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의학계는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질병으로 암과 우울증을” 꼽았습니다. 우울증은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변화가 생겨서, 부정적 감정이 계속 증가하는 질병”입니다. 현재 “많은 연구기관이 우울증의 원인을 찾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발병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발병원인으로, 내적·외적 질병, 가족관계의 파괴, 실업 문제, 낮은 행복지수, 과다한 스트레스, 정치 경제적인 문제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중압감이 더 심각한 우울증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삶의 중압감은 열악하고 힘든 사회는 물론,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한 선진국에서도 참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상, 가장 편안한 첨단 과학 시대를 살아가지만, 실제 우리 삶을 위협하는 삶의 중압감은 점점 가중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갈멜산 전쟁에서 승리한 엘리야가 아닌, 엄청난 중압감에 나약해진 엘리야를” 말씀합니다.

엘리야에게 “이세벨의 협박은 생사를 위협하는 엄청난 중압감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본문 2절에서, 이세벨은 당장 내일 자객을 보내 너를 죽일 거야! 아니면 바알이 내게 벌을 내릴 거야! 독하게” 협박했습니다. 당시 “이세벨은 하나님이 진짜임을 분명히 보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표독스럽게 엘리야를 압박했던 것”입니다. 당시 “엘리야도 이세벨의 악명과 악행을 많이 듣고 알았기에, 그 두려움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엘리야는 엄청난 중압감 때문에, ‘하나님! 나를 죽여 주세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코로나-19로 인한 중압감 때문에, 많은 영혼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실제로 “건강으로 인한 중압감, 경제적 중압감, 외로움과 소외감이 주는 중압감,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중압감, 자신감 상실로 인한 중압감이 점점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중압감은 세상과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중 ‘나는 삶의 중압감이 없다!’ 말한다면, 그는 죽은 영혼이거나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힘든 “시대를 살아가지만, 우리가 중압감에 패하면 실족하지만, 하나님 방법대로 삶의 중압감을 이기면 새로운 길이 열림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중압감을 이기려면 어떤 삶의 태도가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삶의 중압감이 가중되어도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엄청난 생사의 중압감에 부딪혔을 때, 일단 도망갔고, 홀로 광야 깊은 곳에 들어가서 로뎀 나무 아래에서 ‘나를 죽여 주세요!'” 울부짖었습니다. 정말 “이 사람이 갈멜산 영적 전쟁을 주도한 엘리야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문제는 “이세벨의 표독스러운 협박보다, 엘리야가 지나치게 비관적 사고에 빠져, 최악의 경우까지 가고 만 것”입니다. 놀랍게도! “비관적 사고가 능력의 선지자를 초라한 겁쟁이로 바꾸고 놓았던 것”입니다.

당시 “엘리야가 비관적 사고로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했지만,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엘리야 본인도 초라해지고, 하나님 영광도 가리고, 누군가 엘리야를 보았다면 아마도 크게 시험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삶의 중압감이 커도! 지나치게 비관적 사고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마귀가 준 미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코로나-19가 “6개월 이상 계속되면서, 들리는 소식은 낙관보다 비관적 소식이 더” 많습니다.

최근 “미국 CDC는 백신이 나와도 내년 말이나 정상화될 것이다!” 말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분이 지쳤고, 생각이 점점 비관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관적 사고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안 돼! 못 해! 좁고 부정적으로만 보게” 합니다. 마침내 “비관적 시각은 삶의 중압감에 더 깊이 빠져서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아쉽지만! “엘리야는 갈멜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믿음으로 버텨내며, 비관적 사고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갈멜산 전쟁 전에도, 상황은 낙관적이기보다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 붙들고, 은혜와 믿음으로 버텼을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버티지 못했을 때, 엘리야는 엄청난 중압감에 빠져 죽음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199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한 소년이 석탄운반화물 열차에서 떨어져, 한쪽 팔과 다리를” 잃었습니다. 14살 “소년은 마취제도 없이 이를 악물고, 엄청난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났습니다.

2006년 “탈북 후, 중국에서 꽃제비로 살다가,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한국에” 왔습니다. 소년의 “삶은 모든 것이 다 비관적이었지만, 그래도 중국에서 만난 하나님을 굳게 붙잡았고, 엄청난 삶의 중압감에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조용히 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소년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 사정을 세계에 알리고 중국에서 인신매매로 팔려가는 북한 여성을 구하도록” 이끄셨습니다.

2018년 1월 “트럼프가 국정 연설에서, 북한 인권을 언급하며 이 소년, 지성호 씨를 소개하며, 세계에 북한의 실정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당히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힘있게 일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성호 씨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믿음으로 삶의 중압감을 버텨내지 못했다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믿음으로 이기고 버텨냈기에 새로운 미래가 열렸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돕는 곳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인생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버티는 영혼과 포기하는 영혼이 맺는 열매가 같을 수” 없습니다. 삶의 “중압감이 커도, 버티고 이겨내는 것이 믿음이요 능력”입니다. 요셉이 “엄청난 상처와 삶의 중압감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버텼기에 새 인생이” 열렸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비참했지만, 그래도 버텼기에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요게벳이 “3개월 된 모세를 나일강에 띄울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래도 “믿음으로 삶의 중압감을 버텨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키우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삶의 “중압감이 커도, 믿음으로 버티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힘들지만! “‘오늘도 믿음으로 버티자!’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고 인생”입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믿음으로 버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삶의 “중압감이 커도 믿음으로 버티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 시간,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지금! 여러분 각자가 믿음으로 이 시기를 버텨내서 삶의 중압감과 비관적 시각을 떨치고 승리할 수 있기” 원합니다.

2. 삶의 중압감이 가중되어도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채우시는 은혜가 더 큼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세벨로 인해 엄청난 중압감에 빠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서 그를” 어루만지십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엘리야를 어루만지셨는데, 노게아으는 하나님께서 만짐으로 어떤 권위, 능력을 부여하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죽고 싶다는 엘리야를 위로하셨고, 그에게 따뜻한 음식과 물을 주시며, 다시 일어나라! 용기를” 주셨습니다. 중압감으로 “넘어진 엘리야가 다시 해야 할 일, 새로운 비전,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중압감에 빠져 비관적 사고로 자포자기했던 엘리야가 하나님 은혜에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아마도 “한 마디도 못하고, 그저 굵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죽고 싶을 정도로 큰 삶의 중압감은 과거에도 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있고, 분명히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고 채우신 은혜가 더 컸기에 지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영혼이 과거의 중압감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어루만짐과 일하심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잘” 모릅니다. 히 13: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말씀합니다. 과거에도 “나를 어루만져서 삶의 중압감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내 삶의 중압감을 이기도록” 어루만집니다. 실제로 “지금 내가 당하는 삶의 중압감보다, 하나님의 채우심과 어루만지심이 더 크고 깊기에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삶의 중압감이 커도, 그 중압감보다 더 큰 은혜가 있기에, 다시 일어나야 하고, 다시 호렙을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만일 “삶의 중압감에 주저앉으면,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체험할 수 없고, 비참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십자가 보혈은 인간의 그 어떤 죄와 연약함을 전부 다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아픔이 있어도, 다시 일어나야 하고, 다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현재 “세계 73개국에서 무려 8억 명의 기독교인이 박해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10년 전, 약 1억 명이 생명을 위협하는 높은 수준의 박해를 받았는데, 지금은 그 숫자가 2억 명으로” 늘었습니다. 지난해에도 “무려 9만 명이 박해와 종교 분쟁으로 사망했는데, 이는 6분마다 1명의 기독교인이 순교한 셈이” 됩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주요 원인은 극단적 이슬람, 종교 민족주의, 국가와 지방 정부의 탄압 등이”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경우, 물리적인 박해와 핍박은 없지만, 교회를 향한 부정적 시선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가중되는 핍박과 박해 때문에, 신실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해와 핍박이 점점 더 가중될수록, 교회와 기독교인이 점점 줄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박해와 핍박, 삶의 중압감이 커질수록, 오히려 교회와 기독교인의 신앙이 더 순수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핍박과 박해보다 더 큰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은혜와 사랑을 붙들고, 수많은 교회과 기독교인이 다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 각자의 믿음이 점점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겪은 6개월 동안, 혹자는 삶의 중압감에도 더욱 하나님을 찾아서, 그 믿음이 더” 깊어졌습니다. 반면에 “혹자는 낙담과 좌절, 불평과 원망에 빠져, 그나마 있던 믿음까지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삶의 중압감도 무거운데, 천국 소망, 영생까지 잃으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어요? 지금의 “어려움은 가만히 있어서 지나갈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다시 힘을 내서 더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마가가 “밤빌리아 버가에서 중도 하차하여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제공했지만, 다시 일어났기에, 마가복음을” 남겼습니다. 바울이 “수많은 박해와 생명의 위협에도 다시 일어났기에, 유럽과 소아시아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제 시계는 “한 시간마다 일어나서 움직여라! 팔다리를 펴고 기지개를 켜라! 사인을” 줍니다. 그렇게 “사인에 따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피곤함이 훨씬” 덜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삶의 중압감을 알지만, ‘다시 일어나라, 이루어야 할 비전이 있다.’ 반복하여 말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내게 이 도전이 꼭 필요하기에, 꼭 다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다시 일어나서 삶의 중압감을 이겨내는 한주가 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