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은 “1979년 월스트리트 저널을 통해 처음 발표된 경제학 용어”입니다. 의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깨트릴 수 없는 무엇인가를” 뜻합니다. 특히 “유리천장은 능력 있는 여성이 고위직에 올라가지 못함을 풍자할 때 많이 쓰였는데, 몇 해 전,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에 나오면서 다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리천장이 틀렸고 그릇된 개념임을 잘 알지만, 여전히 이에 속고 있고, 고치려는 노력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유리천장을 만들어서,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우리 삶을 조정하려” 합니다. 최근 “많은 기독교인조차 코로나-19라는 유리천장에 막혀서, 세상이 만들어 놓은 다양한 유리천장에 속아서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기독교인답게 “분명히 잘 할 수 있고, 소망이 있지만, 영적 유리천장에 속아서 무기력해질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유리천장에 속지 않으려면,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갈멜산 “영적 전쟁은 450명 바알 선지자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바알 선지자 450명은 정오를 지나 저녁까지, 하늘에서 불이 내리길 바라며, 점점 광란의 지경으로 돌변해” 갔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현장에 있던 모두가 이 광경을 얼마나 흥미롭게” 보았을까요? 문제는 “선민 이스라엘에서 이런 영적 전쟁이 일어난 것 자체가 치욕인데도, 선민은 자신들이 우상숭배에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우상에게 속는 영적 악순환이 반복되고 길어지면서, 점점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갈멜산 영적 전쟁을 통해, 우상에 속고 있던 선민 공동체를 다시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이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진짜임을 알지만, 세상에 속고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세상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움에 속아서, 믿음이 점점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이 본인이 속는 줄도 모르고, 아니! 속고 있다는 사실에 큰 문제의식도 없이, 이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마귀는 “코로나-19를 악용해서 우리를 속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어서 속지 말라!'” 말씀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마귀와 세상에 속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세상은 숫자가 많으면 된다고, 다수가 이긴다고 속입니다.
당시 “엘리야 혼자 450명 바알 선지자를 대적함은 수적으로 중과부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아합과 이세벨, 머뭇거리는 이스라엘도 엘리야 편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아합이 450명 바알 선지자를 얼마나 고르고 또 골라서” 세웠겠어요? 그래서 “아합은 혼자 큰소리치는 엘리야를 보며, 분명히 승리를 자신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갈멜산 영적 전쟁이 벌어질 때, 신실한 주의 백성 7,000명이 나설 수 없을 정도로 바알 숭배가” 주류였습니다.
그런데 “450명, 다수의 바알 선지자가 하늘에서 불이 내리길 기원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수가 “집단으로 소리치며 제단 주위를 뛰놀고, 자해까지 하며 바알을 찾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유는 “아합과 이세벨, 바알 선지자 450명이 다수였지만 가짜였고, 엘리야는 혼자였지만 진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인간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고, 다수를 존중해서 좋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제도는” 아닙니다.
이유는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니고, 만일 다수가 틀렸을 경우, 이것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다수가 집단적 무감각에 빠지면, 이는 한 시대를 망치는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도 “다수로 의사 결정을 할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최선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달리, 다수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소수에 서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교회와 신앙인은 유행을 따지고, 성경의 가르침보다 세상의 흐름에 신경을 쓸 때가 더” 많습니다. 성균관대 “이영성 교수가, ‘나도 좋은 엄마 아빠가 되고 싶다.’란 책에서, 부모가 빠지기 쉬운 콤플렉스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일류 콤플렉스! “자녀를 일류 학교와 직장에 보내고 싶은 욕망이 너무” 큽니다. 체면 콤플렉스! “항상 ‘–인체! 없어도 있는 체!’ 하고, 자녀의 성적으로 부모의 어깨가 펴지기도 하고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보상 콤플렉스!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자녀가 이루어야 한다는 마음이” 큽니다. 실제로 “일류가 되고, 체면이 서고, 보상받으면 좋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도 뚜렷한 영적 주관이 없고, 하나님 뜻과 무관하게, 일류 체면 보상 콤플렉스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악한 세상에 속지 않으려면, 우리는 다수보다 하나님 말씀에 합한 좁은 길을 택하여 말씀대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악해지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비가 오지 않아도 거대한 방주를 만들라!” 명하셨습니다. 당시 “세상은 노아를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조롱할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세상 사람의 반응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좁은 길을” 택했습니다. 실제로 “산에 엄청난 규모의 방주를 건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노아와 세상 사람 중, 누가 진짜이고, 누가 속았고,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잘” 압니다.
산상수훈 중 “마 7:13~14절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말씀합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다수가 따라가는 편안하고 넓은 길, 그리고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작은 길이 항상 펼쳐져”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속지 않으려면, 보이는 문의 크기보다 영적인 생명력이 있는지를 먼저 찾아야 한다!”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남들이 다 가는 길, 좋다는 길보다, 비록 소수가 가도,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이유는 “다수가 가는 길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길에 속임보다 진실과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 믿는 삶은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달려가도 하나님이 멈추라 하면 혼자라도 멈추는 것, 세상 모두가 멈추어도, 하나님께서 달려가라 하시면 혼자라도 달려가는 삶!” 부족해도 “하나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선택하면, 다수이면 다 된다는 영적 유리천장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한주도 “넓은 길로 이끌려는 세상에 속지 말고, 주의 종 엘리야처럼 하나님 기뻐하는 좁은 길을 택하여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세상은 열심만 있으면 된다고 속입니다.
처음에 “450명 바알 선지자는 바알의 이름만 부르다가 응답이 없자, 제단 주변을” 뛰놉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큰 소리로 바알을 부르고,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해까지 하고, 미친 듯 떠들며 바알을 불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간이 갈수록 450명 바알 선지자가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본문에서 “450명 바알 선지자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늘에서 불이 내리길 바랐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사람을 속이는 가짜, 거짓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응답과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다 할 수 있다!” 속입니다. 심지어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나는 할 수 있다!’ 100번을 외치면 성공한다!” 속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진리가 아니면, 하나님 계획과 다르면 절대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릇된 열정이 클수록, 나와 주변 모두를 더 힘들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네 부류, 똑부형 똑게형 멍부형 멍게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똑부형은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 똑게형은 똑똑한데 게으른 사람, 멍부형은 멍청한데 부지런한 사람, 멍게형은 멍청한데 게으른 사람을” 뜻합니다. 문제는 “이들 중 멍부형이 가장 위험한데, 이유는 멍청하고 부지런하며, 게다가 열심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열심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을 위한 열정만이 선하다!”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 많은 추종자 중에서 12명의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12명 사도는 구약의 12지파처럼 그 영적 의미가 참으로” 깊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비록 모든 것을 포기하며 주님을 따라 살았던 열정이 있었지만, 그들 내면에는 항상 ‘내가 더 크다!’ 그릇된 열정 때문에, 주님을 십자가로 몰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령 체험 후, 그들은 십자가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재무장”되었습니다.
같은 “사람이었고, 열정도 있었지만, 그 열정의 방향이 바뀌면서 맺는 열매가” 달라졌습니다. 지금 “나에게 어떤 열정이 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열정인지! 자문해” 보세요! 나만 “좋은 열정은 이기적일 수 있고, 세상에 속는 열정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주께서 기뻐하는 열정은 이타적이고, 선한 열매를 맺는 열정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열정이 없음은 이 땅을 살아가는 의욕이 없다는 것이고, 심지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열정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이는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인정받는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얼마 전! “초등부 학부모 모임에서, 아이들의 VBS 과정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5주간 “진행되는 초등부 VBS에서, 아이들이 매일 해야 할 다섯 가지 숙제가 있다고” 합니다. “매일 선한 일에 헌신하기, 매일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기, 매일 성경 읽기, 매일 말과 행위로 누군가를 존중하고 용서하기, 매일 성경학교 교재 읽고 공부하기” 참으로 “쉽지 않은 일들인데, 많은 아이가 이 다섯 가지를 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부모가 교회에 안 나오는데도, 혼자 매 주일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다섯 가지 숙제를 빠짐없이 감당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Comfort Zone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실천하는 열정이 큰 감동”이었습니다. 물론 “초등부 아이들은 다섯 가지 숙제에 대한 선물이 있지만, 선물 때문에 열심히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기뻐하는 열정은 나이와 직분, 환경과도 무관하고, 오직 하나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기뻐하는 열정은, 무모하거나 편협하지 않고, 나와 주변 사람을 살리고, 교회에 덕을 끼치는 열매를” 맺어갑니다. 코로나-19가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하고, 위축되게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한주도 “세상의 속이는 열정이 아닌 하나님 주시는 열정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