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수아 묵상(02-200226) ▶ 예비하신 복을 누리려면(수 1:7~9)

뉴욕 메츠 “소속, 요에니스 세스페데스의 연봉은 무려 2,950만 달러에” 달합니다. 그런데 “최근 2,350만 달러를 제외된 600만 달러만 연봉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작년 5월! 자신의 농장에 놓인 덫에 걸린 멧돼지를 처리하는 도중에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세스페데스는 2019년 시즌, 많은 경기에 결장할 수밖에 없었고, 메츠 구단은 귀책사유를 세스페데스에게 물어 연봉을 삭감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엄청난 연봉을 못 받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살면서 “내가 충분히 받고 누릴 복이 있지만, 모두가 예비 된 복을 누리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복은 “내가 직접 받고 누리고 체험해야 진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예비하신 복만 받아도 풍성할 수 있지만, 모두가 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전쟁 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선민에게 다양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가나안을 땅을 네게 주겠다. 너희 발로 밟는 모든 땅이 너희 것이 될 것이다! 힘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다.” 문제는 “당시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모세가 죽었기에,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선민이 예비 된 복을 누릴 비결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을 지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고 평탄할 것이다.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당시 “선민과 여호수아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무조건 가나안을 향해 전진해서, 하나님 예비하신 복을 쟁취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가 누리고 받을 복, 나를 위해 예비하신 복이 참으로 많고 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도 많지만, 반면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슬픔과 아픔, 시험과 상처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려움과 상처보다, 하나님 예비하신 복이 훨씬 더 큼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복만 충분히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충분히 누릴 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중!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과 멀어지고, 이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복이 가지는 능력과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무 “세속적인 것에 함몰되어서,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아온 잘못된 삶의 결과”입니다. 본문에서 “가나안 땅! 예비하신 복을 얻기 위해 선민과 여호수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예비하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선민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모세가 죽고” 말았습니다. 또한 “가나안 전쟁이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이었기에, 군사 전략과 용병술이 가장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쟁 준비보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함을” 명령합니다. 본문 7~8절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명한 그 율법을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율법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다 지켜 행하라!” 말씀합니다.

이유는 “가나안 전쟁은 전쟁 준비가 아니라, 말씀으로 이겨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행하면 선민 공동체가 항상 형통할 수 있다!” 약속했습니다. 선민이 “받아야 할 예비 된 복!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점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의 가나안 전쟁도 혈과 육이 아닌 영적 전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바울은 엡 6: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은 세상 철학과 과학, 상식이 아니라, 오직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하나님 말씀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말씀으로 예비 된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알지만, 말씀과 점점” 멀어집니다. 성경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 도전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씀 안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말씀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흔들립니다. 게다가 “우리가 성경에 관해 무지하면서도, 성경을 찾아서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TV 보고, 취미 생활을 할 시간은 있지만, 말씀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모르면서도! 아무런 가책과 불편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데도! 나는 기독교인이야! 나는 천국에 갈 수 있다! 나는 전혀 문제없어!” 착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예비하신 복을 받으려면, 다시 말씀 묵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왕하 22:13절은 “요시야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 책을 보고 선언한 내용”입니다. 당시 “남 유다는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아서 하나님의 복은 고사하고, 진노가 더” 컸습니다. 이에 “요시야는 국가가 어렵고 힘든 이유가 율법과 멀어졌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복! 말씀을 찾게 하심으로, 역사를” 바꾸셨습니다. 그동안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 예비하신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부담을 주는 절기가 아니라, 예비하신 복을 찾아가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요시야 시대처럼, 하나님 예비하신 복은 다시 말씀 앞에 설 때만 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이 악하고 질병이 창궐할수록! 우리는 더 겸손함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만이 “참 위로와 은혜, 세상을 이기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특새 동안, 다니엘서를 묵상하며 하나님 예비하신 복을 찾으려!” 합니다. 이민자였던 “다니엘이 악한 세상에서 말씀으로 예비 된 복을 풍성히 누리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어려움과 박해, 차별이 있던 사회에서, 다니엘은 말씀으로 예비 된 복을 풍성히” 누렸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바로 내가! 우리가 이 예비 된 복을 받아야 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민자로 “바쁘고 분주하지만, 예비 된 복을 받기 위해 다시 하나님 앞에” 섭시다.

신학교 재학 때! “길선주 목사님 후손 중 한 분이, 어떤 놈이 새벽기도는 만들어서!” 불평했습니다. 특새를 통해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내 영혼은 더 강건하게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다시 소생해야! 내 육체적 건강과 삶이 예비 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사순절에 말씀 앞에 서서! 우리의 기도 제목과 문제가 해결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예비 된 복을 놓치지 않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예비하신 복을 받으려면,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유대인은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형통하리니!” 이처럼 “반복된 표현을 통해서! 당시 가나안 전쟁 전! 모두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말씀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전쟁에서 승리하고 형통함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할 비결이 본문 9절에” 나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당시 “여호수아와 선민이 예비 된 복을 받기까지, 장애물과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가장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와 선민에게, 함께 하겠다!”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죄짓고 넘어져도! 부족해도! 내가 주님을 영접한 후! 주님께서 나와 항상 함께하심을 잘” 압니다. 항상 “동행하시고,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중보하심도 잘” 압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위한 성령 하나님의 중보기도를 너무 잘 알지만, 다양한 핑계와 변명으로,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에 더 가깝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찾으며” 살아갑니다. 마침내 “예비 된 복을 받지 못함을 알면서도, 현실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요 15: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이 사실을 먼저 언급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내 안에 계셔서, 나만 주님 안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하심으로 우리가 받는 은혜와 복이 적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막아주시고, 열어주시고, 예비하신 복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비 된 복을 받으려면, 나도 주님과 더 함께! 더 가까이해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 신앙이 너무 변덕스러워서, 너무도 자주 오락가락하며” 바뀝니다. 마침내 “남이 아닌 바로 내 변덕과 오락가락함이 나를 위해 예비 된 복을 거부하고” 맙니다. 연약한 “인간이 누군가와 함께함은 참으로 큰 능력이고, 이를 통한 복이 적지!” 않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시모 나오미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베들레헴까지 “함께하는 중! 룻은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항상 나오미와 동고동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진심으로 나오미와 함께함을 아시고, 예비하신 풍성한 복을” 주셨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하시고, 자녀를 주셔서, 훗날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누군가와 진심으로 동행해도 그 복이 이처럼 큰데, 하물며 하나님과 동행하여 얻는 복이 얼마나 크고” 창대할까요?

연약한 “인간은 살면서 힘들고 어려워서 변덕 부릴 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태도만큼은 항상 같아야!” 합니다. 아직 “안 늦었기에,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과 진심으로 동행해야!” 합니다. 어떤 “출판사가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친구’의 정의를 공모했는데, 수천 건의 글이 도착했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언제든지 만나도 싫지 않은 사람, 나에게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사람!”

그런데 “거액의 상금을 받은 친구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참으로” 탁월합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다!” 생각할수록! “진짜 친구는 인간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뿐임을 깊이 깨닫게! ” 됩니다. 이유는 “인간은 상황과 처지에 따라 계속 달라지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같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짓고 넘어져도! 심지어 주님을 배반해도, 항상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다시 돌아가면, ‘괜찮아! 잘 왔다! 힘들었겠다!’ 등을 토닥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으려면, 나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기쁨과 감사가 클수록! 한결같이 항상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번뿐인 내 인생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누리며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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