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어떤 묘지에 있는 특이한 묘비 문 몇 개를 소개하며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부지런한 내 딸 여기에 잠들다. 부활의 때에도 제일 먼저 일어나렴! 말이 많던 내 아내, 드디어 입을 다물다! 사랑하는 아내가 여기에 잠들다! 제발 아내를 깨우지 말아 주세요!” 한국에서 “걸레 스님으로 불린 중광은 ‘괜히 왔다 간다!’ 허무한 묘비 문을 남겼고, 세계적 문학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특이한 묘비 문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땅의 삶을 다한 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의 열매와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이왕이면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남기기” 원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이 땅의 삶을 다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례로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이면 500여 년 전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가 재등장”합니다. 가정마다 “추도 예배를 드릴 때마다, 조상의 이름과 삶, 추억과 교훈이 다시 등장”합니다.
저희 “교회 어떤 장로님은 특정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하나님 나라에 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삶의 열매가 항상 남기에, 우리는 이 땅에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남길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열매는 절대로 단시간에 맺힐 수 없고, 오랜 시간을 거쳐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정의 상징인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짧은 시간에,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가 “죄인으로 낙인 찍히기까지, 그 악행과 패역이 얼마나 깊고 오래” 이어졌겠어요? 실제로 “선한건 악하건, 삶의 열매는 평생을 뿌려온 인생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선한 열매는 시간이 지난다고,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맺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한 열매는 이에 상응하는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 리더인 빌레몬이 도망친 노예를 다시 품어서, 성경과 교회 역사에 참으로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남겼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을 떠난 노예였지만, 사도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영접하였고, 초대교회의 신실한 사역자로 그 삶의 열매를” 남겼습니다. 또한 “익명이지만, 골로새 교회 교인들도 오네시모를 수용해서, 신실한 영적 열매를” 남겼습니다. 나아가서 “노예를 변화시켜 사역자로 세운 바울이 남긴 열매도 절대로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또한 앞으로 어떤 열매를 맺고 싶으세요? 선한 열매를 맺으려고 어떤 수고를 감당하고” 있나요? 팬더믹은 “엄청난 위기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선한 열매를 맺는 방법을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한 번뿐 우리 인생에서 선한 열매를 맺을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세속적 관점이 아닌 믿음의 관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현대인은 “상황과 장소에 따라서,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안경을 착용하고” 살아갑니다. 실례로 “저도 책을 볼 때 쓰는 안경, 컴퓨터 작업 때 쓰는 안경,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안경, 운전할 때 쓰는 선글라스 등, 참으로 다양한 안경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안경을 언제 쓰는가? 이에 따라 보이는 대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처럼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는가?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 이는 절대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영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 악한 세상을 살아갈지,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 12:35절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선한 관점은 내 안에 이미 선함이 쌓여 있었기에, 그래서 세상을 선하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악한 관점은 내 안에 쌓인 악함으로 매사를 다 악하게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말합니다. 여기서 “아들, 원어 테크논은 (자신이 직접 낳은) 아들이란 뜻”입니다. 상식적으로 “옥중에 있던 바울이 어떻게 오네시모를 직접 낳을 수” 있었겠어요? 또한 “바울 주변에 동역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유독 노예 출신인 오네시모를 아들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이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눈으로 노예 출신의 오네시모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심복, 원어 스플랑크논은 인간의 몸에 있는 장기를” 뜻합니다. 당시 “바울 주변에 많은 동역자가 있었지만, 심복이란 단어는 오늘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이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동정하고 불쌍히 여겨서 잠시 거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도망쳐서, 어쩌면 죽을 수밖에 없는 오네시모를 철저하게 믿음의 관점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관점으로 보니, 오네시모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되었고, 자기 몸의 장기처럼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믿음의 눈으로 매사를 보았기에, 오네시모도 바울을 본받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빌레몬도 “바울처럼 믿음의 눈을 가졌기에, 당시 사회적 통념을 깨고, 도망친 노예를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마침내 “바울이 가진 믿음의 관점이 한 영혼을 넘어 골로새 교회와 수많은 교회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관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부터 가져야 할 거룩한 성령의 은사”입니다.
실제로 “나 역시도 죽어야 마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봐 주셨고, 먼저 다가오셨기에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반드시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듣고, 다가가며 악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믿음의 관점을 가지면 정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관점을 가져야, 우리가 영적으로 실족하지 않고, 더욱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도 “믿음의 관점으로 무장되었기에,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받았습니다. 오네시모도 “노비에서 동역자로 거듭남은, 그가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선교 사역을 시작하려 할 때,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마가가 이를 알고, 얼마나 난처했고, 마음속의 후회가 얼마나” 깊었을까요? 그러나 “마가는 낙담하지 않고, 믿음의 관점이 더 깊어지면서, 마가복음을 기술”했습니다.
이처럼 “마가가 믿음의 관점으로 바뀌었기에, 훗날 베드로가 마가를 자기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바울도 “믿음의 관점을 가진 마가를 꼭 필요한 인물로” 인정했습니다. 세상은 “믿음의 눈, 믿음의 관점을 핍박하고 고리타분하게 보지만, 그래도 우리는 매사를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미국은 “매사에 시간당 당 Pay에 따라, 물질로 사람을 평가해서, 시간 당 Pay가 많으면 성공이고, 시간 당 Pay가 적으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연 어떤 관점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할까요? 하나님은 “어떤 관점을 가진 영혼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실까요? 힘들어도 “나부터 철저하게 믿음의 관점으로 주어진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물질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없지만, 우리라도 물질보다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매사에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선하고 복된 열매 맺어가기” 원합니다.
2.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억지가 아닌 자원함과 기쁨으로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1666년 “런던 대화재로 1000년 역사의 세인트 폴 대성당이 전소”되었습니다. 이에 “크리스토퍼 랜이 성전 재건 현장을 방문해서 여러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이에 “몇 명이 ‘보면 몰라요? 돌 다듬잖아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려고 일합니다.’ 답했는데, 한 명의 대답은 이들과” 달랐습니다. “저는 하나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죄수인 제가 기술을 배워 하나님 성전을 짓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당시 “일하는 양이 달라서, 인부들의 답변이 제각각이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하는가? 여기에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억지가 아닌 자원함과 기쁨으로 주어진 일에 헌신할 때, 그 상급과 열매가 풍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는 일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매사를 “귀찮아하고, 변명과 핑계로 방해받지 않기” 원합니다.
당연히 “자원함을 잃었기에, 매사에 능률도 없고, 본인은 물론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문제는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은 내 것이 아니고, 비록 내가 했어도, 아무런 열매도 남지” 않습니다. 선한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매사에 어쩔 수 없음보다 자원함과 기쁨으로 행함이” 필요합니다. 본문 14절은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빌레몬은 “도망친 오네시모가 자신의 영적 스승인 바울을 만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상하지 못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바울은 오네시모를 양육해서, 다시 빌레몬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오네시모를 받아달라!” 읍소했습니다. 당시 “바울은 빌레몬이 온유해서, 자신의 제안을 수용해 줄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어쩔 수 없이 오네시모를 받지 않을까!’ 왜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만일 “빌레몬이 억지로 오네시모를 받았다면, 빌레몬서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고, 부담스럽고 버거운 일을 할 때,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억지로 할 경우, 열매도 없고, 나중에는 힘만 들고, 후회만 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일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지? 왜 내게 이런 부담을 주는 거지?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하면 안 되나?” 실제로 “거부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체면 때문에, 내가 받을 손해와 평판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은 주의 일을 할 때, 억지가 아닌 자원함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말합니다.
바울은 “한때, 오네시모를 자신을 섬기는 사역자로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섬기다! “디아코네오는 기독교인의 봉사와 섬김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만일 “오네시모가 바울을 억지로 섬겼다면, 바울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빌레몬에게” 보냈겠어요? 만일 “바울과 오네시모, 빌레몬 모두가 억지로 어쩔 수 없이 맺어진 관계라면 빌레몬서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 보면 “오네시모와 빌레몬 둘 다 항상 자원함과 기쁨으로 헌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의 삶에는 선한 열매가 풍성히 맺혔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매사에 자원함과 기쁨으로 하나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노아는 “인류의 두 번째 시조로, 세 아들 부부와 동역하며, 거대한 방주를” 지었습니다. 성경은 “침묵하지만, 만일 세 아들 부부가 어쩔 수 없이 방주 건조에 참여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다행히 세 아들 부부는 하나님 명령에 자원하여 토 달지 않고” 헌신했습니다.
문제는 “헌신의 열매가 분명히 있지만, 내가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행해서,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하나님 일에 항상 자원함으로 헌신한다면 얼마나” 복될까요? 교회가 “교회 되려면,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일하기보다, 기쁨과 자원함으로 일하는 영혼이 많아야!” 합니다. 저는 “한 소망 교회에 억지로 어쩔 수 없는 헌신보다, 기쁨과 감사, 자원함으로 헌신해서, 날마다 간증이 늘어가고 선하고 복된 열매를 맺어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