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2-191204) ▶ 원하는 것을 응답받으려면(마가복음 7:24~30)!
평생 “50,000번 이상 기도 응답을 체험한 조지 뮬러에게 가장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 다섯 명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다행히 “셋은 복음을 영접했지만, 두 명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한 명은 뮬러의 인생 말년에 주님을 영접했지만, 다른 한 명은 뮬러가 죽을 때까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얼마 후 “마지막 친구는 뮬러가 자신을 위해 무려 52년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친구는 뮬러의 오랜 기도대로, 주님을 영접했고, 그 후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이렇게 간증했다고” 합니다. “뮬러 목사의 기도는 모두 응답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마지막 기도의 응답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 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기도하지 않고 응답을 원함은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서 “두로는 이방 땅이고, 주인공도 수로보니게 여인,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본문과 “병행 구절인 마 15:22 절은 여인의 어린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 말씀합니다. 흉악하다, “카코스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다. 병들고 아프다. 유해하다.”란 뜻입니다. 이는 “여인의 딸이 아팠을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추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여인에게 딸의 치유는 가장 큰 기도 제목이었을 것이고, 이를 고치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어요?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던 차에, 주님을 만나서 아이가 치유” 받았습니다.
본문 30절은 “여인이 귀가해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말씀합니다. 여인의 “애끓는 기도 제목이, 주님을 만남으로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이민자의 “삶을 보면, 외적으로 평안해 보이고, 나름대로 많은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깊숙이 살펴보면 모든 가정마다 말 못 할 기도 제목이 적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건강 문제, 경제적 문제, 신분 문제, 자녀 문제 등등,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면, 간절히 기도하는 중, 목 놓아 울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찾아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은혜로 응답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응답의 성격인데, 내가 원하는 대로 얻고 받는 것이 진짜 응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기대와 달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이 항상 더 온전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하나님 주시는 응답이 가장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후, 하나님께 응답받는 비결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에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 주시는 응답을 받으려면, 우리에게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주님은 두로의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셨지만, 두로에 가신 목적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사역을 위해 두로에 가셨다면,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계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당시 주님께서 피곤해서 쉬고, 재충전을 위해 두로를 찾았다!”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이 소문났고,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25절에서, 흉악한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고쳐달라! 주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엎드리다! “프로세페센은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을 완전히 낮춘 모습을 강조”합니다. 여인은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딸을 꼭 살려달라! 간청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여인을 개 취급해도,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주님은 비록 모욕적인 말을 했지만, 여인의 진심을 아셨기에, 본문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서 나갔느니라.” 병행 구절인 “마 15:28절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당시 “주님은 휴가 중이었지만, 여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간절함은 “더없이 정성스러운 마음이고, 일반적으로 마음에서 바라는 것이 매우 절실할 때, 간절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는 말로는 간절하지만, 실제 삶은 간절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실제로 “사람이 너무도 간절한 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며, 어떻게 생명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 수” 있겠어요? 오늘날 “우리 각자가 너무 많은 것을 누려서 아쉬움이 없고, 응답에 대한 간절함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지만, 간절한 구함보다 응답받아도 그만,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실제로 “여러분 중! 최근에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얼마나” 되세요? 악한 세상에서 “응답받고 하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우리의 간절함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간절한 기도에 가장 선하게, 가장 온전하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부림절은 황후 에스더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황후였지만, 왕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에스더는 생명을 걸고 왕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얼마나 긴장했던지! 이틀 연속 잔치를 열어 왕의 마음을” 살폈습니다. 게다가 “사흘이나 물도 안 마시고 금식하며, 주변 모든 동역자에게 함께 기도하며 금식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함으로 엎드린 결과, 유대인은 이방 민족의 핍박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이 이방 민족을 심판하는 부림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크게 성장하는 교회 12곳 중, 8개가 한국교회”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성장하는 교회 21곳 모두가 한국교회였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당시 “미국 목사의 평균 기도 시간이 8분이었던 반면에 한국 목사의 기도 시간이 30분이” 넘었습니다. 담임목사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한소망 교회가 다시 일어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성도 모두가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분이 “교회가 힘들고 어려웠다! 말할 뿐, 기도하자는 분은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속상하고 안타까움이 있겠지만, 과거에 관한 불평은 아무 능력” 없습니다. 오히려 “그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교회를 위한 간절한 기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오는 “12-09 일부터 내년 부활절까지 총 125일 동안 교회를 위한 한 끼 금식 릴레이 기도를 진행하려” 합니다. 먼저 “12-09 월요일부터 1월까지 시험적으로, 교인 각자가 정한 날짜에 한 끼를 금식하며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 원합니다. 교회가 “회복하려면, 교회를 사랑하는 기도의 끈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를 위한 기도 제목을 제공할 것이고, 모든 교인이 이에 동참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는 목사와 당회원을 넘어 전 교인이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교회의 상처와 나뉨이 치유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항상 간절함을 잃지 않고 지켜서, 주님 주시는 치유와 승리를 체험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 주시는 응답을 받으려면, 은혜가 가장 소중함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여인은 어린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그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래서 “여인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딸을 살려달라고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7절에서, 주님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말씀합니다. 해석하면 “주님은 엎드린 여인과 귀신 들린 딸을 모두 개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 주님 말씀은 여인을 외면함이 아니라, 그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여인을 외면했다면, 귀신들린 딸을 끝까지 외면했을 것”입니다. 당시 “여인은 딸도 버거운데, 그 자존심이 상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런데 “여인은 주님의 외면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간절히 주님께” 엎드렸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감정과 자존심보다 주님 주시는 은혜가 더 큼을 알고, 은혜를 더 사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 주시는 은혜를 가장 소중히 여겼기에, 여인은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3F 곧, Fashion, Female, Feeling이 우리 삶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Fashion “사람이 그래도 명품 가방과 옷이 있어야, 자존심이 서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한국의 경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을지언정 명품을 사려는 열정이” 뜨겁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유행도 지나고, 게다가 살이 찌면 그 옷이 소용없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Female, “현대는 과거와 달리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여성이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가 많고, 남편이 눈치를 보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 남편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보다 못할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사할 때! 남성이 먼저 이사 트럭 조수석에 앉아서 따라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이 강아지를 안고 트럭 조수석에 먼저 앉아” 있는답니다. Feeling, “현대인에게 감정, 자존심이 내 삶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너무도 중요”합니다.
실제로 “살면서 감정과 자존심이 상하면, 아무리 좋아도, 이를 외면하고 거부”합니다. 혹자는 “나는 저 인간이 가는 천국은 절대로 안 가! 말해서, 깜짝 놀란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은 “천국과 영생보다, 내 기분, 내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독교인 중! 은혜를 사모하지만,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하 6:23절을 보면,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었다.” 말씀합니다.
유대인에게 “여성이 자녀가 없다는 것은 저주받은 삶, 불행한 삶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남편이 있는데 아이가 없음은, 남편이 여인을 사랑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 사울의 딸 미갈을 데려오라! 명할 정도로 미갈을” 아꼈습니다. 그러나 “미갈이 언약궤가 들어올 때, 자신의 감정에 따라, 다윗의 열정적 찬양을 보고” 비꼬았습니다. 이에 “다윗은 언약궤 앞에서 가장 기뻐했던 자신을 무시한 미갈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자존심과 감정보다 하나님 찬양을 최고로 여긴 다윗의 미래는”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 주시는 은혜와 내 감정과 자존심 중, 무엇이” 먼저입니까? 오늘의 “문제는 은혜보다 내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 믿음까지 저버리고” 맙니다. 나와 “틀리고,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감정과 안 맞아서 교회마저” 떠납니다.
은혜보다 “감정이 먼저이기에, 내 믿음이 오락가락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과 자존심은 내 위주이기에, 매사를 부정적, 비관적으로 보고, 감사보다 원망과 불평이 더” 많아집니다. 반면에 “은혜를 소중히 여기면 용서하고, 품어주고” 이해합니다. 언제나 “은혜가 먼저이면,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영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최고로 아는 영혼의 기도 중, 과연 어떤 기도에” 응답하실까요? 그렇다면 “나는 감정과 하나님 은혜 중,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자존심보다 은혜를 더 소중히 여기기” 원합니다. 한 번뿐인 “내 삶이 이처럼 변화무쌍한 감정보다 은혜를 사모해서, 드리는 기도마다 항상 응답받고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