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신학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꼽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믿는 사람들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모든 물건을 함께 통용”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래서 구원받는 영혼이 날마다” 늘어갔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기적인 인간이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내놓음은 확실히 세상과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과 철저하게 달랐고, 세상 그 어떤 공동체보다 더 낫고” 우월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는 자기들끼리만 좋다고 말하지 않고, 세상이 예루살렘 교회가 더 낫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교회와 기독교인을 보면, 누구도 세상의 불신자보다 더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현대교회와 기독교인이 과거의 그릇되고 고루한 것을 붙잡고,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고, 안 지켜도 되는 것, 버려야 할 것을 지키려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유무상통은 고사하고, 서로 사랑해야 함을 알면서, 분쟁과 다툼이 없는 교회가 없을 지경”입니다. 불행히도, “현대교회와 기독교인의 문제는 세상과 불신자보다 더 못함에” 있습니다. 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면, 적어도 세상보다 나아야 하고, 더 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보다 나은 교회, 불신자보다 나은 성도의 모습은 바로 나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족해도 “나부터 세상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때, 나를 통하여 다시 영적 변화, 개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서를 쓴 핵심적인 이유는, 오네시모가 거듭나서 이전보다 더 나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오네시모가 도망쳤던 노예의 모습에 머물러서 바뀌지 않고, 비뚤어지고 괴팍했다면, 빌레몬서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변화되어 이전보다 더 나아졌고, 기독교인으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더는 노예가 아니라,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한 일꾼으로 인정하고,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오네시모처럼 변화되어 나아지고, 더 좋아지는 삶을 살아가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오네시모처럼, 세상보다 더 나은 모습을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세상보다 나은 삶을 살려면, 내가 먼저 복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경 “하나님 말씀, 복음의 가장 큰 능력은 죄인인 인간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4: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말씀합니다. 만일 “죄인인 인간이 복음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복음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오히려 내가 복음을 듣고 바르게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11절은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말씀합니다. 만일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에서 유익했다면 도망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오네시모를 처음 보았을 때, 그를 무익한 사람이라!” 말했습니다.
무익하다. “아크레스토스는 무능하다.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추측컨대 “빌레몬 집에서 샜던 바가지가 바울 곁에 있다고, 하루아침에 온전해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후, 이제는 바울과 빌레몬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유익하다. “유크레스토스는 유용하다.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하면서, 무익한 자에서 유익한 자로 훨씬 더 나아졌던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노예로 도망쳤지만, 세속적으로 악하게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 형상대로 선하게 변해서, 바울은 그를 심복으로” 불렀습니다. 교회와 “기독교인은 항상 복음으로 바뀌고 변화되어서, 영적으로 실족하지 않고, 선하게 쓰임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바뀌고 변화되어야 하는데, 핵심은 그 방향성과 결과가 선하고 신실하게 바뀌고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이 “평하며 ‘달라졌어! 바뀌었어!’ 감탄한 정도로 교회와 기독교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의 전통이 깊을수록, 성도가 오래 신앙생활을 할수록 과거에 붙잡혀서 잘 안 바뀌고, 심지어 과거보다 더 나빠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변화는 인력이나 세상 방식으로 불가능하고, 특히 세속적으로 변하는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이 유익하고 덕을 끼치도록 변화되려면, 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말씀과 “은혜만이 죄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바꾸고, 신실하게 가꾸어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 “대하여 살기등등했던 바울이 복음과 은혜로 변화되어 사도가 되었고, 평생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와 거듭남은 바울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쓰임을 받은 모든 기독교인도” 똑같았습니다. 실제로 “만일 사도들이 주님의 공생애 때처럼 사역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겠어요? 이처럼 “우리 각자가 더 나은 삶, 더 나은 교회를 만들려면, 물과 성령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악한 세상보다 더 나아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김익두 목사는 “깡패 출신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신유 은사로 많은 병자를 고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번은 “집회 인도를 위해 이동 중, 동네 깡패가 시비를 걸어서, 그냥 대항하지 않고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한참 “술 취한 깡패에게 맞은 후, 김익두 목사가 간곡한 어조로” 부탁했습니다. “오늘 밤 교회에 한 번만 꼭 오세요!”
그날 밤 “불량배가 정말 교회에 왔고, 자기가 시비 걸고 두들겨 팼던 사람이 바로 전설적인 주먹, 김익두 목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불량배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자, 김익두 목사가” 말했습니다. “예수 믿어서 나는 매를 맞고, 복은 당신이 받는군요!” 해석하면 “내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서 네게 맞아준 것이지, 아니면 너는 오늘 죽었을 거야! 경고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불량배가 예수를 믿고, 신실한 사역자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제보다 내일이 더 나으려면, 바로 나부터 복음과 은혜로 바뀌고 변화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변화되면 “내가 살고, 내 주변도 살고, 모두를 살리고, 하나님께도 영광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변화되지 않으면, 나도 죽고, 타인도 죽고, 주변 모두를 넘어뜨리고, 하나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지금 내게 이 메시지를 주심은, 이전보다 내가 더 나아져야 하고, 이전보다 주변에 더 많은 유익을 끼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팬더믹을 “통과 중인데, 영적으로 나아지고 성장해야, 이 재앙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영적으로 나아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필수 은혜임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항상 말씀과 은혜로 더 나아져서, 주변에 유익을 끼치며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세상보다 나은 삶을 살려면, 나부터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난 “1998년 한국이 외환위기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때, IMF는 한국 기업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1) 투명성을 높일 것, (2) 도덕성을 높일 것, (3) 불확실한 투자를 하지 말 것!” 그리고 “지난 2008년 미국 월가로부터 시작된 Subprime Mortgage Crisis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미국 경제가 무너질 때, 전문가들이 제시한 세 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1) 투명성을 높일 것, (2) 도덕성을 높일 것, (3) 불확실한 투자를 하지 말 것!”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차이가 있고, 상황이 조금 달랐지만, 문제는 모두 기본적 조건과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원칙이 꼭 경제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한국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할 지혜도 이 세 가지 원칙을 통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교회가 건강해지려면, 위기와 아픔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칙이 있고, 어려워도 이를 잘 지켜야!” 합니다.
본문 14절은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빌레몬에게 “바울은 영적 스승이자, 복음을 전해준 생명의 은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에게 바울은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 항상 존경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보내며, 빌레몬에게 읍소하며” 부탁했습니다.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변화되고 더 나아진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노예가 아닌 동역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먼저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허락과 동의를” 구했습니다. 빌레몬이 “허락해야, 오네시모가 더는 노예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철저히 낮아져서 빌레몬의 동의를 구하는 모습에서 바울의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중요하다고, 급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핑계 대고 혼자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걸린 문제였기에, 바울은 절차와 규칙을 더 정확하게 지키며 빌레몬에게 글을” 썼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신실하려면, 교회의 규칙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규칙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힘이 있고 없고, 직분의 차이와 무관하게 모두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규칙을 잘 지킬 때, 나와 교회가 이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지켜야 할 규칙과 제도 역시 잘 준수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에서도, 교회가 정해 놓은 질서와 규칙을, 바로 나부터 잘 준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이 오래 믿을수록, 직분이 있을수록, 제도와 규칙을 따르기보다, 오히려 규칙 위에 서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규칙과 제도를 내 기준에 맞추려고 억지를 부리기도 하고, 내게 불리하면 불평하고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나 성도 개개인이 이처럼 규칙과 질서를 잘 지키지 않으면, 악순환이 반복되어, 모두를 힘들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질서와 규칙을 안 지키는 분이 세상에서 질서와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입니다. 질서와 “규칙은 서로 합의한 약속이기에, 힘들고 손해 나도, 반드시 나부터 지켜야!” 합니다. 비록 “작아 보이지만,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킬 때, 교회와 우리 개개인이 세상보다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85세의 “갈렙이 헤브론을 점령하기 전, 먼저 여호수아를 찾아와서 전후 과정을 설명하며 허락을” 구했습니다. 한 세대 전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충성스러운 보고를 했던 영적 어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갈렙은 공동체의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어른이었던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먼저 보고하고 허락을” 구합니다. 환언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영적 동역자였지만, 질서와 규칙을 존중했던 것”입니다.
이에 “수 14:13절은,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말씀합니다. 출애굽의 “두 영적 거장이 서로 질서와 규칙을 지켰고, 이를 통해 귀한 본을 남겼던 것”입니다. 한소망 교회는 “감당해야 할 일, 헌신해야 할 일이 참 많은 교회이기에, 더더욱 규칙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에 “우리가, 아니 나부터 교회 안팎으로 질서와 규칙을 잘 지켜서, 날마다 더 나아질 수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