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출 34:7절에서, 인자는 천대까지 베풀지만, 악과 죄는 자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천대, 라알라핌은 단순히 천 년이 아닌 수 천대, 영원함을” 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히 이어지지만, 죄에 대한 보응은 삼사대까지 이어진다!”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임하면 그 인생이 영원히 주 안에서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엄한 꾸짖음이 임하면 누구도 삼사대를 넘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함과 죄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살기를 원하기에, 우리를 엄히 꾸짖고” 책망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엄하게 꾸짖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엄한 꾸짖음이 있지만, 오히려 이보다 더 큰 하나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는 “천대까지 이어지는 인자하심 안에서 살아갈지, 엄한 꾸짖음 안에서 살아갈지, 이는 철저히 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당시 “크레테 섬은 거짓말쟁이, 게으름뱅이, 악한 짐승처럼 살아가는 영혼이 많은 영적 볼모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어라!” 명합니다. 엄히 꾸짖다, “엘렝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서 ‘호되게 나무라다, 책망하다.’라는 뜻으로, 새롭게 되고 고쳐지기까지 계속 꾸짖으라는 명령”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호되게 꾸짖고 책망하면서까지 크레테가 바뀌기 원했고, 그래서 아끼는 영적 아들 디도를 남겼던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책망은 유기(Reprobation)인데, 이는 내가 선하건 악하건,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상관하지 않고 무관심으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엄한 꾸짖음과 책망에 마음이 찔린다면, 나는 아직 영적으로 살아있고, 여전히 하나님 사랑과 은혜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유는 “영적인 사생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절대로 깨달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20년부터 “우리는 Pandemic을 겪으며, 마치 하나님의 엄한 꾸짖음 속에 살아가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회고할수록,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사랑이 있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지금 우리 일상에 하나님의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엄한 꾸짖음 속의 사랑을 체험하려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거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악한 짐승, 거짓말쟁이, 게으름뱅이가 가득한 크레테에 디도를 남겨둔 이유가” 있었습니다. 디도가 “크레테 인을 엄하게 꾸짖어서 허탄한 이야기보다 진리를 믿고, 하나님을 시인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바뀌려면, 크레테 인이 과거부터 행해온 죄와 악을 멈춰야!” 했습니다. 디도는 “이처럼 아닌 것은 아니라고, 옳은 것은 옳다고,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크레테에 남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도!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사랑을 누리려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거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양다리 신앙은 절대로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어정쩡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을 단호히 거부해야 비로소,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니고 틀렸다면 핑계와 변명을 찾지 말고 용기 있게 멈춰야!” 합니다.

머뭇거리면 “마치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이어지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엄한 꾸짖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적인 불량자들”이었습니다. 둘은 “예배를 가볍게 여겨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착복했고, 성전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 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 엘리가 이를 알고도 두 아들을 막지 못했고, 두 아들도 죄의 심각성을 알았지만, 멈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대제사장인 엘리 가문의 영적 권위가 사무엘에게 옮겨졌고, 두 아들이 한 날에 죽고” 맙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삼상 3:14절에서,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가문을 엄하게 꾸중하며 돌이키려 했지만, 악을 멈추지 않았기에, 마침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니고 틀린 것을 멈추고 거부하려면, 반복하지만, 나만의 회개 노트 기록에 도전해보기!” 원합니다.

혹자는 “회개 노트가 부담된다, 어렵고 익숙하지 않다!”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 노트는 내가 행한 죄,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든 것, 아닌 것, 틀린 것을 직접 기록해서, 이를 멈추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물론 “회개 노트를 쓰면 부정적 면이 많이 나타나겠지만, 그래도 도전해야,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을 넉넉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회개 노트에 도전해서, 내 삶을 더 정결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아닌 것, 틀린 것을 멈추고, 깨끗이 씻어내야 비로소,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1938년! “주기철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생명을 걸고 이를” 반대했습니다. 당시 “주기철 목사는 노모와 아내, 네 명의 자녀가 있었기에, 자신과 가족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얼마나 크고” 깊었겠어요? 또한 “당시 주기철 목사가 섬기던 평양 산정현 교회는 성전 건축이 완공된 후”였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가 아니고 틀렸기에, 가족과 성전 건축까지 뒤로 하고, 순교를” 택했습니다. 특히 “당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홍택기 목사와 주기철 목사는 신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둘은 “함께 동문수학했지만, 하나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거부했고, 다른 하나는 아닌 줄 알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지만, 훗날 박해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을 체험했고, 다른 한 사람은 편안함을 쫓다가 엄청난 오명을”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니라면서, 틀렸다면서, 이를 거부하지 못해서 후회하고” 아파합니다. 특히 “영적 문제에서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하면, 그 후회와 아픔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려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도 하나님과 한 방향에 서야!” 합니다.

이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온라인 제직 수련회가” 있습니다. 제직인 “내가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해야 우리 신앙생활이 건강하고, 우리 자녀들의 미래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제직 수련회를 통해 아닌 것을 거부하고, 선한 일에 더 힘있게 헌신하기” 원합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나부터 바르게 배우고 훈련받아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거부하며,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2. 엄한 꾸짖음 속의 사랑을 체험하려면, 내 속 사람을 신실하게 가꾸어가야 한다.

디도가 “사역해야 할 크레테는 많은 것이 바뀌고 변화되어야 할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레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일일이” 열거했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결단과 각오로 불순종이 순종으로, 속임수가 정직으로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결심한다고 “하루아침에 거짓말쟁이/게으름뱅이/악한 짐승과 같은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유는 “본문 15절 말씀처럼, 크레테 인의 마음과 양심이 심히 더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감독과 장로부터 속사람이 변화되기 원했고,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해서, 이전과 달라지고 새롭게 되기” 원했습니다. 크레테 인의 “양심과 속사람이 바뀌어야, 삶의 태도와 신앙생활은 물론 현재와 미래가 바뀔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공간”입니다. 문제는 “속사람이 가진 선한 생각은 선하게, 악한 생각은 악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속사람은 “표정과 어투, 작은 행동과 눈빛에서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죄인인 인간이 편하고 익숙한 것, 자기 위주로 살아서, 속사람이 잘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가 “치과의사인 남편에게, 눈에 뭐가 들어갔는데, 좀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치과의사인 남편이, 엄지와 검지로 아내의 눈을 벌리며” 말했습니다. “아~”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려면, 무엇보다 내 속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한 번의 설교로 삼천/오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베드로는 혼자 살겠다고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성령의 임재로 속사람이 변하면서, 겉 사람은 물론 인생 전체가” 변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주님의 공생애 때도, 설교 한편으로 삼천 오천을 변화시켜서 주님께 인정받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능력은 베드로의 속사람이 바뀌면서 일어났고, 마침내 수많은 사람의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출발이” 되었습니다. 속사람은 “비싼 화장품, 좋은 옷과 자동차, 명품으로 나를 가꾼다고 신실하게 바뀌지!” 않습니다. 속사람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으로, 성령의 가르쳐주심과 생각나게 하심으로만 가꿀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내 속사람이 성령의 은혜로 바뀌지 않으면, 내 삶은 절대로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고, 아니! 점점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가 “아프로디테를 찾아가서 자신을 아름다운 여성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양이가 “어떤 청년을 보고 반해서, 꼭 결혼하고 싶다고 간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신이 고양이를 불쌍히 여겨서, 소원대로 아름다운 여성으로 만들어 주었고, 마침내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프로디테가 신혼 방에 쥐 한 마리를 들여” 보냈습니다. 그러자 “처녀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쥐를 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처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바뀌었는지, 다 잊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너무도 기가 막힌 아프로디테는 여인을 다시 쥐로 만들어” 버렸답니다.

속사람의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올해 “당회는 새로운 일꾼을 세우려고 계획 중인데, 많은 분이 새로운 일꾼을 잘 훈련해야 교회가 산다!” 조언했습니다. 물론 “이 말의 의도를 알지만, 교회가 든든하게 살아나려면, 새로운 일꾼은 물론, 바로 나 자신부터 말씀으로 계속 교육받으며 내 속사람을 신실하게 가꾸어가야!” 합니다. 일부가 “아닌 모두가 훈련받고 말씀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속사람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항상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안 늦었기에, 먼저 모든 장로와 안수집사, 권사와 서리 집사, 찬양 대원과 교사가 먼저 훈련받고, 말씀으로 속사람을 가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바로 나부터 속사람이 바뀌면 교회가 바뀌고, 우리 가정과 세상이 바뀌어 갈 것”입니다. 이처럼 “나부터 말씀 훈련으로 속사람을 잘 가꾸어서 엄한 꾸짖음보다 더 큰 하나님 사랑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