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석학인 아인슈타인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거대한 도서관 안에 들어온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도서관에 있는 엄청난 양의 책을 누군가 썼다는 것은 알지만, 누가 어떻게 썼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생각할수록!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어렵지만, 다행히 성경과 성령의 조명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려는 노력이 적기에, 매번 하나님을 희미하게 알고” 살아갑니다. 실제로 “분명한 앎과 희미한 앎은” 다릅니다. 분명히 “알면 내 것이지만, 희미하게 알면 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분명한 소망과 희미한 소망도” 다릅니다. 분명한 “소망은 성취되지만, 희미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지금, 기독교인의 능력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바르고 분명히 알아감에” 있습니다.

450명 “바알 선지자는 불이 내리지 않아서 위축되었지만, 엘리야의 태도는 정반대”였습니다. 당시 “엘리야는 다수의 우상 숭배자 앞에서 능력 충만, 성령 충만, 자신만만”했습니다. 이는 “엘리야만 하나님을 바르고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36절에서 “오늘 알게 하옵소서! 이와다으는 체험적으로 온전히 안다, 가장 잘 안다는 뜻”입니다. 당시 “엘리야의 탁월한 능력은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하심, 채우심과 일하심을 앎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과 그렇지 않음이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결정적 차이”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채,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많이 들은 익숙한 분, 몇 마디 말로 어설프게 설명할 수 있는 분, 내 하나님이 아닌 어머니와 배우자의 하나님, 누군가의 하나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잘 모르기에 내 예배가 식어가고, 자신감도 점점 잃어가는 것”입니다.

충분히 “세상의 고난, 코로나-19를 이길 수 있지만, 하나님을 몰라서 무능력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호 6:3절은 “힘써 여호와를 알자!” 말씀합니다. 우리가 “코로나-19와 세상을 이기고 살아가려면, 이제부터라도 힘써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무엇을 알아야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능력있게 살려면,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38절은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일부러 흙으로 쌓은 제단, 도랑에 채운 물에까지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마침내 “머뭇거리던 모든 백성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다! 고백하며, 놀라움과 경외함으로” 엎드렸습니다. 심지어 “본문 40절에서, 엘리야가 450명 바알 선지자를 심판해도,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온전한 응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설교를 통해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체험한 영혼이 점점 줄어감에”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분명히 응답하셨지만, 이를 응답인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실제로 “응답의 체험이 없기에,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대한 의심과 거부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기도는 물론, 심지어 내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 응답하셔서, 지금 내가 평안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바로 알고 체험하려면,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 36~37절에 “하늘에서 불이 내리길 간절히 구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나옵니다. 특히 “본문 37절에서 응답하옵소서. 응답하옵소서. 같은 말을 반복함은 간절한 기도를 강조하고, 그만큼 기도가 뜨거웠음을” 말씀합니다.

만일 “갈멜산 전쟁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면, 엘리야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당시 “엘리야는 죽을 각오로, 머뭇거리는 선민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똑바로 알리고, 자신이 진짜 주의 종임을 알리고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민 14:28절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말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가 말한 것, 소망과 기도, 불평과 원망까지 다 듣고, 말한 그대로, 들은 그대로 응답하겠다!”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이 있기에, 나부터 간절한 기도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예배는 물론 기도의 능력까지 잃어가고” 있습니다. 말로는 “죽겠다. 힘들다. 어렵다. 고백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영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코로나-19를 이기려고 무던히 애쓰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더욱 엎드려 간절함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내 입술에 불평과 원망, 낙담과 절망이 더 많아지고 있다면, 나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코로나-19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우리에게 다시 기도하라는 도전”입니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착용함은 잠잠하란 뜻이다!” 최근 “유행하는 글인데, 기독교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스크를 쓰고 세상을 향해서는 잠잠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 “해외 유학파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모두가 “젊고 유능한 목사로 인해 교회가 부흥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교회가 더 냉랭해져” 갔습니다. 한번은 “새 목사가 본당에서 우연히 만난 관리집사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은퇴 목사님과 제가 뭐가 다릅니까?” 관리집사가 “주저하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은퇴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기도할 때마다 눈물 콧물을 흘려서 청소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간절한 기도는 “직분과 신앙 연륜, 몇 대가 믿었는지, 이것과” 무관합니다.

성직자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앎으로 얻는 능력을 점점 잃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목회자 E.M 바운즈는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 다소 과격한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고, 과격하지도 않고, 성경의 교훈 그 자체”입니다. 안타깝지만! “코로나-19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코로나-19가 끝나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두렵지만! “코로나-19 이후, 우리 신앙생활은 더 많은 영적 도전으로,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기도하여 응답받고, 하나님을 더 바르고 깊게 알아가야!” 합니다. 부족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내가 간절히 기도하면,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받고,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을 바로 알아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능력 있게 살려면 하나님은 보여주시는 분임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갈멜산 “전쟁은 제물에 불이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로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 450명 “바알 선지자가 거짓인 이유는 불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38절은, 이에 여호와께서 불을 내려서!” 말씀합니다. 원어를 보면 “엘리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450명 “바알 선지자는 온종일 소리치며 자해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엘리야의 기도에 즉시 불이 내렸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모두가 즉시 엎드려 경배할 만큼, 우상 숭배자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능력과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보여주심을 어떤 초자연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을 통해서만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가 누렸던 일상, 평범함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였음을” 절감합니다.

또한 “지금 내가 살아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음, 예배드리고 섬길 교회가 있음, 만날 사람이 있음이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번 하나님 보여주시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 못 보았다! 모르겠다!” 불평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려면, 항상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원래 하나님이 안 계셨는데, 엘리야의 기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매번 선민이 분명히 알도록 보여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몰랐습니다.

이유는 “선민의 시각이 바알에 집중했고, 우상 숭배로 믿음의 시각을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의 “시각을 잃으니, 매사를 세속적으로 보았고, 마침내 선민의 정체성과 능력까지도 점점 잃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하고 연약할수록,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관점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고, 기도마다 응답받게!” 합니다. 출애굽 “선민이 왜 갑자기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보여주셨지만, 삶의 관점이 여전히 애굽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려 “400년간 애굽 관점으로 살았기에, 그들이 믿음의 관점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2주면 갈 수 있는 가나안을 무려 40년 동안! 과거 애굽 관점을 버리고 믿음의 관점을 가지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이는 “선민이 믿음의 관점을 가져야 하나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마다 각자 가진 관점에 따라서, 세상을 해석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믿음의 관점을 가지기 위해 훈련하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은혜로 능력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가족 찬양 경연대회 중, 집사 한 명이 가사를 틀리게” 불렀습니다. 모두가 “깔깔 웃었고, 그 집사는 너무 창피하고 당황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목사님 가정 차례였는데, 목사님도 그만 찬양 중 가사를 틀리게 불러서, 교인들이 더 크게” 웃었습니다. 그날 저녁! “사모가 목사에게, 그렇게 연습을 하고 왜 틀렸는지!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사모에게 왜 가사를 틀렸는지, 그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김 집사가 찬양 중 가사가 틀려서 모두가 웃자 너무 무안해했잖아요! 그게 마음이 아파서 우리 가족이 찬양할 때, 나도 일부러 틀리게 불렀던 거예요! 그때 김 집사 얼굴을 보니, ‘목사님도 틀렸구나!’ 안도하는 모습을 보고 틀리길 잘했구나! 생각했어요.”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사랑하는 관점으로 보는가? 실수로 보는가? 이로 인해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참으로 힘들지만, 그래도 믿음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면 길이 보이고, 하나님의 일함이 보이지만, 원망과 불평의 눈은 하나님이 보여주셔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세요? 우리가 “믿음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보여주심을 바로 알고, 그 능력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