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님이 교회학교를 방문하여! 한 학생에게 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는지!” 물었습니다. 아이가 “정색하며! 제가 안 그랬어요! 말하자! 옆에 있던 교사가 이렇게” 두둔합니다. “목사님! 애가 말썽은 좀 부려도 거짓말은 안 합니다. 여리고는 애가 무너뜨리지 않았어요!” 옆에 있던 “교회학교 담당 장로님도 일부러 나서서 이렇게 ” 거들었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학교 아이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면, 빨리 당회를 소집해서 복구해야 합니다.”
유머지만 “교회학교 어린이, 교사, 장로님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너무도 무지함을” 보여줍니다. 안타깝지만 “이렇게 성경! 하나님 말씀에 무지한데! 어떻게 영적으로 깊어질 수” 있겠어요? 이렇게 “성경에 무지한데! 어떻게 주님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겠어요? 사도 바울은 “고전 1:2절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교회를 성도 각자! 우리가 교회라고” 묘사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깊어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가 영적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환언하면! “우리가 영적으로 깊어지면! 한소망 교회는 더더욱 영적으로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절은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고, 유대의 지도자이다!” 말씀합니다. 특히 “지도자! 아르곤은 통치자, 왕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산헤드린 공회원을” 의미합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총 70명으로 구성되었고, 유대의 최고 의결기구”였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높은 지위에 있던 니고데모가 영적 갈급함을 가지고 주께” 왔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주님이 행하신 표적에 관해 물었던 반면에! 주님은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니고데모는 율법 전문가였지만, 주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 10절에서! 이스라엘 선생으로 거듭남의 의미도 모르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문제 역시! 점점 더 영적으로 얕아져 감에” 있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복음과 하나님의 역사는 같지만! 오늘 우리의 영성은 점점 얕아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적인 깊이를 잃어가면서! 교회는 더 약해지고! 사회적 비판과 조롱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이 살아있다면! 우리 신앙은 날마다 더 자라가고, 깊어져야!” 합니다. 이유는 “신앙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 신앙이 이전과 달리! 점점 더 깊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 영적으로 더 깊어지려면!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본문 3절에서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다! “겐네데 아노덴! 이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거듭남이 이 땅이 아니라, 위로부터 공급하시는 하나님 은혜로만 가능함을” 강조합니다. 달리 말하면! “거듭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에서, 니고데모는 주님 말씀에 엉뚱한 말로” 답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난다! 이 말에 그 생각이 고정되어 있어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도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주님께 물으려고 왔지만, 자신만의 고정관념이 너무도 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를 보면! 교회마다 니고데모와 같은 영혼이 너무도” 많습니다. 특히 “오래 믿었고, 직분도 있고, 열정도 있지만, 영적인 깊이가 현저하게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자신이 아는 것! 고집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거가 틀렸음을 알지만! 과거의 것을 자랑하기에 급급하기까지!” 합니다. 두렵지만! “이는 새롭게 주어지는 말씀 앞에서! 깊은 고정관념을 깨지 못한 모습”입니다.
내 “고정관념! 불완전한 지식과 체험이 성령님의 임하심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에 오래 출석해도! 열정이 있어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앙만 반복할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사람이 만든 것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고, 상대적이고 가변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불변하고 항상 한결같이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밖에”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깊은 만남! 기도의 응답! 성령 충만을 체험하기” 원하세요?
그렇다면 “내 안에 굳게 자리하고 있는 고정관념을 빨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기서 “고정관념은 자기 의로움과 내면의 쓴 뿌리! 교만과 무지, 때로 고집과 아집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고정관념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면! 절대로 영적으로 깊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세상은 점점 새로워지고! 새로운 것을 수용해서 발전하고 있는데, 기독교인이 과거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제자리걸음을 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주도할 수” 있겠어요?
출애굽 “여정을 보면, 제1세대 리더로 모세와 아론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아론보다 모세가 더 영적으로 깊었고, 하나님도 모세를 더 인정”하셨습니다. 특히 “아론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선민 공동체를 그릇되게 인도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모세가 아론을 책망하자! 아론은 자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백성이 준 금을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모세와 달리! 아론이 이처럼 망령된 행동으로 크게 범죄”했을까요? 모세는 “시내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과거의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보다! 과거 애굽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평생 “익숙했던 애굽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선민이 가진 애굽의 고정관념을 깨는데! 무려 40년! 장구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고정관념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넘어질 경우도” 많습니다. “저 사람은 안 돼! 틀렸어! 절대로 변하지 않아! 싫어! 용서 못 해!” 반면에 “나는 항상 옳고 의로워! 항상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여! 관계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비록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던 생각이라도! 옳다 여겨져도! 성령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내 안에서 내 영적 깊이가 깊어지도록 말씀하시고 도전”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내 생각과 성령님의 음성이 부딪히면! 반드시 성령님 의견을 붙잡아야!” 합니다. 새롭게 “주시는 말씀을 더 사모하며, 하늘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내 발전을 가로막는 고정관념을 넉넉히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매일 또 매일! 영적으로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매일의 삶에서 새롭게 주시는 도전을 붙잡고, 고정관념을 이기고 더 영적으로 깊어지기” 원합니다.
- 영적으로 더 깊어지려면! 성령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 거듭남을 말씀하는데!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했습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의 모습이 답답하셔서, 본문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주님은 본문 6절에서! 영과 육의 차이점을 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나아가서 “본문 7절에서! 주님은 거듭남이란 도전을 놀라운 것!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 ”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놀라다! 다우마조는 이상하게 생각하다. 깜짝 놀라다!”란 뜻입니다. 이는 “니고데모가 주님 말씀을 듣고, 깨닫기보다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서! 니고데모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고,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고도! 깨달음이 없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선생! 원어인 디다스칼로스를 보면!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당시 니고데모가 공회원 중에서도! 존경받는 탁월한 율법학자였음을” 뜻합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니고데모는 영적인 깨달음이 없어서! 영적인 깊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 깨달음은 “지능지수와 무관하고, 연륜은 물론 직분과 달리! 성령님의 은혜를 얼마나 깊이 입는지! 여부로” 결정됩니다.
영적 깨달음은 “성령님께서 값없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면, 안 보이던 것이 또렷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잘 들리게” 됩니다. 감추어진 “메시지가 들리고, 삶의 고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내 삶에 무엇을 원하시고,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무엇을 주실지!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의 영적 깨달음이 얕음은 그만큼 영적 깨달음에 대한 사모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깨달음이 “주는 엄청난 유익과 능력을 체험해 보지 못해서! 구하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먹고 살기에 바빠서! 영적 깨달음은 목회자와 중직자의 몫이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영적 깨달음을 잃으면, 사실은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경건한 수도사였지만, 항상 죄의 문제로 인한 고민이” 깊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로마를 방문하여, 산타클라라 28계단 앞에” 섰습니다.
당시 “산타클라라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산타클라라는 “주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올라가셨던 계단”이었습니다. 당시 “총독 관저에 있던 28개의 계단을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로마로 옮겨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이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죄 용서를 갈구한다고” 합니다. 당시 “죄 문제로 고민하던 루터에게! 산타클라라는 어쩌면 큰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무릎으로 대리석 계단을 오르는 중!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체험합니다. 성령님은 “롬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이 섬광처럼 루터의 가슴을” 쳤습니다. 루터는 “당시 성령님이 주시는 깨달음에 순종하여, 계단 올라가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신 깨달음을 기초로! 종교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의 “깨달음은 루터만이 아니라, 수많은 영혼을 영적으로 더 깊게”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내 삶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주고, 새롭게 역사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있어야! 이 땅에서 시간 낭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선택과 결정의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 부족한 제가 하나님 말씀! 하나님 의도를 바르게 깨닫고 행하게 하소서!” 눅 11:13절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합니다. 내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성령님 주시는 깨달음을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항상 성령님 주시는 깨달음으로 더 영적으로 깊어져서! 날마다 더 크게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