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수아 묵상(03-200304) ▶ 요단을 건너려면(수 1:10~18)

1892년 “록펠러가 시카고 대학을 설립했지만, 1929년까지 학교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29~2000까지! 시카고 대학은 무려 73개의 노벨상을 받는 세계적 명문대학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로버트 허친스 총장이 수립한 시카고 플랜에” 있었습니다. 시카고 플랜은 “입학생이 철학 고전 100권을 읽어야 졸업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학생들은 졸업을 위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등 고전 철학을 읽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웠지만, 고전을 읽어갈수록 세상을 보는 시각이 점점 더 깊어지고” 성장했습니다. 이처럼 “고전을 보는 열정으로, 시카고 대학은 세계적 명문으로 점점 성장해”갔습니다. 성장과 “성숙은 이에 상응하는 계기와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모두가 성장과 성숙을 원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노력도 없고, 성장을 위한 방법도 잘” 모릅니다. 모세가 죽고 “하나님은 가나안 전쟁을 앞둔 선민과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말씀을 묵상하라, 내가 함께할 것이다. 담대하라! 힘내라!” 그만큼 “가나안 전쟁이 심히 중요해서, 선민에게 절대로 물러설 수 없고, 패할 수도 없는 전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가나안 전쟁 직전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당시 “전쟁을 앞두고, 조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요단 동편의 르우벳 갓, 므낫세 반 지파와 합력도 공고히” 했습니다.

양식을 준비해서 “사흘 후 요단을 건너도록! 미래를 향해 더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모두가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실제로 “선민과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며, 더 큰 성숙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민자가 한국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나은 환경에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에서 성장과 성숙을 소망하며 미국에” 왔습니다. 혹자는 “주재원이었지만, 더 나아지려고 귀국보다 이민자의 삶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더 나아지려고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삶을” 삽니다. 더 나아지려고 “아프고 힘들어도, 제대로 내색 못 하고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요단을 건너는 성장, 나아짐은 절대로 내 노력과 결단으로 되지!” 않습니다. 만일 “내 노력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더 나아지려면, 안전하게 요단을 건너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렴풋이 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단을 건너서 더 나아지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원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죄인인 우리가 요단을 건너서 더 나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요단을 건너려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선민에게 양식을 준비하라! 3일 만에 요단을 건널 것이다!” 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명령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어 누구에게 전달했는지! 그 경로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단을 건너가라! “이 명령의 근원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셨고, 여호수아는 선민의 관리에게, 관리들은 일반 백성에게” 전달했습니다. 특히 “선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명령을 듣고, 전혀 불평 없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본문 12절에는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에게 명령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두 지파 반은 이미 요단 동편에 삶의 터전을”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더는 요단 서편에서 땅이 필요 없었지만, 이들을 향한 모세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이 땅을 분배하기까지, 전쟁이 끝나기까지 전쟁에 참여하라!” 이제 “그렇게 믿던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새 리더가 되었지만, 두 지파 반은 여호수아 명령에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한 걸음 “더 도약하는 성장은 하나님의 선한 이끄심에 순종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순종은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외부의 강압과 억압에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순종은 명령하신 분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내가 결단하여, 내 의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에게, 다른 어떤 덕목보다 순종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삼상 15:22절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배도 중요하지만, 주신 말씀 그대로 순종함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순종은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인이었던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명령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을 유지하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말씀 그대로 순종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창 12:2~3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영혼에게 더 큰 성숙과 성장을” 허락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요단을 건너지 못함은 말씀이 없고, 하나님 주시는 용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이끄심은 차고 넘치지만, 우리가 이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듣지 않고, 경험과 상황에 따라, 가려서” 듣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에는 ‘아멘!’ 화답하지만, 싫어하는 말씀은 표적 설교라고” 불평합니다. 순종은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음성을 따라가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추종”입니다. 추종에는 “아무런 은혜가 없지만, 순종에는 항상 하늘의 복과 응답이” 있습니다. 어떤 왕이 “신하들에게,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워라!” 명했습니다. 모두가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울 수 없음을 알고 포기했지만, 한 명은” 달랐습니다. 우직하게 “계속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니,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빛나는 것이 보였고, 그곳을 파보니 큰 황금 덩어리가 나왔던 것”입니다.

왕은 “신하들이 왕의 말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대로 순종한 신하에게 큰상으로 황금 덩어리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반복하지만 “세상의 상식을 추종할 때, 그 어디에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심은 주고자 하는 상급과 도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은 내게 꼭 필요하기에, 내가 반드시 따라가야 하기에 주시는 명령”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만이 가장 온전하고, 가장 선하기에, 따지지 말고,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지금의 내 삶이 한 걸음 더 나아지고, 눈앞의 요단을 건너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주시는 말씀마다 ‘아멘!’하며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한 걸음 더 발전하고 도약하는 승리가 충만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2. 요단을 건너려면,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3절은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말씀합니다. 여호수아는 “르우벤과 갓 지파, 므낫세 반에게 일방적으로, 강압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두 지파 반은 모세를 통해서, 요단 동편에 삶의 터전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파가 정착하기까지, 가나안 전쟁에 끝까지 동참하겠다! 약속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 모든 과정을 알고 명했고, 본문 16~18절에서, 두 지파 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당신 명령에 순종하겠습니다. 모세처럼 당신을 섬길 것입니다.” 실제로 “두 지파 반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여호수아 명을” 받았습니다. 묵상할수록! “요단을 건너기 전! 여호수아와 두 지파 반은 서로를 깊이” 존중했습니다. 그렇게 “존중했기에, 두 지파 반은 가나안 전쟁이 승리하는 데, 서로 합력했고, 함께 큰 공을” 세웠습니다.

교회에서 “차별과 폄하는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고 감정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더 나은 미래, 요단을 건너는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문제는 “갈등과 분쟁이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사소한 일로 인해 확대”됩니다. 특히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작은 언행이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깹니다. 서로 “차분히 대화하면 풀릴 수 있지만, 감정과 편견이 더” 큽니다. 이처럼 “존중을 잃은 교회는 절대로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존중하는 인간관계, 공동체는 항상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존중은 “나도 중요하지만, 너도 중요하다는 마음이고, 네 의견도 중요하다는 인정”입니다. 존중은 “타인을 하나님 자녀로, 동역자로 인정할 경우만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마침내 “존중은 승리하게 하지만, 멸시와 차별은 끝없는 추락만 반복할 뿐”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때!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다른 제자보다,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가장 흥분했고, 가장 크게 항의”했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목요일 밤까지, 서로 크다고 다투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역사를 주도했지만, 요한은 뒤에서 조용히” 있었습니다.

이유는 “성령 체험 후! 베드로와 요한이 서로를 존중함으로 합력하고 동역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령 체험 후!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들이 서로 크다고 싸운 예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관계가 더 깊어졌고, 그 관계와 동역이 더 나아지는 은혜로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 7:12절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합니다.

내가 “존중받기 원하면 타인도 똑같기에, 내가 먼저 타인을 존중해야 요단을 건너는 은혜, 성숙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상대방이 먼저 고개 숙이고 다가오면 받아주겠다! 착각하며” 삽니다. 존중하면 “신앙생활이 달라지고, 기도가 깊어지고, 누리는 은혜도 더” 커집니다. 어떤 남편이 “아내의 생일에 케이크를 사 오는 중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점점 남편이 싫어졌고, 남편을 ‘장애인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이 자신을 ‘장애인 아내로’ 부름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이 부부가 다른 동네로 이사했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남편을 ‘박사님!’으로 부르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새로 “정착한 동네 사람이 자신을 ‘박사님 사모님으로!’ 부르며 존중했던 것”입니다. 존중과 무시는 “내가 뿌린 대로, 바로 내게 다시 돌아옴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존중을 뿌리면 존중이 오고, 무시를 뿌리면 무시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중은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존중하면 내가 더 높임을 받고, 매사가 형통하고 원만한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가족과 동역자부터 존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면서, 멀리 있는 사람을 존중함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존중하고 높이며 더 나은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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