어나고, 회복되고, 새로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야에 “거대한 전함의 함장이 멀리 있는 희미한 불빛을 보고 이렇게” 타전합니다. “여기는 전함이다. 방향을 20도 바꾸시오!” 놀랍게도 “이에 상대방이 당신이 바꾸시오!” 답이 왔습니다.

이에 “함장이 이 배는 최첨단 전투함이다. 누가 누구에게 항로를 바꾸라고 해!” 소리쳤습니다. 마침내 “함장이 고집을 부리며 전진했고, 이내 큰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안 바꾸겠다고 고집을 부린 곳이 배가 아니라, 고정된 등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 “신앙인의 문제는 말씀을 받고 찔림이 있어도, 고집부리며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서 “내가 틀렸다. 죄인이다! 인정하고 동의하지만, 온전한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기에 “하나님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온전하게 체험하지!” 못합니다. 회개는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영적 용기가 있는 영혼만 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동시에 “회개하는 영혼만이 마침내 승리할 수 있고, 참 평안을 먼저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회개보다 고집을 부린다면, 자존심은 지킬 수 있겠지만, 주님과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실수와 과오에 대해 회개하고, 사과할 줄” 압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주변 사람의 잘못은 잘 지적하지만, 자신의 문제점과 잘못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잘못했다. 고치겠다. 이제 잘 해 보겠다! 인정하는 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결국 “진정한 회개는 나를 더 성숙하게 하고, 주님과 더 가깝게 이끌어” 줍니다. 실제로 “회개한 자리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삭개오처럼 온전한 회개를 통해 주님과 만남이 더 깊어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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