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3-191211) ▶ 균형 있게 하나님 사랑하기(누가복음 10:38~42)!
개인적으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무거운 물체가 하늘을 날까!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비결은 “비행기가 무거워도, 좌우 균형을 잘 맞추면 충분히 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얼굴과 신체에서, 두 개가 있는 눈과 귀, 팔과 다리는 좌우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에 “코와 입, 하나밖에 없는 부위는 중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에 과학과 인간의 육체까지도 편중보다 균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 우리를 구원한 십자가도 좌우가 정확한 균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이처럼 균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섭리와 달리, 편중되게 살아감에” 있습니다. 편중은 “치우쳐서 균형이 깨지는 것”입니다. 치우치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은 상처와 다툼, 분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이 편중되면, 나는 물론 교회까지 어려워질 수 있기에, 우리가 균형 있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때, 다른 어떤 가정보다 나사로 가정을 편하게” 여기셨습니다. 특히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어떻게 주님과 친밀하게 되었는지!” 말씀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영접하며 최선을 다해 섬겼고, 마리아는 주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잘 경청”했습니다. 혹자는 “마르다의 헌신보다 마리아의 말씀 경청이 더 낫다!” 평합니다. 그러나 “본문 42절에서, 주님은 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했지만, 마르다를 책망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본문 41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마르다를 두 번이나 반복하여” 부르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마르다의 헌신과 수고에 깊은 칭찬과 고마움을 표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둘 다 칭찬하셨고,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마르다식 신앙생활과 마리아식 신앙생활로 인한 갈등과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혹자는 “시간과 노력을 다해서, 봉사와 헌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혹자는 “봉사와 헌신 보다, 말씀 듣고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문제는 “두 유형이 서로를 인정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 상반된 주장을 펴며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르다식 “신앙은 행함 없이 말만 하고 평가만 한다! 마리아식 신앙을” 비판합니다. 반면에 “마리아식 신앙은 말씀 없는 봉사가 문제야! 마르다식 신앙을” 책망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도대체 어떤 모습이 바른 모습일까?” 묻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믿어야 바르게 믿는 것인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참으로 많지만, 오늘의 핵심 단어는 균형”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균형 있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봅시다.
1. 균형 있게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영접하여 집으로 모신 후, 본문 40절에서, 준비하는 일이 많아 심히” 바빴습니다. 준비하는 일, “디아코니안, 원뜻은 종이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드는 모습을” 뜻합니다. 당시 “마르다는 주님과 제자들의 식사를 챙기려고 많이” 분주했습니다. 동시에, “마르다는 음식 준비 외에도, 마리아가 한가하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급기야 “동생이 나를 안 돕는다고, 좀 돕게 하라고! 주님께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본문 41절에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 말씀합니다. 이유는 “마르다가 음식 걱정, 동생에 대한 불평으로 마음이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마르다를 책망하기보다 오히려 애정과 사랑으로 부르셨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마르다야! 마르다야!” 부르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마르다가 봉사하고 수고하는 헌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임을 인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께 항상 최고의 것을 드리며” 헌신했습니다. 헌금도 “일부러 새 지폐를 바꾸어 드렸고, 여의치 않으면 다려서라도” 드렸습니다. 농작물 중 “최고의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고, 쌀을 사도 처음 것은 성미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기보다,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때가 더” 많습니다. 헌신하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 좋아요! 내가 해 드리죠! 뭐! 이런 식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드리기보다, 마치 선심 쓰듯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최고의 것을 드리기 위해서 항상” 노력합니다. 문제는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 삶에서 하나님이 차지하는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입술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실례로 “만일 여러분이 올해 성탄절에, 백악관에 초청받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면, 어떻게 준비하고” 가시겠어요?
분명히 “머리도 새로 하고, 옷도 새로 사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국 대통령보다 훨씬 더 높은 천지의 창조주”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대하 2:5절은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 말씀합니다.
이는 “솔로몬이 두로 왕 후람에게 레바논 백향목을 요구하며 말한 내용”입니다. 짧지만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최고시기에, 나도 최선을 다하겠다!” 고백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지만, 현실은 그 최선이 서서히 깨지고” 있습니다.
바쁘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이런저런 핑계로 주님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상황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상황이 전보다 좋아져도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김은주 씨의 “책 1cm+는, 큰 기쁨을 방해하는 것은 큰 슬픔보다 약간의 기쁨이다. 큰 만족을 방해하는 것은 불만족이 아니라 약간의 만족이다. 큰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실패보다 약간의 성공이며, 진짜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미움이 아닌 미지근한 사랑이다.” 말합니다.
살면서 “‘약간!’ 이 단어는 절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구약의 “번제는 다 태우는 것인데, 만일 약간만 태워드린다면, 이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십일조도 “10%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인임을 알고 100% 전부 드리는 마음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 부분만 행하고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자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명령합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일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그 시간만이라도 하나님께 최고의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할 때! 나와 가족, 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균형의 한 축!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살아가기” 원합니다.
2. 균형 있게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본문 39절에서,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말씀합니다. 앉아! “수동태로 쓰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마리아를 옆에 앉게 하고 말씀을 전하셨음을” 뜻합니다. 또한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음은 제자가 스승의 말을 듣는 간절한 태도”입니다. 실제로 “당시 문화에서, 타인의 발치에 앉음은 그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이 포함된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듣더니! 미완료 능동태로, 이는 마리아가 자원해서 말씀을 들었음을” 강조합니다.
미 완료 형은 “마리아가 계속 말씀을 듣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에 “주님은 본문 42절에서,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고 빼앗기지 않으리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마르다의 불평에도, 마리아가 말씀 듣는 태도가 참으로 귀하다!”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처럼 말씀을 잘 경청하고, 받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깊이 경청하지 못하고, 하나님 사랑도 잘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주일은 “예배드림이 본질인데, 이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혹자는 “주일에 있는 모임에서 누구를 만날지! 관계에 더 신경” 씁니다. 심지어 “말씀을 귀로 듣지만, 마음은 다른 생각에 빼앗겨 집중하지!” 못합니다. 주일 예배에서 “한 주간 영의 양식을 충전 받아야 하는데,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아서, 주일 오후면 오히려 피곤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하여 말씀을 잘 경청하는 것이다.” 요 11장은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쓰여” 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와병 소식을 듣고,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 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청한 마르다와 마리아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요 11:21절에서, 마르다는 그래도 주님을 맞이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반면에 “요 11:32절은,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말씀합니다. 마리아는 “과거 주님 말씀을 들었던 그 태도 그대로, 주님 발치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보다, 길거리였지만, 그곳에서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간절함으로 잘” 경청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두 자매 중 누구의 태도를 보시고, 나사로 무덤으로” 갔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을 잘 경청한 마리아의 태도를 보신 후,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역사로, 마리아가 말씀 경청으로 고백한 주님 사랑에” 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시는 모든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간절함으로 “나를 낮추며, 하나님이 항상 옳다는 태도로 경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내가 살아나야 한다는 각오와 사모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얼마 전 “우연히 교회 홈페이지에 실린 추수감사절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한 장씩 “보다가, 저희 아들이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내심 “기뻤고, 역시 목사 아들이라 달라! 생각했는데, 다음 사진에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사진에 “맨 앞에서 지겹고 지루해서 몸을 트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혔던 것”입니다.
귀가 후!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아이가 그래도 아빠 설교 잘 들었다고 항의”했습니다. 제가 “내용을 물어보니, 감사가 능력이 있으려면, 계속 감사하고 또 감사가 이어져야 하고,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정확하게 설교 요지를” 답했습니다. 제가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잘 들어서 고마운데, 예배마다 바른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른들은 “아이처럼 몸을 뒤틀고, 지루함이 보이도록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르게 앉아있지만, 잘 경청하지 않고 딴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예배는 참석했지만, 본인이 직접 들은 설교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짧은 “예배지만! 듣는 자세와 말씀을 경청함이 함께 병행되어야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말씀을 잘 경청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선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균형의 또 다른 축, 말씀을 잘 듣고 헌신하며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