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뉴욕타임스가 미국의 상위 1% 부자의 성공 과정, 사업 철학, 가치관과 생활습관 등, 부자가 된 비결을 자세하게 취재하여” 보도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상위 1% 부자는 성공한 방법과 사고방식 등이 각자 달랐고, 사는 지역마저도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부자는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미국의 상위 1%는 하루에 일하는 시간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많았는데, 평균 3배가 더” 많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상위 1%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만, 상위 1%의 자세와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상위 1%라고 특별한 것을 먹고, 우리와 다른 독특한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성공비결은 특별하고 부지런한 삶의 태도와 자세,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풍성한 삶, 성령 충만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특정인에게만 구별된 은혜와 특권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영적 거장을 살펴봐도,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에게 주지 않는 것을 더 많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영적 거장은 말씀을 확신하고, 하루하루 신실하게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이처럼 “삶의 태도와 자세는 내 미래를 바꾸고, 천국의 상급까지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가진 삶의 자세와 태도는 내 가족과 교회, 직장과 사회 곳곳에 큰 영향을” 줍니다. 교회는 “제도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로 구별된 백성의 모임이기에, 당연히 세상과 다르고 구별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처럼 거룩해라 온전하라 빛과 소금처럼 살아가라!” 말씀합니다. 바울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아들로 삼은 것은 세상과 다르고 구별된 삶의 자세와 태도”였습니다.
오네시모도 “주인으로부터 도망해서 악함과 범죄에 빠지지 않았고, 악한 세상과 다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살았기에, 노예가 사역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노예인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빌레몬이 세상과 다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바울과 오네시모, 빌레몬 등, 빌레몬서 등장인물이 세상과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가 같았다면, 빌레몬서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는 것보다, 하나님 백성다운 태도와 자세로 살아감이 더” 중요합니다. 비록 “팬더믹과 세상의 짐이 무거워도, 우리는 하나님 백성답게 세상과 다른 삶의 자세와 태도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어떻게 자세와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우리가 주변에 덕을 끼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도 술과 담배에 관하여 상당히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20세기 초반, 한국 사회가 너무도 가난했는데, 한국인이 지나치게 술과 담배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많은 “남성이 술과 담배에 탐닉하며 딸을 파는 등, 악행이 참으로” 극심했습니다. 이에 “장로교총회는 구원이 아닌 덕을 세우기 위해서 술과 담배를 교단법으로” 금했습니다. 실제로 “성경 어디에도 술과 담배로 인해 구원받지 못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목회자와 장로가 술 담배로 본이 되지 않게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딤전 4:4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말씀합니다. 그러나 “고전 8:13절에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이라면 누구나 절제해서라도, 희생과 손해가 있더라고, 주변에 덕을 끼치며 살아가야 한다!” 도전합니다. 본문 6절은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과 교제가 주변 모두에게 선한 영향력, 덕을 끼쳤다!” 말씀합니다. 또한 “본문 7절은,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말씀합니다. 당시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 모두에게 평안을 줄 정도로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영적 스승인 바울조차 빌레몬의 사랑, 신실하고 거룩한 영적 태도와 자세에 큰 도전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의 신실한 자세와 태도는 주변 모두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덕을 세우기보다, 내 기준과 위주로, 내가 좋으면 그것을 진리로 알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는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 덕을 끼치는 삶은 관심 밖이고, 심지어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서로에게 덕을 끼치려는 자세와 태도가 사라져가기에, 세상이 교회를 더 강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덕을 끼치는 삶은 모든 삶이 내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과 타인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덕을 “끼치는 삶은 믿음이 연약한 분이 실족하지 않도록 양보하고, 먼저 생각하는 성숙함이” 있습니다. 심지어 “주변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삶은 누군가가 살 수 있다면, 내 손해마저 감수할 수 있는 넓은 마음”입니다.
부족해도 “내가 타인과 주변에 덕을 끼쳐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내게 덕을 끼치셔서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 예수를 온전히 믿는 영혼은 누구에게나 덕을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주변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삶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채우심과 복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주변 사람에게, 일상생활에서 덕을 끼치며 살아갈 때, 어려움과 아픔도 있고, 알아주지 않음도 많고, 억울하고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덕을 끼치는 삶에 더 큰 은혜를 채워” 주십니다.
다윗은 “중증 장애인이었던 므비보셋을 친아들처럼 귀하게 여기고, 한 식탁에서 먹게”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이었는데, 과연 다윗이 누구를 기억하고 므비보셋에게 덕을” 끼쳤을까요? 우리가 “알듯이, 사울은 3,000명의 호위부대를 이끌고, 기회가 되는 대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다윗에게 덕을 못 끼쳤지만, 요나단은 매사에 다윗을 배려했고, 그 삶에 잊지 못할 선한 영향력과 덕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덕을 끼쳐서 다윗은 물론 므비보셋도 높아졌고, 모두가 연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변에 선한 영향력, 덕을 끼치는 것은, 사실! 그 영혼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할수록 “내가 덕을 끼치면, 배려하고 섬기는 자세와 태도로 살아가면, 주변에 살릴 수 있는 영혼이 너무도”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은혜가 있지만, 타인을 살리고 덕을 끼치는 마음, 자세와 태도가 부족한 것”입니다.
오늘처럼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은혜받으면, 덕을 세우는 삶의 가치를 알면, 우리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누구에게나 덕을 끼치겠다 마음을 정하고 결단해야, 하나님 영광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덕을 끼치는 삶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덕을 끼치는 자세와 태도로 매일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모든 삶의 정황에서 겸손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한국의 “저명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박윤선 목사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려” 합니다. 한 번은 “제자 목회자가 박윤선 목사님 가정을 방문했는데, 때마침, 박 목사님 가족이 매일 드리는 예배시간이” 되었습니다. 제자는 “존경하는 박 목사님 가정의 가정예배가 어떨지, 기대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이 제자에게 갑자기 ‘오늘 가정예배 설교를 해 달라!’ 정중히 부탁했고, 제자는 스승의 제안에 깜짝 놀라며 극구 사양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박 목사님의 간곡히 부탁했고, 예배가 시작되자, 박 목사님이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하나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박윤선 목사님과 제자 중 누가 더 큰 은혜를 받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겸손은 “닫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죄를 깨닫게 하며, 나를 새롭게 만들어주는 뜨겁게 역사하는 힘이 크지만, 현대 기독교인은 이처럼 큰 겸손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나부터 겸손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겸손하면 세상에서 뒤처지고 패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겸손하신 분을 꼽으라면, 당연히 우리 주님일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화려한 병원이 아니라, 더럽고 냄새나는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많은 경우 “먹을 것도 없었고, 주무실 마땅한 장소도 없이 사역하셨고, 이 땅의 삶을 다하실 때도 사회적으로 최하층 천민이 심판받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겸손은 과거와 오늘, 주님의 재림까지 가장 큰 능력으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난 교회와 기독교인이 겸손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본문 9절은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말씀합니다. 여기서 “간구하노라! 파라칼레오는 ‘낮은 자세로 부탁하다. 간청하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당시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게다가 빌레몬보다 나이도 많았고, 영적인 스승”이었습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와 빌레몬, 모든 동역자는 모두 바울로 인해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일을, 빌레몬에게 명령이 아닌 겸손함으로 읍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서 오네시모를 거두었다고, 또한 그가 거듭났다고, 빌레몬에게 통보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적 아버지이자 스승이었지만, 오네시모에 관한 것을 그 주인 빌레몬에게 겸손히” 부탁합니다. “오네시모가 네 종이기에 네 허락을 받고 동역하겠다!” 이에 “본문 8~10절에서, 영적 스승인 바울이 빌레몬에게 ‘간구한다!’ 이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씁니다. 당시 “바울의 겸손한 태도와 자세가 빌레몬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을까요? 이처럼 “바울의 겸손 때문에 빌레몬은 도저히 바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은 힘과 능력이 있기에, 작은 교회인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도 겸손의 자세와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겸손을 뭔가가 부족해서, 무엇인가 아쉬워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주변에서 겸손은 사라지고, 금수저, 은수저, 높낮이를 따지고 구분하는 악행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소유와 세상 기준으로 상하를 구분해서, 서로 다투고 경쟁하며 어떻게든 위에 서려고” 합니다. 그래서 “겸손이 필요하지만, 겸손을 선택하는 영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겸손은 “무엇인가 없어서, 부족해서가 아니라, 풍성하고 넉넉하지만,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받은 은혜 때문에, 내가 자발적으로 낮아지고, 섬기려는 태도와 자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교만할 수 없고,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겸손한 기독교인을 높여주시고, 그 삶을 책임져 주시고, 높이 세워” 주십니다. 실제로 “교만해서 얻는 것은 금방 허망하게 사라져도 겸손으로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빌 2:5~7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말씀합니다. 또한 “마 20:28절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을 깊이 본받아서, 하나님 백성답게 겸손의 태도와 자세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