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청소년 3,8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83%가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 답했습니다. 또한 “한국의 청소년 54%가 하루 평균 3시간 이상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무려 23만 명이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매년 청소년 탈선과 인터넷 중독이 점점 늘어가는데, 왜 우리 자녀들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이유는 “많은 청소년이 해야 할 일이 있지만, 꼭 필요한 일, 꼭 이루고 싶은 비전과 꿈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수입이 좋은 직업을 강요해서, 세상에 필요한 기독교 리더를 꿈꾸는 일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꿈이 없다. 시간을 낭비하며 산다! 어떤 부모가 자신 있게 그 자녀를 책망할 수” 있을까요? 부모인 “우리도 코로나-19로 인해, 꿈을 잃고 헛된 일에 많은 시간을 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코로나-19로 꿈과 비전을 잃을 수 있지만, 그 회복이 더 큰 숙제와 부담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꿈과 비전은 “나이와 무관하고, 살아있다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꿈과 비전을 잃어버리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힘들고 어려울수록! 꼭 해야 할 일, 꼭 하고 싶은 일, 꿈과 비전을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선민의 “우상숭배가 극심한 중 엘리야의 승천은 큰 영적 공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세우셔서, 그 영적 공백을” 메꾸셨습니다.
엘리사는 “승천한 엘리야가 행한 헌신과 수고의 두 몫을 감당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만일 “엘리사가 꼭 하고 싶은 일, 감당해야 할 비전과 꿈이 없었다면, 엘리야 승천 후 선민의 역사는 더 어두워졌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떤 때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도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많은 경우 “‘여기가 좋사오니!’ 현실에 안주하고, 눈앞의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실제로 “코로나-19의 어려움보다, 해야 할 일, 꿈을 잃어버리고 생각 없이 살아감이 더 큰 문제”입니다. 코로나-19는 “분명히 끝날 것이기에, 주님은 낙심하지 말고 꼭 해야 할 일, 더 큰 꿈을 꾸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도전합니다. 우리가 “힘든 오늘을 이기고 꼭 해야 할 일,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보자!
1. 더 큰 꿈을 꾸려면 중간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여기 머물라!” 이는 “엘리야가 길갈과 벧엘, 여리고를 거쳐 요단에서 승천하기까지, 계속 추종하는 엘리사에게 반복했던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엘리야가 ‘너는 여기 머물라!’ 말할 때, 친절하기보다 퉁명스러웠을 것”입니다. 특히 “길갈에서 벧엘, 여리고까지 약 33Km이고, 거의 하루 동안 걸어야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엘리야는 계속 ‘너는 여기 머물라, 그만 따라와!’ 섭섭하고 힘들게 했지만, 엘리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룻길을 “동행하면서 따뜻한 격려 한마디 없었지만, 엘리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그렇게 “엘리사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엘리야 이후, 해야 할 일, 큰 꿈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포기가 좋지 않음을 알지만, 현실을 보면, 작고 사소한 일조차 너무 쉽게 포기”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다양한 변명과 핑계, 무기력과 좌절로 포기에 너무도” 익숙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너무 어려워! 조금 더 지나면!”
그러나 “포기는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 얻을 은혜와 상급 모두를 빼앗아” 갑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하루하루 일상생활은 물론 신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해 오던 일을 너무 쉽게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코로나-19로 인한 고난과 어려움이 커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더 큰 꿈을 꾸기” 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유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탕자를 다시 귀한 아들로” 받아줍니다. 당시 “탕자는 모든 것을 포기할 이유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돈도 “다 썼고, 면목도 없었고, 창피하고 무안했고, 자존심과 명분도 없었고, 배까지” 고팠습니다. 어쩌면 “집으로 돌아오는 중, 발걸음을 멈추었다 전진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탕자가 회복된 결정적 이유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집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탕자는 회복되었고, 다시 미래를 위한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꿈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나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포기의 이유인데,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내가 정한 기준에 만족하지 못해서, 타인과 비교함으로, 낙심 때문에 포기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문제는 “포기하면 얻을 것이 없고, 열린 길이 막히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포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울수록, 꼭 해야 할 일, 비전과 꿈을 찾는 영혼에게 새 힘을 주시고 새길을 열어” 주십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내가 영생을 선물로 받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산지법 “천종호 판사는 호통 판사, 비행 청소년의 아버지로 유명”합니다. 천종호 판사는 “일곱 남매 중 넷째였고, 아홉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면서, 도시락을 쌀 수 없어서 물로 허기를 채워야 할 정도로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천종호 판사는 항상 일찍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공부하여 7형제 중 홀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도 “일류 대학이 아니었고, 사법고시도 8번 낙방할 정도로 탁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꿈을 이루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과거 “천종호 판사가 청소년을 위한 특강에서 언급한 감동적 도전이” 있었습니다. “불행하다 한숨짓지 말라! 가난하다 포기하지 말라! 부모 탓하며 주눅 들지 말라! 과거를 돌아보며 억울해하지 말라!”
요약하면 “어려움 중에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도전”입니다. 혹자는 “내가 머리는 좋았는데, 가난 때문에 공부하지 못했다며 아쉬워” 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정말 가난 때문이었는지! 정말 어려운 중에도 최선을 다했는지, 가난보다 내가 포기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과 기억력이 나빠질수록, 포기의 유혹이 커지고, 더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포기를 극복해야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큰 꿈과 비전이 앞에 보일 것”입니다. 포기는 “악한 마귀의 제안이지만, 하나님은 ‘다시 시작해라! 일어나라!’ 격려하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한주도 “코로나-19로 인해 힘들고 어렵지만, 포기하려는 유혹을 극복하고, 더 큰 꿈을 꾸며 앞으로 나아가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큰 꿈을 꾸려면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9절은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이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 “많은 목회자가 이 표현을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 두 배를 원했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보면, 엘리사는 엘리야가 행한 능력이 아니라, 사역의 두 몫을 감당하게 해 달라!” 요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 두 배가 아니라, 엘리야가 행한 수고와 헌신 두 몫을 감당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우상숭배로 쇠락해가는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거룩한 욕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만일 “엘리사가 엘리야가 행한 능력, 업적 두 배를 원하며 욕심을 부렸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넉넉한 시대를 살아가지만, 나를 위한 이기적 욕심이 너무도” 많습니다.
최근 “대선과 코로나-19 확대로 인해, 다시 생필품이 동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중에 “다른 사람보다 ‘일단 나부터 편해야 해!’ 이기적 욕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욕심은 이처럼 이기적인 것만 있지 않고, 엘리사처럼 거룩한 욕심, 꿈과 비전도” 있습니다. 이기적 “욕심은 나와 내 이익을 위한 마음이지만, 거룩한 욕심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거룩한 욕심은 “하나님께서 인정하기에, 이를 통해 큰 꿈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눅 22:24절을 읽을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합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밤, 사도들은 여전히 누가 큰지! 다투고 분쟁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도들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보다 ‘누가 크냐?’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세속적이고 이기적 욕심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끝까지 서로 크다고 다투던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의 “임재 후! 사도들의 이기적 욕망이 거룩한 욕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두 몫의 일을 감당하려는 열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영생!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을 믿고 살아가기에, 적어도 우리라도 잠깐 있다가 사라질 세속적 욕심을 이겨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내가 “거룩한 욕심으로, 두 몫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내 삶의 지경을 두 배로 더 크게” 역사합니다. 이기적 “욕심은 절대로 큰 꿈을 이룰 수 없지만, 거룩한 욕심은 결코 작은 꿈을 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욕심보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나은 것, 이기적 욕심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록펠러는 “어머니가 남긴 10가지 유언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10가지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아침에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힘껏 도와라.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이를 “볼 때마다, 제 마음에 제기되는 의문이” 있습니다. “록펠러가 큰 부자가 되었기에 이 유언이 유명해졌을까? 아니면, 이 유언을 지켰기에 거부가 되었을까?” 당시 “록펠러는 물질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룩한 욕심이 더 컸던 것”입니다.
세상은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역으로 기회가 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 위기가 여전히 크기에, 우리가 하늘의 지혜로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 합니다. 부족해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 지금 해야 할 일, 가까운 일부터, 하나님 기뻐하는 일이라면 두 몫을 감당하려는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단언컨대 “거룩한 욕심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이제 “더 큰 꿈을 꾸며 살 것인가? 그냥 이전처럼 살 것인가? 선택은 바로 내게” 있습니다. 힘들 수도 있지만 “두 몫을 감당하려는 거룩한 욕심이 나와 내 자녀, 가정과 교회가 큰 꿈을 꾸도록 이끌 것”입니다. 아직 “코로나-19가 힘들지만, 한주도 우리가 거룩한 욕심으로 꼭 해야 할 일, 큰 비전과 꿈을 가지고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