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이규태 씨는 한국인이 버려야 할 삶의 버릇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짜 좋아하는 버릇, 외제 좋아하는 버릇, 신용을 지키지 못하는 버릇, 헐뜯기 좋아하는 버릇, 형식 갖추기를 좋아하는 버릇, 학력에 집착하는 버릇, 남이 하니 나도 하는 버릇 등등!” 문제는 “이처럼 그릇된 삶의 모습이 많기에, 실제 삶이 달라져야 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미국 “제39대 대통령을 역임한 지미 카터는 저서 ‘살아 있는 신앙’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인은 일반 사람보다 높은 삶의 표준과 기대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해 주님이 보여 주고 가르쳐주신 삶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으로 세상과 달라야 함을 아는 것을 넘어, 실제로 달라지는 삶, 이전과 달라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합니다. 거룩함은 “세속적인 방식과 관점, 생각 등, 모든 면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와 기독교인의 비극은 세상과 다르기보다, 오히려 세상과 같아지고, 아니! 세상보다 더 세속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행전 11:26절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말씀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동역한 안디옥 교회는 세상과 많이 달랐기에, 불신자가 안디옥 성도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을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 예수쟁이로 불렀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가 세상과 심히 다르고, 구별되게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도망갔다 붙잡혀 왔다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서 거듭났기에, 더는 노예가 아닌 동역자로 골로새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만일 바울과 빌레몬, 골로새 교회 성도 모두가 세상과 다른 삶,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다면, 세속적인 삶을 고수했다면, 빌레몬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모두가 세상과 철저하게 달랐기에, 정죄와 비판, 심판보다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에 “오늘 우리도, 세상이 심히 악하고 패역해 갈수록, 오히려 하나님 믿는 기독교인답게 더 구별되고 달라져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악한 세상과 다르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면, 눈앞이 아닌 하나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5절은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말씀합니다. 바울은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주인을 떠나 도망간 것을, 특이하게도 잠시 떠나게 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떠나다. 원어 코리조는 ‘분리하다. 나눈다.’라는 뜻으로 도망갔다는 말과 그 어감이 완전히” 다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도망간 동기를,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서 분리한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이처럼 오네시모를 분리하여 떠나게 한 이유를 빌레몬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함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시 눈앞의 상식으로 본다면, 이는 도를 넘게 노예를 옹호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실제로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주인을 떠나 도망가면 안 되었고, 붙잡혀서 이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세상과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오네시모를 대했기에, 오네시모와 빌레몬 등, 모두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본문 16절은,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도 하나님 관점을 가지고 오네시모를 더는 노예로 대하지 않았기에, 빌레몬도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동역자로 받아 주기 바란다!” 청했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상황에서, 눈앞만 보는 것과 하나님 관점,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눈앞만 보고 살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무관심에 빠지고, 때로 감정에 사로잡혀 선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실수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문제는 “이처럼 눈앞만 보고 살아가려는 경향이 점점 교회 안에서도 더 커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돼지들을 큰 힘 들이지 않고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도살장까지 “돼지가 좋아하는 콩을 계속 떨어뜨려 놓으면, 돼지들은 눈앞의 콩을 주워 먹다가 도살장까지” 들어갑니다. 우리는 “돼지가 참으로 어리석다! 생각하지만, 이는 저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도 눈앞만 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얼마나 타락했는지, 얼마나 악해지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세상의 상식과 다르게, 더 깊게, 더 멀리, 더 높게 보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 “관점은 눈앞의 일보다 하나님 마음으로 누군가를 존귀하게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관점은 절대로 누군가를 파괴하고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하나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과 은혜로 부족한 나에게 다가왔기에, 우리가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특히 사랑하셔서, 야이로 딸을 살릴 때, 변화 산에 올라가실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항상 베드로를” 챙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받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욕하고, 저주하며” 부인하였습니다. 이유는 “베드로가 눈앞만 보고, 너무도 두렵고 무서워서, 후회할 일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눈앞에서 넘어진 베드로를, 세속적 관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베드로가 회복되어 헌신하고 복음을 전할 사역자로 자라갈 것을 보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세속적 관점은 눈앞만 바라보기에 상식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관점은, 죄인인 나에게 하나님 마음으로 악한 세상을 살게 하고, 매사를 하나님 시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도록 지혜를” 더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눈앞만 보면 매번 섭섭한 일, 상처와 시기 받을 일만 눈에” 보입니다. 심지어 “눈앞만 보면, 시험과 상처에 빠져서, 천국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관점으로 살아간다면, 섭섭하고 안타까운 일보다, 내가 수고하고 헌신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주변 사람과 동역하며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관점을 가지고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감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관점을 가지려면, 항상 말씀을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이 세상과 달라지는 것을 넘어 세상보다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물론 교회마저 눈앞만 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에, 나라도, 우리 교회라도 하나님 관점을 가지고 더 멀리 보며 헌신해야!” 합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항상 하나님 관점으로 살아서,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면, 매사를 하나님께 하듯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7절은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말씀합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와 빌레몬은 바울의 헌신으로” 세워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 바울이 골로새에서 사역할 때, 과연 어떤 자세와 태도로” 헌신했을까요? 바울은 “피곤하고 지치면 나중으로 미루고, 대충 어정쩡하게 사역하기보다, 매사에 하나님께 하듯 헌신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골로새 성도와 빌레몬이 바울을 깊이 존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가 바울과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어떻게 똑같이 대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나를 대하듯 대해 달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심지어 “본문 18절에서, 만일 오네시모가 입힌 경제적 손실이 있다면, 내가 갚겠다!”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가 왜 변화되었는지, 그 비결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오네시모를 차별하고 귀찮아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는 매사에 불안해서 경계심으로 컸을 것이고, 항상 부정적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바울이 비참한 노예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서, 마치 하나님께 하듯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오네시모를 하나님께 하듯 섬겼기에, 오네시모가 변화되었고,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가 노예를 동역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참으로 간사해서, 상황과 처지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자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저희 아들이 제게 섭섭했던 일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꾸중을 듣는데, 아빠의 표정과 말투가 아주 무서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인에게 전화가 오자, 제가 너무 부드럽게 답해서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제가 교인에게는 너무도 친절한데, 자기에게는 왜 그리 엄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듣고 제가 많이 반성하였고, 아이에게 설명하고,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편하고 이물 없다며, 함부로 대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가깝고 편한 관계라고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려면, 주변 사람에게 항상 하나님께 하듯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잘 아는 사람은 물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항상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부지중에 하나님 천사를 손님으로 섬기는 역사가 우리 삶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일을 할 때, 미래를 계획할 때,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하듯 하면, 그 열매와 상급은 오롯이 나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빌레몬이 바울의 권면대로, 오네시모를 하나님께 하듯 대했을 때, 오네시모가 받은 감격과 은혜가 얼마나” 컸겠어요? 나아가서 “바울의 말에 순종해서, 오네시모를 하나님께 하듯 섬긴 후, 빌레몬이 받은 은혜도 얼마나” 컸을까요?
경건했던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이방인의 부름을 받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특히 “행전 10:25~26절은,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 말씀합니다. 정복국 “군인 고넬료가 피정복국 평민인 베드로 앞에 간절함으로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이는 “고넬료가 그만큼 말씀을 사모했고, 베드로를 마치 하나님 대하듯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넬료가 베드로를 하나님 대하듯 했기에, 이방인 최초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 하듯 하기가 절대로 쉽지 않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 하듯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듯 한다면, 주어진 사역에서 신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하듯 한다면, 불평하고 원망할 수 없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적대시할 수 없고, 우리 예배는 물론 말씀을 대하고 받는 태도까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팬더믹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항상 ‘하나님께 하듯!’ 이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업터에서 항상 하나님께 하듯 할 때, 선한 열매가 있고, 우리 삶은 점점 세상과 달라지고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부족해도 ‘하나님께 하듯’ 살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이를 어렵게 여겨서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하듯 함으로,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