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기업 브랜드 순위에서 삼성전자가 8위, 아시아 기업 중 최고로” 선정되었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삼성전자의 비약적인 발전 원인으로,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표한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꼽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놀아도 좋으니 남의 뒷다리만 잡지 마라! 불량은 암이다!” 생각할수록 “선하게 그리고 가치 있게 달라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익숙함에 젖어, 새롭게 바뀌는 것! 달라지는 것을 많이 불편해”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 삶에 100% 만족하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기 원한다면, 우리 삶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말씀에 도전받아서, 과거의 악함을 버리고, 복음에 맞게 점점 달라져 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과 달라지면 길이 열리지만, 과거만 고집한다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아합이 이전과 비교하여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엘리야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여달라! 호소했고, 호렙산 굴에서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엘리야가, 본문에서 아합을 책망하며, 갈멜산 영적 리더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습니다. 아합은 “그 아내 이세벨과 함께 이스라엘을 망친 악한 왕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악했던 아합이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달라졌습니다.

하나님도 “이전과 비교하여 달라진 아합을 인정해서 당대에 내릴 재앙을 나중으로 미룰 정도”였습니다. 신실한 “기독교인은 매번 똑같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아 이전과 달라져 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잘 바뀌지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빠져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재앙은 우리 신앙과 일상, 관점과 선택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야 함을” 도전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삶의 자세가 달라지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기에, 안일함에 빠져 과거를 고수하는 태도를 빨리 버려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더더욱 달라져야 하는데, 세상이 아닌 말씀에 합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오늘! 어떻게 달라져야 더 나은 삶을 살지!” 살펴봅시다.

1. 이전과 달라지려면 반복되는 악을 끊어야 합니다.

본문 19절은 “아합이 누군가를 죽이고 빼앗고, 또 죽이고 빼앗고, 이 악행을 여러 번 반복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아합과 이세벨, 그 후손을 향한 징계과 심판을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악했던 아합이 본문 27절에서,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굵은 베에 눕고, 금식하고!” 이는 “모두 유대인이 진심으로 회개할 때의 모습을 표현하는 행위들”입니다.

아합이 “과거의 악행을 끊어서 새롭게 되고, 많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마침내! “아합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당대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은 반복되는 악행을” 경고합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악함을 끊지 않고 계속 반복되면, 나중에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악이” 됩니다. 코로나-19로 “힘들수록, 우리는 내 삶과 생각에서 꼭 끊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문제는 “삶에서 고칠 것, 버릴 것, 틀린 것을 알지만,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내 눈의 들보는 외면하고 타인 눈의 티를 보고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알면서도 “매사에 나 중심적 사고, 내로남불의 비판적 태도, 고집과 완악함을 끊지 못해서, 이전의 삶을” 반복합니다. 핵심은 “세상과 주변 사람의 달라짐보다, 내가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나부터 “아닌 것, 틀린 것을 바로 깨닫고 달라져야, 세상과 주변 사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를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간디가 아이에게 ‘사탕을 끊어라!’ 말하면, 아이가 달라질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간디는 엄마 말을 듣고, ‘한 달 후에 오세요!'”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 후 찾아온 엄마와 아이에게, 간디는 다시 ‘한 달 후에 오세요!'” 말했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찾아왔을 때, 간디가 아이에게 ‘건강과 치아에 안 좋으니 사탕을 끊어라!'”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아이가 간디의 말에 즉시 사탕을 끊겠다고 하자, 엄마가 간디에게 ‘왜 이제야 이렇게 말하는가?'” 항의했습니다. 이에 “간디가 ‘사실 나도 사탕을 좋아해서, 어렵게 두 달 만에 사탕을 끊었어요. 내가 사탕을 못 끊었는데 아이에게 사탕을 끊으라고 할 수는 없죠!” 지혜로운 “간디는 내가 달라져야 타인을 달라지게 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비극은 나는 달라지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달라지고 바꾸라고 강요함에” 있습니다.

실제로 “반복되는 악을 끊으려면, 바로 지금! 틀린 것, 악한 것을 과감하게 멈추어야!” 합니다. 아합은 “과거부터 여러 차례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길 반복했기에, 엘리야의 책망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악했던 아합이 주변 사람과 하나님께서 인정할 정도로, 바로 지금! 회개하며 많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아합은 “바로 지금! 반복되는 악행을 멈추고, 과거와 많이 달라졌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니라면, 틀렸다면 지금 멈추어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때, 얼마든지 죄를 멈출 수” 있었습니다. 밧세바가 “유부녀임을 알았을 때, 충직한 우리아의 아내임을 알았을 때, 멈출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아에게 술을 먹여 죄를 전가하려는 악행, 우리아를 치열한 전쟁터에서 죽이라는 편지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차처럼 악행을 지속했기에, 나단의 책망, 자녀 간 골육상쟁의 아픔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다윗도 아닌 줄 알면서, 바로 지금 멈추지 않아서, 추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틀린 것, 아닌 것을 멈추는 것은 실패하고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틀린 것, 아닌 것을 멈추는 것이 미래를 여는 용기요 더 강해지는 비결”입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지금! 내가 멈추어야 하고, 달라져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금 “신앙생활에서, 내 선택과 결정에서, 관계와 가정에서 무엇을 멈추어야!” 합니까? 어쩌면 “거짓과 위선, 고집과 완악함, 불평과 원망, 정죄와 지적, 미움과 무시를 멈추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멈추면 반복되는 악을 이길 수 있지만, 계속하면 그 악이 나를 삼킬 것”입니다. 지금 “멈추면 미래가 있고 승리하지만, 멈추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달라질 수” 없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들지만, 악함을 멈추면 충분히, 넉넉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주도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져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이전과 달라지려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합을 향한 엘리야의 책망은 두렵고도 참으로” 강력했습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개가 너와 네 아내의 피를 핥을 것이다. 엄청난 재앙으로 네 후손은 다 패망할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크게 낙담하여 죽여 달라! 울부짖던 엘리야가, 말씀을 받고 완전히 달라져서, 이처럼 강하게 아합을 책망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동역자가 아니라, 악한 세상, 아합에게로 당당히 나갔을 때,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잘 알고, 그 말씀을 매번 듣지만, 악한 세상에서 위축되고, 기죽어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이유는 “말씀을 듣고 감동과 도전을 받지만, 그 감동과 도전이 세상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에 나가면 받은 말씀을 너무 쉽게 망각해” 버립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말씀을 상실한 채 살아가지만,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만 말씀을 강조하기에, 이전과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말씀을 붙잡고 살아감도 귀하지만, 이는 너무도 제한적”입니다. 병아리가 “아빠 닭에게, ‘아빠! 우리에게 왜 붉고 큰 볏이 있어요?’ 묻자, 아빠 닭이” 답합니다. “그건 적에게 우리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야!” 그러자 “병아리가 ‘부리는 왜 이렇게 뾰족하고 날카롭죠?’ 묻자, 아빠 닭이” 답합니다.

“그건 적을 무자비하기에 공격하기 위함이지!” 다시 “병아리가 ‘그럼 목소리는 왜 이렇게 커요?’ 묻자, 아빠 닭이” 답합니다. “그건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지!” 병아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습니다. “근데, 아빠! 우리 닭장 안에서 뭐 하는 거예요?” 두렵게도 “오늘 우리는 닭장 안에서 큰소리치는 아빠 닭처럼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세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당연히 “듣고 받은 말씀으로 교회보다 세상에서 더 신실해야, 우리 삶이 이전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려면, 무엇보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큰 책망을 들은 아합이 엘리야를 죽일 수도 있었기에, 어쩌면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아합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당시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이 아합을 책망한다고 확신했기에,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아합 앞에 섰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말씀을 확신하는 깊이에 따라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 선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말씀에 동의하고, 옳다고 인정하지만, 생명의 말씀, 하나님 말씀이란 확신이 점점” 줄어갑니다. 일반 성도는 “물론, 신학자들도 신학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변명으로, 주신 말씀을 확신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를 “극복하려면, 우리가 세상의 뉴스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욱 확신해야 하고, 그래야 세상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쏟아지는 많은 정보는 모두 가변적이기에, 우리는 한결같은 하나님 말씀을 더욱 확신해야!” 합니다. 행전 4:19절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말씀합니다. 불과 “얼마 전! 베드로는 공회가 두려워서 숨었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 후, 베드로는 말씀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나갔을 때, 많은 영혼을 세우고 살릴 수” 있었습니다. 히 11: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말씀에 “대한 어정쩡한 지식, 익숙한 지식이 아니라, 주신 말씀을 확신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는 분은 이를 잃지 말고 평생 지키게 해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분은,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새롭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주도 “하나님 말씀을 확신하며, 그 말씀을 가지고 당당히 세상에 나가서, 이전과 다른 삶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