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04-191009) ▶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면(마 13:53~58)!

중국 “지하교회 성도들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뜨겁습니다. 어떤 “지하교회 성도가 한국 기독교인처럼 되고 싶다! 기도 제목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선교사님께서, 정색하며, 안 됩니다. 당신은 15시간 동안 기차로 이곳에 와서, 매일 4시간씩 자며 5일 동안 무더위에도 이렇게 간절히 예배드렸지만, 한국은 다릅니다.” 말했습니다. 이어서 “선교사님은 한국 교회 기독교인이 중국 지하교회와 왜, 어떻게 다른지! 실례를” 드셨습니다.

어떤 “가족이 예배 후 귀가 중! 아내가, 오늘 목사님 설교가 졸렸다!”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성가대는 더 심했어! 말하자, 아들의 말이” 이랬습니다. “그럼! 1000원 내고 본 예배가 그렇지! 뭘 기대해요!” 히 4:12 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말씀합니다. 말씀은 “분명히 능력이 있기에! 그 말씀에 맞는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혹자는 깊은 은혜를 받지만, 혹자는 그냥 교회 마당만 밟고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면! 하나님 말씀 앞에 서는 내 자세와 태도를 다시 한번 깊이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 주변의 무리에게 많은 비유를” 가르쳤습니다.

당시 “많은 영혼이 다가와서 주님의 비유를 들었지만,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조차! 다시 비유를 설명해 주어야, 이해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다양한 비유를 가르치신 후! 본문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고향 나사렛 회당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오히려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다양한 “질문으로 주님을 공격했고,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주님은 많은 기대와 애정으로 고향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고향 사람들이 말씀 앞에 보여준 그릇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말씀을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설교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통해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타인과의 대화, TV를 통해, 책을 통해! 자연을 통해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날 방법이 많지만! 실제로 주님을 만나는 영혼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은혜 충만을 원해도! 현실은 영적 갈증이 점점 더 심해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 말씀을 향해 더 신실한 태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말씀을 들을 때! 방해되는 요소를 알고, 이를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이에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방해 요소가 뭐고, 이를 어떻게 이길지!” 살펴봅시다.

1.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면, 눈앞만 보는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54절에서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매우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55절은,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주님을 거부하며 배척”했습니다. 당시 “주님은 회당에서!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 간절함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했지만, 고향 사람들은 가족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귀로 들었지만, 진심으로 듣지 않았고, 심지어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말씀을 들었지만, 하나님 말씀으로 듣지 않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붙잡혀” 있었습니다. 각자가 “보고 듣고, 체험하고 아는 것에 집착하여, 말씀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잘못된 태도를 아셨기에! 이적 하나 없이 타지로 이동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내 선입견, 고집과 아집으로 말씀을 들으면! 영적 통로가” 막힙니다.

실제로 “많은 신앙인이 말씀을 주시는 대로 받지 않고, 내 상황에 맞추어서” 듣습니다. 지금 “내 상황에 맞으면 아멘! 내 상황과 다르고 불필요하면, 아예 마음을” 닫습니다. 심지어 “이 말씀은 누가 들어야 해! 오늘은 내가 잘못 왔어!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에게 천국 복음을 주시는데, 우리는 매일 내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며” 삽니다. 두렵게도! “오늘 내 신앙의 자세와 태도가 나사렛 사람들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세요?

우리가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려면!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서 더 깊어져야!” 합니다. 이민자로 “물질도 중요하지만, 물질보다 더 중요한 영생과 구원을 먼저 봐야!” 합니다. 자녀의 “진학과 양육도 중요하지만, 훗날 주께서 우리 자녀를 쓰실 비전을 봐야!” 합니다. 이처럼 “관점에 따라 우리는 영원을 볼 수 있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눈앞만 보고 현실에 갇혀 있다면, 누구도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주님을 만난 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대도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기에! 그 소득이 다른 어떤 세리보다” 많았습니다. 실제로 “재산 절반을 드리고, 토색한 것을 네 배로 갚아도 될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이유는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까지! 매일 눈앞의 물질만 취하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던 “삭개오가 주님에 관해 듣고, 주님을 기다렸고, 주님을 만나 그 말씀을 집중해서 깊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관점이 바뀌어서 눈앞보다 영원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땅에서 누리는 복보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삭개오가 눈앞만 보던 시각을 바꾸어서 주님 말씀을 영접한 후! 주님은 눅 19: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은 “몰랐지만, 주님께서 삭개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아시고 이렇게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눈앞만 보고 살아가면, 누구나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 눈앞보다 영원함을 볼 때! 부족한 내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침내 “내 인생이 바뀌고, 우리 가족과 자녀들, 교회가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시 121:1절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말씀합니다. 부족한 “내가 삶의 시각을 바꾸려면! 나부터 항상, 내 고집과 주장이 온전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기 관점과 시각이 탁월하다, 생각하지만! 실상,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서 더 멀리, 더 깊이, 더 높게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 “어떤 선배 목사님이 제게 한 말이 지금도 저를 두렵게” 합니다. “정 목사! 교회는 목사만큼 성장하는 거야! 자네가 매일 더 깊어지길 바라네!” 생각해 보면! “우리 가정과 자녀는 부모가 멀리 보는 만큼, 관계도 내가 멀리 보는 만큼 성장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눈앞만 보고 살아서, 넘어지고 아파한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눈앞이 아니라 더 멀리, 더 깊게 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내 자세와 태도가 바뀌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앞만 보는 한계를 이기고, 주님 말씀을 바로 듣고, 주를 만나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면, 비판과 평가보다 주시는 말씀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본문 57절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지라!” 말씀합니다. 배척하다, “원어 에스칸달리존로는 길 가운데 넘어지는 장애물을 놓다. 걸림돌이 되다.”는 뜻입니다. 해석하면, “주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데! 고향 사람들이 말씀 전파에 장애물,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주님께서 고향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고 생각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는데! 고향 사람들의 태도가 이처럼 배타적이고” 차가웠습니다.

이에 “주님은 본문 57절에서, 선지자가 고향과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는다!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당시 “수많은 영혼이 주님을 찾아와서, 하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고 그 인생이 변화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삐딱하게 듣고, 평가부터 하려” 했습니다. 마침내 “성자 하나님을 직접 보고, 그 음성으로 말씀을 들었지만, 아무런 은혜도 누리지 못하고, 마침내 주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님은 고향에서 계획하셨던 모든 것을 접어야 했고, 그 결과가 본문 58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결국 “다른 지역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체험했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 말씀을 비판하고 평가해서, 부정적 태도를 고집해서, 마침내 말씀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평가와 비판의 대상이 아니고, 주시는 그대로 받아야 할 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말씀을 받기보다 평가하고, 점수 매기며 듣기에! 은혜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때로 “성가대의 찬양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기도” 합니다. 실제로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말씀과 찬양을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겠어요? 문제는 “모든 신앙인이 말씀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틀린 줄 알지만, 이 그릇됨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일 저녁에 “저는 습관적으로 아내에게, 오늘 설교가 어땠는지!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아내의 “답변이 긍정적이면 좋지만,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속으로 꼭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다음 주일부터 당신이 직접 설교하세요!” 안타깝게도! “성도와 목회자 모두! 말씀을 평가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주님께서 지금 내게 필요하기에! 내가 꼭 들어야 하기에, 주의 종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결국 “말씀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내게 주시기에! 가감 없이 주시는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 앞에 겸손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겸손하게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겸손함으로! 금식하며 시내 산에서 받은 말씀이 십계명으로” 남았습니다. 다윗도 “범죄 후! 나단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겸손히 받은 후!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주시는 그대로 받는 영혼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유명한 “성서학자인 박윤선 목사님 가정에! 제자가 방문했는데, 마침 가정 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자는 “함께 가정 예배에 참석할 것을 기대했는데! 갑자기 박 목사님이 설교를 ” 부탁했습니다. 제자가 “극구 거절하자, 박 목사님께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 주세요! 저와 우리 가족이 듣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바로 이 자세가 부족하기에! 말씀이 있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방황하며” 삽니다. 많은 경우!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말씀 앞에 서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맙니다.

말씀 앞에서 “내가! 내가! 내 자아가 너무 강해서! 주시는 말씀을 겸허하게 듣지!” 못합니다. 내가 “말씀 앞에서 박윤선 목사님의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주시는 말씀마다 은혜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말씀의 은혜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 미래를 영생까지 이끌어갈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기에! 이제부터라도! 말씀 앞에 겸손함과 사모함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태도, 말씀을 듣는 태도, 말씀을 묵상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풍성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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