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메이시 백화점은 미국 백화점 업계에서 부동의 1위”였습니다. 당시 “메이시 백화점이 승승장구한 이유는, 다른 백화점보다 패션상품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가 되며 소비 성향이 바뀌어서, 소비자가 패션상품보다 생활용품을 사려고 백화점을” 찾았습니다. 당시 “메이시 백화점 매출의 60%가 패션상품이었기에, 경영진은 고심 끝에 ‘소비자가 패션상품을 더 사고 싶도록 백화점을 재정비하자!’ 결론을” 내렸습니다.

반면에 “당시 업계 4위였던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은 소비자의 성향 변화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당시 “소비자가 베이비붐 세대가 주류였기에, 바뀐 성향이 10년은 이어질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마침내 “백화점을 생활용품 전문점으로 바꾸었고, 순식간에 업계 2위로” 도약했습니다. 반면에 “업계 1위였던 메이시는 무려 20년간 쇠락을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사람과 “기업 모두 더 나아지고 발전하기 원하지만, 이는 소망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강해지고 나아지려면 이에 상응하는 삶과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특히 “더 강해지고 나아지는 삶은 인간적 결단과 세상이 주는 지혜로 이룰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과 기업, 교회가 사람의 지혜로 더 강해지고 나아질 수 있다면, 누가 어렵고” 약해지겠어요? 성경 속 “영적 거장 대부분은 처음보다 더 나아지고 강해진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훗날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이” 되었습니다.

갈대아 우리의 “평범한 노인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고,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던 간교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영적 거장들을 더 나아지고 강하게 하셨고, 그 하나님이 지금 내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본문은 “빌레몬서의 결론으로, 당시 바울은 로마 옥중에 있었지만, 영적 능력과 통찰력은 이전보다 더 강하고” 굳건했습니다. 바울을 “통해 거듭난 빌레몬도 도망 노예 오네시모를 받을 만큼 이전보다 더 강하고 나아졌고, 오네시모도 더 강하고 나아졌기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기에, 정체되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자라가야 하고, 항상 더 나아지고 강해져야 하지만, 현실을 보면 반대의 경우가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깊이 동역하는 교회는 언제나 더 나아지고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전보다 더 나아지고 강해질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더 나아지고 강해지려면,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합력해야 합니다.

바울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다시 돌려보낸 이유는 빌레몬이 동역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빌레몬이 동역자가 아니었다면, 죽을 것이 자명한 오네시모를 어떻게 돌려” 보냈겠어요? 또한 “본문에서 바울은 다른 동역자들,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와 누가 등을” 언급합니다. 당시 “에바브라는 빌레몬과 같은 골로새 교회 출신이었고, 의사 누가가 바울과 로마 감옥까지 동행했기에, 그 동역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옥중이지만 동역자들과 합력해서 어려움 없이 잘 지낸다! 그래서 조만간 만나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옥중에서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외롭게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서로 위로와 합력하며 바울은 하루하루 더 나아지고 강해져” 갔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도 날마다 더 나아지고 강해졌기에,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변화시켜 동역할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타인과 목적 없이 함께하고,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잘” 압니다. 실제로 “하나님 없는 함께함은 원하는 목적과 기대가 이루어지면, 함께할 이유가 사라져” 버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위한 함께함, 복음 증거를 위한 함께함, 사랑으로 함께 동역함에는 큰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전 4:11~12절은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한 자리에 함께하는 동석은 무기력하지만, 힘을 합하는 동역은 엄청난 에너지와 능력이 있음을”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기독교인은 항상 동석이 아니라, 합력하여 동역하며 살아갈 때, 이전보다 더 나아지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 누구도 바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어쩔 수 없이 바울을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보냈습니다. 젊은 시절 “바울은 다소에서 청운의 꿈을 꾸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낙향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 부르기까지, 10여 년간 고향에서 칩거할 때,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바울이 “안디옥에서 사역을 재개했을 때, 가장 큰 변화는 인간관계”였습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많은 동역자가 바울 주변에” 모였습니다.

이유는 “바울이 혼자 사역하지 않고, 교회마다 영적 리더를 세우며 동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롬 16장은 바울 주변의 동역자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은 동역보다 분열과 다툼, 갈등이 더” 많습니다. 어떤 “버스에서 승객 둘이 서로 고성으로 다투자, 누군가 하차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 불행히도 “이것이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을 향한 세상의 시각과 평가”입니다.

이처럼 “교회와 기독교인이 동역을 잃었기에, 모두에게 비판받고,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서로 동역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 각자가 다 달라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가장 큰 공통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한 소망 교회가 더 나아지고 강해지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내 주장이 있어도 내 주장과 태도로 누군가 실족한다면, 동역과 합력을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와 기독교인이 서로 분열하고 나뉘면, 나와 교회도 힘들어지고, 하나님도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중세의 “성자 프란시스코 옆에는 신실한 동역자 레오가” 있었습니다. 걸인이었던 “레오가 프란시스코의 청빈한 신앙에 은혜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레오는 “끝까지 프란시스코와 동행하며, 다윗과 요나단처럼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프란시스코처럼 주도적 인물은 물론, 레오처럼 이인자로 동역할 영혼도”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이인자보다 일인자를 꿈꾸기에, 동역과 멀어질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주님은 “마 23:11절에서,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말씀합니다. 목회 중 “가장 힘든 것은 설교 준비와 강의, 새벽기도보다, 분쟁과 다툼을 해결하려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게다가 “다툼과 갈등의 원인을 보면, 중요한 일보다 너무도 사소한 일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작은 갈등과 다툼을 극복해야,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항상 합력하고 동역하여, 날마다 더 나아지고 강해지기” 원합니다.

2. 더 나아지고 강해지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최고임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소출이 너무 많아서, 다른 창고를 지어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풍성했습니다. 특히 “눅 12:19절은,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말할 정도로”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아갈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청지기 사역을 충실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또한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노후 계획까지 잘 준비할 줄 아는 똑똑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부자를 지혜롭다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다고” 책망합니다. 이유는 “인생에서,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한 인식이 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자는 “있다가 없어질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기에, 어리석은 영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삶에서 “물질과 건강, 학력과 젊음이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모두 시간이 갈수록 퇴색해져” 갑니다. 자녀를 “최고로 알고 살았지만, 자녀가 성장하면, 자기 삶을 살려고 부모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자가 “좋아도, 정해진 때가 되면 먼저 하나님께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것 중,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말씀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서는 물론 모든 서신서 끝에서, 한결같이 하나님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자주 하나님 은혜라는 말을 들어서, 하나님 은혜에 관하여, 그렇게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모든 동역자에게 하나님 은혜가 함께하길” 원했을까요? 이유는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 은혜만이 영원하고 구원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있다가 없어질 것을 붙잡고 살면, 누구나 더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 영원하고 온전한 은혜를 붙잡아야, 더 나아지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수의 선교사역을 마치고 감옥까지 왔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로 은혜를” 꼽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뜻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의 은혜, 십자가 은혜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부자처럼, 있다가 없어질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더 나아지고 강하게” 하십니다.

바울이 “순교할 때, 로마의 통치자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 폭군 네로”였습니다. 네로는 “위대한 사도 중, 베드로와 바울을 죽여서 그 악명이 더” 컸습니다. 당시 “바울이 순교할 때, 바울과 네로 중 누가 더 영향력이 크고, 누가 더” 유명했을까요? 당연히 “로마 제국 전체에서 네로 황제가 훨씬 더 유명했고, 바울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바울과 네로 중 과연 누가 더 유명하고, 누가 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을까요?

혹자는 “오늘날 네로란 이름은 고양이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고” 조롱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로마 황제였던 네로보다 바울의 영향력이 훨씬 더” 클까요? 핵심은 “네로와 바울이 각각 붙잡고 살았던 가치가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네로는 “권력을 위하여 어머니까지 독살했지만,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붙잡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왜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야 할지, 그 답을” 줍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은혜를 간절히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은혜를 붙잡았다면, 은혜의 중요성은 충분히 설명된 것이” 아닐까요? 사사 “기드온이 군사력과 군사 전략을 붙잡았다면, 어떻게 미디안을” 이겼겠어요?

모세와 “출애굽 백성이 우상을 붙잡았다면, 어떻게 바로를” 이겼겠어요? 다윗이 “권력을 쟁취하려고 권모술수를 썼다면, 다윗이란 인물은 성경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 은혜를 붙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속 인물이 하나님 은혜를 붙잡았을 때, 그 결과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붙잡았을 때, 그들을 더 강하게, 더 나아지게” 만드셨습니다.

다행히! “하나님 은혜는 가려져 있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고, 나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의 권력과 명예, 물질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이민자의 삶이 버거울수록, 더더욱 은혜를 굳게 붙잡고 더 나아지고 강해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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