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5일, 카슈미르 라다크 지역에서 중국과 인도가 크게” 부딪혔습니다. 양국은 “총격전은 아니었지만, 돌로, 못이 박힌 각목으로 충돌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지난 1962년이래, 가장 격렬한 유혈사태였기에, 서로를 향한 적대감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무려 “3,488Km에 달하는 구간에서 국경선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앞으로 중국과 인도의 분쟁은 날로 더 첨예해져서 양보가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날 “국가 간의 분쟁도 이처럼 치열하여,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려!” 합니다. 이를 보며 “오늘 우리가 영적 전쟁에 임하는 태도는 어떠한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핑계로 영적 전쟁의 중요성을 모르고, 꼭 이기겠다는 각오마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국가 간 “분쟁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영적 전쟁에서 패하면 그것으로 영생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악하고, 코로나-19가 극심할수록, 영적 전쟁의 치열함을 깨닫고, 영전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합은 “이스라엘 전역에 사람을 보내 450명 바알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모았습니다. 엘리야도 “비록 혼자였지만, 당당히 영적 전쟁터로 나왔기에, 양측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것”입니다. 당시 “엘리야, 아합과 450명 바알 선지자는 승패를 넘어 생사가 걸린 영적 전쟁 앞에서, 절대로 패할 수 없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임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악한 마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영적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각오로” 출정합니다.

하지만 “현대 신앙인 다수가 영적 간절함과 열정을 잃고, 그저 예배만 겨우 참석하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출정 태도와 각오부터 다르기에, 우리는 진짜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매번 영적 전쟁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에 계속 위축된다면, 우리는 지금의 영적 전쟁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코로나-19를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나려면, 승리하려면, 영적 전쟁에 임하는 태도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영적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하나님 주시는 능력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절대로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본문 21절에서, 갈멜산에 모인 모든 백성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안타깝게도! “당시 갈멜산에 모인 선민 중 누구도 엘리야의 책망에 자신 있게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 원어 싸이프는 어떤 의견이나 생각이 고정되지 않고 갈라져 있음을” 뜻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온전히 바알만 섬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만 섬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상황과 처지에 따라,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그 신앙이 끊임없이” 머뭇거렸습니다. 대대로 “하나님 은혜로 살아왔지만, 믿음의 머뭇거림 때문에, 매번 영적 전쟁에서 패하는 것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만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도 믿는 신앙, 머뭇거리는 신앙이 참으로” 많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과 명예, 내 자존심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게다가 “내 이익에 따라 하나님 편과 세상 편!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며, 그 머뭇거림의 폭이 너무도” 큽니다. 이유는 “교회에 나오지만, 예수가 누구인지,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확신과 영적 체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하나님도 신앙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치열할수록, 머뭇거리지 말고, 항상 바른 선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인생은 출생과 죽음을 제외하고, 매사에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 과정”입니다. 실제로 “우리 인생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로 희로애락이 바뀔 수” 있습니다. 야구에서 “좋은 선구안을 가져야 좋은 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영혼도 밝은 영안으로 머뭇거리지 않고 항상 바른 선택! 하나님을 택하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은 “영안이 밝았지만, 조카 롯은 영안이 어두워 영적 까막눈”이었습니다. 모세는 “영안이 밝았지만, 아론은 영안이 흐려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영안이 밝았지만, 나머지 정탐꾼은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을 선택맹(Choice Blindness)이라” 부릅니다.

오늘날 “세상의 수많은 문제는 문맹보다 선택맹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매사에 머뭇거리고,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해서 주저하는 선택맹이 얼마나” 많습니까? 매사에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까? 누구 음성을 따를까? 주저하고 머뭇거리다가 영적 전쟁에서 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선택맹이 안 되려면, 항상 하나님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항상 하나님 중심으로 선택을 했기에, 밝은 영안으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기에,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선택하여, 영적인 까막눈! 극심한 선택맹이 되었고,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매번 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코로나-19로 어렵고 힘들수록, 더더욱 매사에 하나님만 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살면서 “머뭇거리고 주저되는 일이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 기뻐하는 것을 먼저 택해야!” 합니다. 아니! 매사에 “내가 기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을 먼저 택해야!” 합니다.

세상은 “매사에 나 좋은 대로, 내 뜻대로 살아야 잘 사는 거야!” 속삭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탈현대주의 핵심이 남이야 뭐라 하든, 나만 좋으면 그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내 삶에 100% 만족하고, 내 선택이 항상 옳았다!” 자부하세요?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삶도 내 위주로 살아가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이 어렵다면, 바꾸고 싶다면, 내 위주가 아닌 하나님 위주의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수 24:15절은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말씀합니다. 영적 “전쟁이 치열한 오늘! 여호수아의 고백이 바로 내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을 택하면, 나는 어떤 영적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고,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처럼 “코로나-19가 더 심각해지고, 어려워지고 힘들어지기에, 우리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 “안 늦었기에, 이제부터라도 밝은 영안으로 선택맹을 극복하면, 영적 전쟁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면, 과거와 다른 삶이 열리고,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기에,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을 택함이 참 지혜”입니다. 한주도 “매사에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만 선택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위축되지 말고 당당해야 합니다.

당시 “갈멜산에는 서슬 퍼런 아합과 바알 선지자 450명이 엘리야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백성이 있었지만, 머뭇거리며 눈치만 볼 뿐, 누구도 엘리야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각을 뜬 송아지에 먼저 불을 내리는 신이 진짜이다! 승리의 기준까지 당당히” 제시합니다. 당시 “외적으로 보면, 엘리야에게 유리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엘리야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담대했습니다.

마침내 “그 당당함이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당당하기보다 위축되어 겁먹고, 우물쭈물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실례로 “가난과 과거의 상처 때문에, 시험과 원망 때문에, 많은 경우에 시도조차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는 연약함이 참으로” 많습니다. 심지어 “많은 영혼이 세상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란 영적 정체성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진짜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은혜로 매일 살면서도, 당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해도, 매사에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지탱해주시고, 나를 붙잡아 주심을” 아세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상의 어려움만 보고, 하나님의 동행을 못 보기에, 예배의 열정이 사라지고, 기쁨보다는 한숨이, 감사보다는 원망에 휩싸여 사는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입니다. 금문교는 “높이 227m의 탑에 1,280m에 달하는 두 개의 케이블로 지탱하는 엄청난 규모의 현수교”입니다.

과거 “금문교를 건설할 때, 처음 1년간 약 20여 명이 다리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이유는 “금문교 아래의 빠른 물살과 잦은 폭풍, 안개가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건설 회사는 고민 끝에, 거대한 그물망을 금문교 아래에 깔아” 놓았습니다. 그 후! “공사 중 다리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없어졌고, 공사 기간도 무려 20%나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두려움, 위축을 이기고, 괜찮다는 확신으로 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금문교 초기 공사장처럼, 위태롭고 어려운 일을 끊임없이 겪으며” 살아갑니다.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해지려면,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확신해야!” 합니다. 실제로 “인간은 연약해서, 누구나 작은 일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반석처럼 든든하기에, 항상 ‘강하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다!’라는 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행전 20:24절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다양한 위험과 핍박으로 그 삶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한 번도 약해지거나 위축되지 않았고, 언제나 담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고 함께하신다. 이 땅의 삶이 다가 아니라 천국이 분명히 있다.”

바울은 “바로 이 확신으로 평생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물질과 시간, 건강과 영적 담대함까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솔직히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살아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고 함께하심, 천국을 확신하며 영적 전쟁에서 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당당했던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놓쳐도 되고, 아니! 어쩌면 꼭 놓쳐야 할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 신앙, “조급함, 자존심, 미움과 원망, 과거의 쓴 뿌리와 상처는 반드시 놓쳐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 놓쳐도, 살아계신 하나님만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붙잡으면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붙잡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주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담대함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