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드리다 보면! 가끔 피곤해서, 또는 하나님 집이 너무 편해서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혹자는 “깨려고 노력하는 분도 있고, 혹자는 아예! 안방처럼 주무시는 분도”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처럼 졸았던 분이 예배 후! ‘목사님 은혜받았습니다!’ 인사를 크게 하곤” 합니다. 생각해 보면, “같은 예배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회자를 통해 말씀을 듣지만! 모든 영혼이 다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받은 영혼과 그렇지 않은 영혼이 체험하는 은혜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 마당만 밟는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 만나는 체험적 신앙을 가지길” 원합니다. 본문은,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고, 그곳에서 주님께서 공생애 중! 행하신 첫 번째 이적에 관해”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 결혼식은 보통 한 주간 지속하였고, 주님과 마리아! 제자들과 여러 손님이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참석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그 음성을 들었지만, 모두가 은혜받고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혹자는 “주님께 무관심했고, 혹자는 좋은 포도주만 먹고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록 소수였지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영혼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살려면! 은혜받으려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기서 “만남은 내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내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우리 삶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고! 신령한 영적 체험과 간증이 있고,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누구도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왜 주님을 만나야 하는지! 주님을 만난 후 그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바로 알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영혼이 주를 만난 후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삶이 이전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당시 “많은 혼주는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고, 나중에 덜 좋은 포도주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은!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포도주가 주님의 능력으로 확실하게 변화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당시 “결혼식 참석자 대부분은 주님께서 더 나은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모두다! 처음보다 나중 포도주가 훨씬 더 좋아졌음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을 보면, 첫 표적 후!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나름대로 주님을 믿고, 주님께 헌신을 약속한 영혼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에서, 사도 요한은 유독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당시 제자들의 믿음이 이전보다 더 굳건해지고, 주님을 더 신뢰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한 영혼은 누구나 그 삶이 이전보다 더” 나아졌습니다. 많은 “이민자가 미국에 이민 온 이유는 이전보다 더 나아지길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나아짐의 성격인데! 과거보다 편안하고 더 안락해짐이 참된 나아짐이” 아닙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부해지고, 더 좋은 차를 타는 것도 나아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적인 나아짐은 시간이 갈수록! 더 퇴색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기계는 처음 샀을 때가 최고이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치가” 떨어집니다. 문제는 “기계뿐 아니라, 인간의 육신!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여성은 나이가 들수록! 남성 호르몬이 강해져서 점점 우악스러워져” 갑니다. 반면에 “남성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여성 호르몬이 강해져서 잘 울고, 점점 약해져” 갑니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것, 인간의 육신과 인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퇴색해져”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시는 것은 처음이 가장 나쁘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좋아집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면! 그 후! 영적으로 더 깊어지고, 삶에 편안보다 평안함이” 임합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영혼이 다 주 안에서 나아짐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짐은 “오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영혼만 누릴 수 있는 영적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 3:8절에서, 자신의 과거를 모두 배설물로” 고백합니다. 과거 “바울은 당대 최고 엘리트!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상류층이었지만! 그렇게 세상 적으로 화려했던 과거에 붙잡혀 살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주를 만난 후! 바울이 더 나빠졌다고 하지만! 정작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더 나아진 삶으로 하나님 일을 힘있게” 감당했습니다. 최근! “저희 가정은 운전으로 서부 끝에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19년 전 “이민 가방 두 개로 시작한 삶이 지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웠고!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아플 때도” 했습니다. 그러나 “회고해 보면! 주께서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여기까지” 이끄셨습니다. 우리 “삶이 절대로 녹록지 않고, 가정마다 많은 문제로” 아파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절대로 인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해결되고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관점을 동시에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은혜로! 긍정적으로! 더 나아짐의 관점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채우심이” 임합니다. 반면에 “괴롭고 어렵다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삶은 더 힘들어” 집니다. 지금 “누구에게 말 못 할 어려움과 아픔으로” 힘드세요? 낙심보다 “도마처럼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다시 고백하는 신앙부터 추슬러야!” 합니다.
내 신앙이 “바로 서고, 주님을 만남이 더 굳건해져야 더 나은 은혜가 내 삶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워도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선한 것!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을 깊이 만남으로! 더 좋은 것 주시는 주님과 함께 승리하기” 원합니다.
-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을 체험했습니다.
본문 3절은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포도주가 없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포도주가 떨어졌다! NIV는 포도주가 바닥 났다(Wine was gone)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께 포도주가 없다! 단정적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당시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고, 손님을 잘 대접하지 못함은 큰 문제”였습니다.
마리아도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기에! 주님께 간곡히 부탁했던 것”입니다. 특히 “본문 6절은, 혼주 가정에서 돌 항아리가 여섯 개 있었다.” 말씀합니다. 학자들은 “이 정도 돌 항아리라면, 무려 100ℓ의 물을 채울 수 있었다!” 말합니다. 결국 “주님은 완전히 빈 항아리에 최고의 포도주를 가득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이처럼 문제를 해결하심을 물 떠 온 하인 외에는 잘 몰랐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포도주 문제를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셔서! 모두가 기쁘게 잔치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시련과 아픔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모두 연약해서! 누구도 자신의 문제를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인생의 문제는 하나가 해결되면, 대부분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실례로 “이민자로 살아갈 때! 경제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가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런데 “이를 다 아시는 주님께서 요 16:33 절에서” 말씀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구약의 “이사야 43:1절은! 연약한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힘과 용기를” 줍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알건 모르건! 인정하건 부인하건 예수 그리스도만 내 문제의 유일한 해결자”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땅을 살아가는 어느 부모도 능력이 있으면서! 힘들고 어려운 자녀!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자녀를 방관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살리신 주님의 자녀가 힘들어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를” 외면하시겠어요? 결국 “성도는 한결같이 주님 안에서 살아가야! 그 어떤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백화점 왕이었던 워너메이커를 잘” 압니다.
워너메이커의 “성공비결 중! 세 가지를 소개하기” 원합니다. “첫째!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한다! 둘째! 책을 가까이하되,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매일 읽는다! 셋째!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진다.” 당시 “워너메이커도 문제와 힘든 점이 많았겠지만! 주님과 만남 안에서 살아가며, 어려움과 문제를 극복해 가면서! 영적인 승리와 경제적 부를 일구어 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문제가 우리는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만남 밖에 있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워너메이커처럼 살아가야 함을 알지만, 현실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실제로 “주님만이 내 문제의 해결자임을 알면서도! 주님을 만나려 하지도” 않습니다. 급하고 “어려우면! 먼저 사람을 찾고, 그래도 안 되면 나중에 주님께” 옵니다. 말씀보다 “사람의 지혜와 경륜! 경험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더 하나님과 만남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문제가 내일을 향한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만남 안에서 문제에 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