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1-191127) ▶ 풍성한 삶을 사모한다면(요 6:5~13)!

현재 “미국 최고의 부자는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로, 재산이 무려 1,170억 달러나”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 GDP로 계산해서, 제프 베이조스보다 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20세기 석유왕이었던 록펠러로, 1937년 당시 재산이 15억 달러”였습니다. 당시 “15억 달러는 GDP의 1.6%로, 이는 현재 액수로 무려 3,310억 달러나” 되었습니다. 결국 “록펠러 재산은 오늘날 미국 최고 부자인 제프 베이조스보다 3배가 많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 “기자가 록펠러와 인터뷰하며, 하루하루 삶이 행복한지!” 물었습니다. 이에 “록펠러는 내가 돈이 조금만 더 많으면 행복하겠다!” 답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기에, 물질적 부를 풍성함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있다가 없어질 물질보다 더 온전한 풍성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병이어 이적은 “사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고, 참으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께서 행하신 치유 이적과 표적을 보고, 주님을” 따라왔습니다. 무리가 “무작정 따라왔기에,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고, 이것이 주님의 긍휼을” 유발했습니다. 이에 “안드레가 한 아이의 도시락,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립니다. 마침내 “여성과 아이를 빼고, 남성만 5.000명이 배불리 먹고, 12 광주리가 남는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당시 “남성 5,000명에 여성과 아이가 배불리 먹었다면, 그 양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이에 “유대인은 이처럼 풍성함을 주신 주님께” 열광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주님을 세상에 오실 메시아로 생각해서, 억지로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주님께서 이 제안을 피하고 산에 기도하러 가심으로, 오병이어 사건은 끝이” 납니다. 오늘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의식주 문제, 가장 기본적인 삶의 결핍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미국에서 남는 음식물을 모으면, 세계 기아 문제가 해결된다!”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낫고, 안락하고, 풍성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세상보다 하나님 주시는 풍성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 주시는 풍성함이 있으면, 세상에서 당하는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다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조차, 하늘의 풍성함보다 땅의 풍성함을” 쫓아갑니다. 문제는 “주님을 만난 영혼은 누구나! 하늘의 풍성함을 얻고, 땅의 풍성함도 함께”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풍성함을 추구하는 방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주시는 풍성함을 누리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풍성한 삶을 사모한다면, 말보다 행동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5~6절에서 “주님께서 빌립을 시험하며, 어디서 떡을 사야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을지!” 물으셨습니다. 이에 “머리 회전이 빨랐던 빌립은 적어도 200 데니리온은 있어야 한다!” 답했습니다. 참고로 “당시 한 데나리온은 청년의 하루 품삯이었기에, 200 데나리온은 절대로 작지 않은 액수”였습니다. 또한 “안드레가 본문 9절에서, 한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가지고 와서” 말합니다.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주님 주변에는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익명의 소년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두 제자는 말로 주님께 다가갔지만, 소년은 실제로 드리는 행위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당시 “오병이어는 작은 소년이 한 끼 먹을 정도의 작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을 드린 행동이, 5,000명을 먹이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이의 작고 신실한 헌신으로 모두가 풍성해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희생하고 손해 보면 모두가 풍성해질 수 있다고 해도!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실하게 “드리는 행위보다! 말로 내 의견만 피력하려!” 합니다. 그러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 주시는 풍성함은 말이 아니라, 직접 행하는 헌신에 임함을” 기억합시다. 신앙생활에서 “무관심보다 말을 보태고, 관심을 가짐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풍성함은 말 몇 마디가 아니라, 손과 행동으로 움직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전 2:47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다!” 말씀합니다. 성경은 “초대교회가 물질을 통용하고, 성전에 잘 모이고, 기도하기에 힘썼다!” 말씀합니다. 초대교회의 “성장원인은 말이 아니라, 받은 은혜로 직접 행동하고 헌신함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주변 불신자들이 교회를 칭찬하고 인정”했습니다. 마침내 “초대교회는 행동으로 헌신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많은 “학자가 교회 구성원의 10~20%만 수고하며 희생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교회 마당만 밟는다!” 말합니다. 부족해도 “우리는 모두 한소망 교회가 부흥해서, 더 풍성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로 행동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받은 달란트로, 한 사역이라도 직접 동참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도 일인이 한 사역에만 헌신해도! 교회는 풍성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업과 모든 것을 뒤로하고, 교회 일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시간과 상황을 구별해서 헌신하자는 도전”입니다. 그렇게 “나부터 말이 아닌 행동으로 직접 수고할 때, 내 신앙이 살아나고, 교회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의 작은 드림과 헌신이 교회와 우리 자손의 장래를 더 밝게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풍성하기 원한다면,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1910년 “한국교회는 일본 식민통치가 시작되고, 백만인 구령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비록 수적으로 백 만인 동원에는 실패했지만, 한국교회에 큰 전통을” 남겼습니다. 바로 “날 연보(Day Offering) 제도로, 물질 대신 하나님께 시간으로 헌신했던 것”입니다. 당시 “백만인 구령 운동 후, 한국교회에 무려 274년, 10만일의 날 연보가 작정” 되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기독교인이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음을 이렇게” 경고합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가장 큰 걸림돌은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많은 성도가 직접 움직이며 헌신하지 않고, 예수 믿고 구원만 받으면 된다!” 생각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많아도! 이를 바르게 써야 풍성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받은 은혜로 헌신하지 못하면, 새롭고 더 큰 열매를 맺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풍성하려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작은 “헌신과 희생이 훗날 하나님 나라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받은 은혜는 많지만, 주님을 위해 봉사할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헌신해서, 더 큰 풍성함을 누리기” 원합니다.

2. 풍성한 삶을 사모한다면,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과 사도들은, 무리가 원하는 대로, 먹고 싶은 만큼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2절은,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말씀합니다. 없게 하라! “명령형 동사로, 반드시 버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당시 “작은 양이었던 오병이어로 풍성히 먹었기에! 그 후가 더 중요”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은 12 광주리 음식을 거두고 절대로 버리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어려운 영혼을 긍휼히 여기셔서 먹는 음식은 물론, 남은 물질을 아끼고 절약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유는 “혹시 또 다른 누군가가 남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소중한 음식을 풍성하게 먹은 후, 함부로 버리고 낭비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풍성한 국가에서 살아서, 버리는 것에 참으로” 익숙합니다. 저도 “먹고 살찌느니, 버리고 안 찌는 것을 택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은 먹고 싶지 않으면 안 먹고, 먹다가 남기는 음식에 관해 전혀 가책조차!” 없습니다. 동시에 “미국은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버릴지언정, 절대로 그냥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음식물이라도! 이것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수고하고 헌신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음식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영혼이 많음도 알아야!” 합니다. 양로원에서 “많은 노인이 음식을 못 먹어서 건강을 잃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습니다.

매끼 마다 “음식을 공급하지만, 혼자 먹을 수 없어서, 제공된 음식이 그대로” 버려집니다. 그렇게 “먹지 못함이 쌓이고 또 쌓이는 데, 어떻게 건강을 지킬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단순히 절약하고 아끼는 것보다, 절약하고 아끼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저 “나 혼자 더 잘 먹겠다고, 나를 위해서 아끼고 절약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아낌과 절약은 타인을 위한 사랑이어야 하고, 그래야 더 풍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자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낮은 구유에” 오셨습니다. 공생애 때는 “여우와 공중의 새보다 못해서,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때로 “제대로 식사할 시간이 없도록 바쁘셨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셨겠어요?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의 삶을 아끼고 절약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우리를 살리기 위함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도 아끼고 절약해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죽어가는 영혼에게 생명을 전할 수 있다면, 이것이 진짜 풍성함”입니다.

시카고에서 “사역할 때! 정말 신실한 권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길선주 목사의 후손이고 의사여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인도네시아 단기 선교에 참석했다가 오늘 본문 12절을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것”입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일이 없게 하라!” 당시 “자신은 너무 풍족해서 버리는 것이 많았는데, 인도네시아 오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과 너무도 달랐고,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도, 매년 단기 선교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의 옷은 그라지 세일에서 1~2불에 사도, 오지에서 헌신하는 선교사님은 최고로” 섬깁니다. 자신은 “의사여서 대충 입어도 괜찮지만, 선교사님은 그러면 안 된다는 지론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의사인 남편과 토요일 오후면, 선교지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을 살 때가” 많습니다. 저도 “그분의 영향으로, 지금도 설교 원고를 이면지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주님께 받은 것이 많기에! 할 수 있는 대로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물질과 기구는 더 아끼고 절약해야!” 합니다. 이유는 “교인이 피땀으로 드린 헌금을 함부로 쓸 수 없고, 꼭 필요한 곳에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끼고 절약한 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곳에 써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베푸는 곳에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풍성하고, 발전하고, 번영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그 풍성함을 절약하고 아껴서 주변을 살리는 선한 체험이 더 많아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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